140. 하북의 무인 (2)
이의민과 안량의 일기토가 시작되니 양 군사들은 잠깐 싸움을 멈추고 둘의 일기토를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수십 합이 지났다. 이의민의 대부와 안량의 창이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는 등 나름 치열하게 합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원소군은 손에 땀을 쥔 채 일기토를 관전했고, 이의민군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이의민군이 이 일기토를 그리 보는 이유는 역시 생각보다 일기토가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의민이 안량을 대번에 쓰러뜨릴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수십 합이 넘었고 거의 백여 합이 다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안량이 정말 이의민과 대등하게 합을 주고받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의민은 일부러 안량에게 공격 기회를 주면서 방어에 치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안량은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이의민에게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 명백하게 실력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의민군의 상장들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아주 여유롭게 일기토를 관전 중이다.
“주군께서 안량이 마음에 드는가 보군. 일부러 그와 적당히 합을 주고받고 계시는군.”
“호기롭게 주군께 먼저 덤벼든 패기가 마음에 드신 것 같소. 그래도 안량이란 이름이 완전히 허명은 아니었군. 주군께서 봐주시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아예 실력이 없다면 저리 합을 받아주실 리가 없으니....”
일기토 경험이 많은 문추도 일기토를 지켜보면서 둘의 실력 차이가 현격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크윽! 역시.... 이의민은 차원이 다르다. 안량은 전혀 상대가 되지 못하는 구나....’
그리고 그 실력 차이를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자는 바로 이의민을 직접 상대하고 있는 안량이다.
‘크으윽! 내 공격이 전혀.... 전혀 먹히지 않는다니....’
안량의 눈빛은 좌절로 물들었다. 이의민이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목이 달아날 거라는 것을 안량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안량이 아닌 다른 자였다면 진작 싸울 의지를 잃고 스스로 무기를 버렸을 터였다.
그래도 안량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문추에게, 그리고 다른 군사들에게 자신만 믿으라며 나섰었다. 그들의 믿음을 이리 쉽게 저버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단 하나의 공격이라도 성공시키기 위해, 아니. 성공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이의민을 위협하기라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이의민은 안량의 그런 끈질긴 투지가 적잖이 마음에 들었다. 주인을 위해,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는 패기도 마음에 들지만, 그것보다 지금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려는 안량의 자세가 더 마음에 드는 이의민이다.
‘이런 장수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군. 허나 금방 끝내는 것도 아쉬워....’
이의민은 아쉬운 마음에 안량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기로 했다.
“말과 몸이 너무 따로 놀고 있어! 엄연히 말을 타고 있는데 말과 한 몸처럼 움직여야 제대로 된 위력과 속도가 나올 것이 아닌가! 좀 더 말의 움직임을 이용해 봐!”
순간 안량은 이의민이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의민은 그런 안량을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조언했다.
“창을 찌를 때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잖아! 팔 힘만으로 창을 찌르기보다는 반동을 이용할 줄 알아야지! 그런 식으로 찌르기를 하면 정확도가 많이 떨어질 뿐더러 찌르는 힘도 오히려 떨어질 뿐이야.”
결국 안량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승상! 나도 승상께 상대가 아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허나 부디 무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아주시오. 제발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이오.”
호통 치듯 얘기한 안량이지만 애원에 가까웠다. 안량은 이의민에게 호소한 직후 후회했다.
‘어차피 난 승상 앞에서는 약자다. 약자에게 무슨 예우란 말인가? 난 나보다 약자를 상대할 때 예우를 했던가....? 이런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안량은 다시 한번 이의민의 조롱이 쏟아질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의민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조롱기가 하나도 없는 아주 진중한 얘기였다.
이의민은 정말 안량을 조롱할 생각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무인이면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무인으로서 대우를 해주는 게 이의민의 성격 아닌가.
“그리 느꼈다면 미안하군.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냥 몇 마디 조언해준 것이니 크게 신경 쓸 것은 없네. 언짢았다면 그만하지.”
진심이 가득 담긴 이의민의 얘기에 안량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느꼈다.
‘아아! 승상은 진정으로 내게 가르침을 주려고 했었구나.’
이의민의 진심을 느끼자 안량은 그가 정말 스승처럼 느껴졌다.
“소인배의 투정에도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승상. 괜찮으시다면 조언을 계속 부탁드립니다.”
“원한다면....”
안량의 부탁에 이의민은 정말로 조언을 더 해주었다.
“이럴 땐 목이 아니라 옆구리를 노렸어야지. 무거운 대부로 목을 방어하는 게 쉽겠나? 아니면 옆구리가 쉽겠나? 물론 내겐 둘 다 통하지 않긴 하지만....”
이후로도 이의민의 조언을 계속 이어졌고, 안량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실력이 더 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승상의 조언대로 하니 내 실력이 한 단계 더 올라갔다.’
자신도 모르게 희열을 느끼는 안량.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의민과 안량이 정말 스승과 제자가 될 수는 없다. 엄연히 서로를 죽이려는 적이었다.
절로 이의민에게 존경심을 느낀 안량은 투지가 자신도 모르게 줄어들었다. 그것을 느낀 이의민은 필요한 조언을 다 마치고 마지막 조언을 해주었다.
“여기가 전쟁터라는 것을 잊지 말라. 서로에 대한 호감보다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물론 자네가 본초가 아닌 내 곁에 서겠다면 혹시 또 모르지만 말이야....”
이의민의 얘기가 무슨 뜻인지 깨달은 안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더 이상 일기토를 지속할 수 없었다. 끝이 다가왔다.
“승상께 받은 가르침을 참고하여 다음 일합에 제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승상께서도 부디 더 이상 소장을 봐주시지 말고 최후의 일격을 가해주시길 부디 부탁드립니다.”
이의민은 더욱 안량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얻을 수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무인으로서의 태도도 충분히 느꼈지만 그 안에서 원소에 대한 의리와 충성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자에게는 항복 권유를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자에 대한 모욕이다.
“알겠다. 그럼 먼저 들어와.”
안량은 번개 같은 속도로 이의민을 향해 창을 찔러 들어갔다. 여태껏 이의민이 해주었던 조언들을 모두 집대성한 일격이었다. 확실히 그 일격은 이전에 안량이 했었던 공격들에 비해 힘과 속도가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그 공격을 받아내는 이가 다름 아닌 이의민이다. 이의민은 가볍게 대부로 안량의 창을 쳐내고, 대부를 다시 휘둘러 안량의 가슴 쪽으로 밀어 넣었다.
퍼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안량이 쓰러졌다.
“크어억!! 승상... 과연... 천하제일의... 무인이십... 여, 영광....”
“안심하고 눈을 감아라. 너는 충절을 지킨 진정한 무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네 가족들은 모두 내가 보살펴주겠다.”
“가... 감사합니다. 승상....”
끔찍한 최후를 맞는 안량이지만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웠다. 이의민은 그런 안량에게 다가가 직접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안량의 최후를 지켜본 문추는 눈이 뒤집어졌다.
“아, 안량! 안량!!!”
호적수이자 친구였던 안량의 죽음을 지켜본 문추의 두 눈에 핏발이 잔뜩 일어섰다. 문추는 그대로 이의민에게 돌격하려 했다. 자신 역시 안량과 마찬가지로 이의민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딴 것은 아무 상관없었다.
“이의민! 이놈!!”
일격에 도륙 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의민에게 달려들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문추다. 그때 누군가 문추의 앞을 막았다.
“죽기 싫으면 당장 비켜라!”
단번에 상대를 베고 이의민에게 가려는데, 상대는 너무도 쉽게 문추의 공격을 막았다.
“방금 전 안량을 보지 못했나? 승상은 네가 상대하실 분이 아니다.”
“이 조무래기 놈이....!”
“훗! 조무래기라.... 네가 과연 날 조무래기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 놈인지 확인해보지.”
곧 문추와 상대가 본격적으로 합을 주고받았다.
상대의 복장을 보니 그리 높은 직위에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상대는 문추와도 대등한 무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상대는 바로 감녕이다.
“하핫! 어떤가? 날 보고 조무래기라더니, 그 조무래기를 상대로 전혀 압도하지 못하는군.”
문추는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 당장 이의민에게 달려가서 그가 죽든 자신이 죽든 사생결단을 내고 싶은데, 직위가 낮은 하급 장교 한 명에게 묶여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감녕과 합을 나누면 나눌수록 문추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문추의 마음이 급해서 온전한 실력을 다 발휘하기 힘든 상황임을 감안해도 엄청난 일이다.
‘이의민군은 이런 하급 장교조차 나와 대등한 실력을 가졌단 말인가....?’
문추의 눈빛이 점점 절망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문추의 오해다. 이의민군의 하급 장교들이 다 문추 같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현재 감녕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장수들도 감녕에 비해 훨씬 못한 이들이 많으니까.
이의민은 문추와 호각지세로 싸우는 감녕을 보며 순유에게 넌지시 얘기했다.
“저런 놈을 일개 교위로 썩힐 순 없지. 저기 위연이란 놈도 싸우는 꼴을 보니 썩 괜찮아 보이는군. 오늘 전투가 끝나면 둘 다 적당한 장군직을 내려.”
“예. 주군.”
이의민을 맡았던 안량은 이미 죽었고, 나머지 장수들을 맡기로 했던 문추는 감녕 한명에게 묶였다. 나머지 장료, 마초, 황충, 위연 등이 활개를 치며 원소군을 박살냈다. 그들을 따르는 군사들도 덩달아 사기가 오르며 원소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순우경은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추마저 잃을 순 없다.’
“징을 쳐라!”
순우경의 지시로 퇴각 징이 울렸다. 하지만 문추는 그것을 못 들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것인지 감녕과의 일기토를 그칠 생각이 없었다. 보다 못한 순우경이 직접 문추를 불렀다.
“문추 장군! 그만 돌아오게!”
문추는 인상을 구겼다. 이의민을 상대하기는커녕 무명 장수를 상대로 물러서야 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순우경의 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결국 문추는 말머리를 돌려 원소군 진영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원소군 군사들도 퇴각 징만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퇴각했다.
이의민군은 그들을 굳이 쫓지 않았다. 양쪽 다 전 병력이 동원된 전투가 아니라서 더 무리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됐다.
그렇게 첫 번째 전투가 끝이 났다. 사실상 이의민군의 대승이라 봐야했다. 이의민군은 잃은 병력이 천 명이 채 안 됐고, 원소군은 무려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여전히 전체 병력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손실이지만, 어쨌든 양 군의 피해 병력이 5배 이상 차이가 났다. 결정적으로 원소군은 상장 안량을 잃었다.
쾅!
원소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분을 삼켰다.
“안량이... 안량이 죽었어! 안량이 죽었다고!!”
급기야 눈물까지 터뜨리는 원소. 안량은 문추와 함께 그가 가장 아끼는 장수가 아닌가.
전풍이 다가와 원소를 위로했다.
“주군. 안 장군의 죽음은 주군께... 아니. 하북 모두에게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슬퍼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의민과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안 장군의 혼을 위로해줄 유일한 방법입니다.”
“자네의 말이 옳군. 고람에게서 연락은 왔는가?”
“예. 바로 내일 이 시각 둑을 무너뜨리겠다고 합니다.”
“그럼 이의민, 그놈이 웃을 수 있는 시간도 딱 하루가 남은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채 방비에만 신경을 쓰다가 고 장군이 둑을 터트렸을 때 혼란에 빠진 저들을 처리하면 됩니다.”
원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를 갈며 이의민군 진채 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량... 지켜보아라. 내일 내가 반드시 너의 원수를 갚아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