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하북의 무인 (1)
문추는 선두에서 오는 이의민을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원소의 지시대로 이의민과의 대결을 최대한 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의민이 저리 선두로 나서니 피하기도 쉽지 않게 됐다.
문추는 그래서 안량을 조용히 불렀다.
“안량. 주군의 말씀대로 우리가 이의민을 합공해야겠군. 한데 문제는 다른 장수들은 어찌한다....? 다른 놈들도 만만찮아 보이는데....”
문추의 고민에 안량은 자신의 창을 천천히 만지작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방법은 간단하지 않은가?”
문추는 너무도 쉽게 대답하는 안량을 보고 화색이 됐다.
“무슨 수가 있는가?”
하지만 이어진 안량의 설명에 사색이 됐다.
“나 혼자 이의민을 상대하겠네. 그럼 자네가 나머지 놈들을 맡아주게.”
“뭐? 안량! 자네.... 혼자 이의민을 상대하겠다는 것인가?”
“그래. 내가 이의민을 상대할 것이야. 모두가 공인 하는 중원 최강의 사나이 이의민. 그를 상대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터.... 사내로서 난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네.”
“안량! 미쳤는가? 주군께서 신신당부하셨던 것을 벌써 잊었나? 최대한 그와의 직접적인 싸움을 피하고 어쩔 수 없을 때만 합공하라 하지 않았는가?”
문추는 안량을 말리려했지만, 안량은 문추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안량은 원소 앞에서는 순순히 그리 하겠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정말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안량도 문추와 함께 하북 최강의 장수로 명성을 날렸던 인물이 아닌가.
비록 최근에는 여포니 관우니 조운이니 장비니 하는 괴물들에게 완전히 밀리면서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멀어지긴 했다. 특히 최근 공손찬과의 전쟁에서 이의민이나 여포도 아니고 관우나 장비를 상대로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면서 자신들의 현재 순위를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안량은 자신들이 아직 한번도 붙어본 적이 없는 적에게까지 시작부터 숙이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길고 짧은 것을 대어 보는 것, 그것이 최근 떨어진 자신들의 명성과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그냥 도망치라는 말인가? 우리가 누구였는가? 하북의 최강자라고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장수들이네. 그런데 적장을 무조건 피하는 꼴사나운 짓을 하자는 것인가?”
안량의 설득에 문추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원소의 지시를 따르려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 역시 자존심이 없는 장수는 아니다. 그도 최근 낮아진 자신들의 위상에 속이 많이 상해 있었다.
문추의 마음이 살짝 요동치는 것 같으니 안량은 설득을 계속 이어나갔다.
“안심하게. 나도 호승심만 앞세워서 무작정 이의민에게 돌격해 들어갈 생각은 아닐세. 적당히 그와 싸워보다가 힘들 것 같으면 바로 뒤로 빠질 생각이야. 날 믿어보게. 결국 관우나 장비를 상대로도 우리는 무사했잖은가? 그리고 자네도 말했듯이 지금 상황 상 어렵지 않은가? 이의민도 문제인데 그를 받치고 있는 다른 장수들도 만만찮아 보여. 그럴 진데 다른 놈들은 무시하고 우리 둘이서 이의민 하나만 상대하고 있는 것도 좋은 그림은 아니잖은가?”
결국 문추도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안량의 말대로 여러 상황을 종합해 봐도 둘이서 한꺼번에 이의민을 상대하는 것보다 한 명이 이의민을 맡고 다른 한명이 나머지를 맡는 것이 옳아보였다.
“알겠네. 부디 조심하게. 상대는 일전에 우리가 사실상 패배했던 관우나 장비보다 더 강하다고 평가받는 이의민일세.”
“나도 잘 아는 사실이네. 이제 그만 얘기하고 슬슬 돌격하지.”
결국 이의민과 일대일로 싸울 수 있게 된 안량은 온몸에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내로서 최강자와 대결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흥분이 되는데, 만약 그 최강자를 꺾는다면 그간 받았던 오명과 수모를 모두 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다.
이의민군 역시 원소군을 향해 돌격했다. 특히 선두의 이의민은 당연하게도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이번에도 여태껏 그가 해왔던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군사들은 다 제쳐두고 선두로 나섰다.
“의민이! 또 그러는가?! 승상이 됐으면 이제 좀 자제하라고!”
곽봉이 뒤에서 볼멘소리를 해보았지만, 이의민은 돌아보며 씩 웃을 뿐이다.
“형님! 내가 승상이 된들 보사가 된들 나는 이의민일 뿐이요! 사람은 아니 바뀐다고 하지 않소?”
“하! 하긴 이 중원 땅에서 네게 티끌만한 상처라도 줄 수 있는 존재가 어디 있겠냐?”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 이의민과 곽봉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량의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뭐라?! 중원 땅에 이의민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있는 자가 없다고? 웃기지 마라! 내가 생채기.... 아니.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다.’
안량이 본격적으로 이의민에게 접근하려하자 문추의 마음이 급해졌다. 안량에게 일단 이의민을 맡겨보기로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어쨌든 상대는 현 중원 최강이라 평가받는 이의민 아닌가.
‘젠장! 안량이 이의민을 상대하기 전에 최대한 그의 힘을 빼놓는 방법이....’
잠깐 머리를 굴리던 문추는 궁병부대에 명을 내렸다.
“저기 선두에 오는 이의민을 노리고 화살을 쏴라! 혹시라도 화살로 이의민을 맞추는 자가 있다면 금 백 냥을 내리겠다!”
금 백 냥이라는 말에 궁병들은 눈이 뒤집어졌다. 그들은 일제히 이의민을 향해 활시위를 겨눴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화살을 쏘았다.
하늘 위를 수놓는 수많은 화살들. 이의민의 뒤를 따르던 위연은 대경실색했다. 보통 장수들은 날아오는 화살 서너 개 정도는 웬만하면 쉽게 막거나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화살들은 장수를 떠나서 인력으로 막아낼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승상! 위험합니다! 어서 뒤로....!”
위연이 다급하게 이의민을 불렀는데,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분명 위급한 상황으로 보였는데 옆의 장료나 황충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의민을 보고 있었다.
“장 장군님! 황 장군님! 이리 지켜만 보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승상께서 위험하시지 않습니까?”
이에 장료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위연을 안심시켰다.
“하하! 이 친구 아직 뭘 모르는구먼. 걱정 말게. 자네는 주군을 처음 보는 것이라 잘 모르겠지만, 주군께선 결코 이 정도에 위험하실 일은 없네.”
“하지만....!”
위연은 여전히 장료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하늘을 수놓은 화살을 인간의 몸으로 어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곧 장료나 황충의 여유로움이 어디서 나오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의민이 하늘을 향해 대부를 높이 치켜들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 무거운 대부를 저리 치켜든 것 자체가 힘들겠지만, 이의민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리고는 곧 대부를 풍차처럼 돌렸다. 거대한 대부가 맹렬히 회전했다. 그로 인해 이의민의 발 밑 땅은 이의민을 중심으로 먼지 돌풍이 일어났다.
곧이어 하늘 높이 떠올랐던 수많은 화살들이 이의민을 향해 맹렬히 내려 꽂혔다. 대부분의 화살들이 이의민을 향하지 못하고 그 근처에 떨어졌지만, 화살이 좀 많은가? 수십 개, 아니. 백여 개가 넘는 화살들은 정확히 이의민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화살들은 이의민의 몸에 가지 못했다. 이의민 앞을 막고 있는 회전하는 대부에 막혔다. 아니. 갈렸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이의민을 향한, 거의 백여 발의 화살이 순식간에 갈려서 박살이 났다.
그 화살들은 더 이상 화살이라고 볼 수 없는 형체가 되어 이의민 주변으로 튀었다. 이것이 바로 이의민이 수없이 많은 화살을 막는 법이다.
위연은 그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정말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눈으로 직접 봤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위연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장료와 황충은 익숙하다는 듯 움직였다.
“돌격하라! 적들은 화살을 많이 소모했다! 당분간 화살 공격이 없을 것이다!”
먼저 장료가 군사들에게 명을 내리며 이의민의 뒤를 따라 돌격했다.
그 다음으로는 황충의 차례다.
“궁병들은 모두 적진을 향해 화살을 쏴라!”
그러면서 동시에 황충 본인도 활을 들었다. 곧이어 또 수많은 화살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소군이 쏜 화살들과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원소군 궁병들은 오직 이의민 하나만을 노리고 화살을 쐈다. 그래서 화살들이 많기는 했지만, 그 범위가 매우 국지적이었다. 하지만 이의민군 궁병들은 특정한 누구를 노리고 쏜 것이 아니었다. 넓게 퍼져있는 원소군 전체를 향해 쐈다. 그런 만큼 훨씬 더 넓게 화살이 펼쳐졌다.
결정적으로 원소군은 수많은 화살을 소비했지만 아무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의민 하나를 노리고 쐈으나 아주 가볍게 다 막아냈다. 반면 이의민군 화살은 확실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크악!”
“막아라! 방패를 들어라!”
원소군 군사들이 재빨리 방패를 들었지만, 아무리 방패를 든다 해도 틈이 없을 수가 없다. 설사 방패로 막았다고 하더라도 운 나쁘게도 그 방패마저 뚫고 들어오는 화살이 종종 있었다. 특히 황충이 쏜 화살은 방패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의민군 궁병들의 화살 공격 한번에 무려 700여명에 달하는 원소군 군사들이 쓰러졌다. 원소군 전체 군사들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어쨌든 서로를 향해 첫 번째 공격에서 이의민군은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고, 원소군만 피해를 입었다.
기선제압에 성공한 이의민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장료의 명을 받고 돌격한 기병들과 보병들이 원소군과 맞닥뜨렸다.
궁병들 때와는 달리 기병, 보병 전투는 팽팽했다. 양 군사들은 서로 조금도 밀리지 않겠다는 듯 맞섰다.
군사들 간의 전투는 팽팽했지만, 문제는 장수들이었다. 이의민이 적토마를 타고 원소군 진영 안으로 들어갔다.
원소군 군사들은 이의민만 잡으면 승리한다는 것을 깨닫고 죽을힘을 다해 이의민을 노렸다.
“이의민이다! 저놈만 잡으면 이긴다!”
“크아악!”
하지만 죽을힘을 다한 대가는 정말 죽음뿐이었다. 모두 이의민의 대부 아래에서 공평하게 쓰러졌다.
이의민 뿐만이 아니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장료, 마초, 황충, 곽봉, 감녕, 위연이 원소군을 무자비하게 쓰러뜨렸다. 특히 위연은 방금 전의 어리바리 했던 모습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의욕적이다.
위연이 날뛰자 감녕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날뛰었다.
“이보시오! 위 장군! 방금 전에 촌스럽게 굴었던 것을 그새 잊으셨나? 이제 와서 멋있는 척 하기는...!”
의기양양한 감녕의 외침에 엉뚱한 쪽으로 불똥이 튄다.
“뭐? 이.보.시.오. 위.장.군...? 너 이 새끼야! 내가 만만해보이냐? 오늘 전투가 끝나고 보자.”
“헉! 아, 아닙니다. 곽 장군님. 소장은 위연 장군을 부른 것입니다.”
“새꺄! 너 말 똑바로 해! 계속 지켜보겠어.”
계속 지켜본다는 말에 기세등등했던 감녕이 쭈그러들었다. 그에 장료가 지나가면서 감녕을 위로했다.
“하하! 자네. 곽 장군께 잘못 걸렸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 곽 씨들이랑은 절대로 악연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 있지.”
“예? 그럼 이제 어쩝니까?”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나? 자네가 알아서 점수를 잘 따보라고.”
“예....”
그런 감녕을 위연이 비웃으며 지나갔다.
“촌스럽긴 네가 더 촌스러운 거 같은데?”
약간의 실랑이가 있긴 했지만 이의민군은 무난하게 유리한 전황을 이끌어 갔다. 아무래도 장수진의 차이가 컸다.
문추가 이의민을 제외한 장수들을 맡기로 했지만, 그로서도 역부족이었다. 특히 마초나 황충은 문추가 일대일로 붙어도 이기기 힘든 장수들이었다.
결정적으로 이의민이 가장 문제다. 이의민은 혼자서 거의 부대 급의 전투력을 보이고 있었다. 아직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때 이의민의 앞을 막는 한 장수가 있었으니, 바로 안량이다.
“승상! 난 하북의 안량이라고 하오!”
“호오! 네놈이 그 안량인가 하는 놈이냐? 제법 용기가 있군. 숨어 있어도 되는데.”
“승상! 승상이 대단한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날 모욕하진 마시오. 나 기주의 상장군 안량, 승상의 대부를 경험해보길 원하오.”
처음엔 안량을 무시하던 이의민의 태도가 호감으로 변했다.
이의민은 안량의 눈빛을 읽었다. 그는 정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이 자리에 섰다. 원소의 상장이라면 온갖 부귀영화가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그의 눈빛은 강한 자와 싸우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네놈도 무인이로군. 죽을 수도 있다. 아니. 십중팔구 죽을 것이다. 괜찮겠느냐?”
“전장에서 죽는 것이야말로 내 바람이오. 갑니다!”
곧 이의민과 안량의 일기토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