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이의민의 마음 (5)
왕윤은 조용히 자신의 죽음을 기다렸다.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오늘이 될 줄은 몰랐던 왕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이 결코 비굴해보이거나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그랬던 것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감은 채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 인생을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초선 그 아이에게만 미안할 뿐. 이의민. 지옥에서나마 네가 정말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는지 지켜 볼 것이다.’
콰쾅!!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눈을 감고 있는데 자신의 몸에 무슨 파편 같은 것이 튀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목이 떨어지는 느낌은 없었다.
‘무엇인가? 너무도 찰나의 순간이라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가....?’
슬며시 눈을 뜨는 왕윤. 놀랍게도 그의 몸은 아주 멀쩡했다. 대신 왕윤이 무릎 꿇고 있던 곳에서 두발자국 정도 떨어진 땅이 움푹 패여 있었다. 이의민의 대부는 왕윤 대신 그 땅을 박살냈다.
왕윤은 멍한 얼굴로 이의민을 바라봤다. 이의민이 설마 대부를 잘못 휘둘렀을 리는 없을 터, 왜 자신을 죽이지 않았는지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내 당장이라도 네놈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초선과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잘 들어라. 이 심보 고약한 늙은이야. 초선이 울면서 내게 몇 번이나 간청했다. 자신의 아비를 살려달라고 말이다. 딸 한번 잘 뒀군. 자신을 굶겨 죽이려고 한 비정한 양부를 아비라고 그리 챙기니 말이다.”
이의민의 말에 왕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크게 떴다. 초선이 착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자신을 생각할 줄은 몰랐다. 이의민의 말대로 정말 자신은 그녀를 죽이려 하지 않았던가.
“초선이가... 초선이 나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고...? 아비라 불리기도 부끄러운 나를....? 그리고 나를 아직도 아비라고 생각한다고...? 크흐흑! 미안하구나. 초선아.... 크흐흐흑!”
왕윤의 눈에서 후회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초선에 대한 얘기까지 들으니 왕윤은 자신이 했던 모든 일들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왕윤이 초선을 죽이려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소중하게 생각했던 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와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다.
그렇게 울고 있는 왕윤 앞에서 이의민은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 와서 후회가 되는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쏘아진 화살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지. 평생 후회하고 자책하면서 살라. 모두들 들으라! 오늘부로 태사 왕윤의 모든 지위와 권한을 박탈한다! 그리고 왕윤의 가솔들은 즉시 집을 떠나고, 이 집은 나라에서 압수할 것이다. 차후 왕윤은 변방 지역으로 보낼 것이니 수발을 드는 하인 둘만 그를 따르게 하겠다.”
이의민의 처분에 아무도 반박을 하는 이는 없었다. 결국 왕윤은 그 자리에서 압송되어 낙양을 떠났다. 낙양 성문을 나서는 왕윤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가 지난날을 얼마나 크게 후회하고 있는지 잘 드러났다.
**
군사들의 호위를 받고 승상부로 간 초선은 정욱을 만날 수 있었다. 초선은 정욱을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낙양을 지나다니면서 마주친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때 마다 초선은 정욱에게서 소름끼치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내들처럼 음흉한 시선을 보내서 소름끼치는 게 아니라 정말 사람 자체가 무서웠다.
그래서 초선은 정욱을 보자마자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 정욱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서 초선을 맞이했다.
“주모를 뵙습니다.”
정중히 숙이는 허리, 부드러운 말투에 초선은 지금까지 정욱에게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예의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이런 사람이었어....?’
“아! 예... 소녀. 하남윤 대인을 뵙습니다.”
이번 일로 정욱을 비롯한 이의민의 사람들은 초선을 이의민의 여인으로 인정했다. 즉, 그간 감시해야 할 대상에서 주군인 이의민처럼 떠받들어야 할 대상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러니 정욱의 태도도 완전히 달라지는 게 당연했다.
“이곳은 한나라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앞으로 주모님은 승상의 가택에 계실 것입니다. 승상께서 계신만큼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할 테지만, 혹시 몰라서 가택의 호위를 네 배 더 늘리고, 주모님의 각종 수발을 들 계집종들 또한 배치하였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모시겠습니다.”
평소 이의민은 사람 많은 게 걸리적거린다며 호위를 최소한으로 두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초선이 있을 테니 호위도 늘리고 집안의 모든 것을 바꿀 참이다.
초선은 그 무서웠던 정욱이 이리 바뀐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푸흡!”
“주모? 무엇이 웃기십니까?”
“아! 죄송해요. 이전에 뵀을 때랑 너무 다르신 분 같아서....”
“이제 계신 위치가 다르지 않습니까?”
정욱의 얘기를 듣고 보니 다소 무겁게 느껴졌다. 승상의 여인이라는 위치는 분명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그래도 각오는 했던 바다. 마음을 다잡는 초선.
‘그래. 이제 여기에 적응을 해야 해. 내가 중심을 잡고 승상의 안사람으로서 역할을 해야 해.’
이후 왕윤의 집에서 나온 이의민이 승상부로 들어왔다.
“초선. 괜찮은가?”
“네. 가가....”
이의민은 서둘러 초선을 소개하고 공표했다. 이미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이리 공식적으로 공표를 하는 것과 아직 하지 않은 것은 큰 차이다.
“이제부터 초선은 내 아내다. 당장 내일 혼례를 올릴 것이다.”
정욱이 묻는다.
“그럼 내일 출정은 어찌하시겠습니까? 혼례를 최대한 간단히 치른다고 하더라도 며칠은 미루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정욱의 질문에 이의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북 원정이 며칠 미뤄진다고 큰 변수가 생기는 건 아닐 터였다. 그러니까 정욱도 그리 제안을 한 것이고.
그때 초선이 입을 열었다.
“가가. 전 괜찮아요.”
“뭐?”
초선은 이전처럼 이의민에게 어리광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그래서 지금부터 승상의 내자라는 그 무거운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소녀와의 혼례 때문에, 소녀를 배려하기 위해 하북 원정을 미루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혼례를 아니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만약 가가가 소녀와의 혼례 때문에 하북 원정 일정에 변수가 생겨 혹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내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느냐? 나 이의민이야. 그깟 변수 따위는 상관없어.”
“가가께서는 상관없을지는 몰라도 가가를 따르는 수많은 군사들에게는 상관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 원래 일정대로 가세요. 소녀는 낙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요.”
이의민도 잘 알고 있다. 혼례와 같은 의식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빨리 하북으로 가서 전쟁을 끝낸 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낙양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알겠다. 네가 그리 말해준다면.... 대신 내가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는 정말 성대하게 혼례를 치르자꾸나.”
“네. 가가.”
이의민은 흐뭇하게 초선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혼례를 미루자는 것인지, 원래 일정대로 하북으로 가라는지, 진심이 느껴졌다.
이의민은 지금 바로 초선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의민은 모처럼 적토마를 타지 않고 초선과 함께 마차를 타고 왔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와 최대한 붙어 있기 위함이다.
“가가. 고마워요. 아버지 일 말이에요.”
“좋든 싫든 내 장인이나 마찬가지 아니더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바로 죽일 수는 없지. 그리고 왕윤, 그 늙은이가 정말 어떤 마음으로 그리 고집을 피웠는지 이해가 조금 되니까.... 대신에 초선, 너는 항상 내 곁에 있거라. 전쟁 같은 상황이야 어쩔 수 없다만, 오래 끌진 않을 것이다.”
“네. 그럴게요. 가가.”
초선은 정말 행복한 얼굴로 이의민의 품에 안겼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이의민과 초선.
그런데 뜻밖의 불청객이 집에서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왔는가? 의민이. 제수씨. 하하하!”
곽봉이 하인들을 시켜 이의민의 집을 이리저리 꾸미고 있었다. 최대한 신혼집처럼 보이게 한다나 뭐다나.
“세상에.... 위장군이 그리 할 짓이 없소?”
“흐흐! 내 사랑하는 아우가 드디어 내자를 맞이하는데 이 형이 가만있을 수 있나? 제수씨. 여기 이 부분은 어떻소? 마음에 좀 드시오?”
“호호호! 정말 예뻐요. 아주버님.”
“크흐흐! 아주버님이라.... 거 듣기 좋은 소리일세. 자자! 아우님. 들어오게. 거의 다 끝났어.”
“다 됐으면 그만 돌아가시오.”
“엥? 이리 집을 꾸며 준 일등공신을 이리 박대하는가? 일도 끝났으니 딱 한잔만 먹고 갈게.”
“아! 곽봉 형!”
이의민은 곽봉에게 짜증을 냈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웃음기는 지울 수가 없다.
**
이틀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웃기게도 하늘이 오늘 하북 출정을 원하지 않는 것인지 폭우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의민은 하북 원정 일정을 바꾸지 않았다.
초선과도 모두와도 이미 약속을 했던 시간이다. 이 일정을 바꾼다면 모든 것이 틀어진다.
“다녀오겠다.”
“가가! 잘 다녀오세요.”
초선의 배웅을 받은 이의민은 군사들을 이끌고 황하로 갔다. 황하 역시 폭우의 영향인지 거의 범람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의민과 군사들은 묵묵히 황하 강변에 정박해 있는 군선 위에 올라탔다.
확실히 범람하는 강 위에 떠 있는 군선에 10만에 달하는 대군들이 나눠 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묶여있는 줄이 끊어져서 군선들이 황하를 타고 떠내려가는 일들도 생겨났다. 황하를 건너기도 전에 하북 원정군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꼴이다.
군선들을 책임지고 있던 유반은 즉시 이의민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주군. 책임을 물으시면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그가 대비를 소홀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너무 예상하기 힘든 큰 폭우였다. 황하보다 몇 배나 더 큰 장강에서도 수없이 수군을 다루었던 유반이었지만, 단 한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이 정도 폭우는 나도 생전 처음 보는 것이니 예상하기 힘들었겠지. 지금은 군선을 어떻게 건너편 강가까지 몰고 갈 수 있을지나 생각을.... 응?”
말을 하던 이의민이 밖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그의 시야에는 한 군선이 들어왔다.
지금은 황하의 강물이 넘치는 중이라 모든 군선들이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고, 그 때문에 목표하는 강 건너편으로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 군선은 흔들림 없이 강 건너편을 향해 묵묵히 이동하고 있었다.
“저 군선은 무엇인가? 어찌 이 상황에서 저리 안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지?”
“알아보겠습니다.”
유반은 이의민이 탄 대장선을 이끌어 그 군선 옆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대장선임에도 쉽게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몇 번의 시도 끝에서야 이의민의 대장선은 겨우겨우 그 군선 근처로 갈 수 있었다.
그 군선은 갑자기 대장선이 접근해오자 속도를 늦추고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대장선과 그 군선은 완전히 접촉했다.
유반이 가서 군선의 책임자를 알아보려는데 이의민이 직접 움직였다.
“이 군선의 지휘관이 누구냐?”
“됐어. 내가 직접 물어보지.”
이의민이 그 군선에 옮겨 타자 이제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한 장수가 부복했다.
“소인. 둔기교위 감녕이라고 합니다. 이 배의 지휘를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