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이의민의 마음 (4)
이의민의 몸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살기가 흘러넘쳤다. 그 지독한 살기에 장료와 백여 명의 군사들까지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다. 여태껏 지내왔던 전쟁터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살기가 모두를 엄습했다.
그 강한 살기가 기절해있던 초선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는지, 그녀가 몸을 뒤틀며 일어났다.
“가가....?”
초선이 깨어나자 이의민이 내뿜던 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어났느냐? 곧 승상부로 보내줄 터이니 조금 쉬고 있거라.”
그렇게 초선을 안심시켜준 이의민이 움직이려하니,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의민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못내 불안한 모양이다.
“가가. 그냥 소녀와 같이 있어주시면 아니 될까요? 어디를 가시려고....?”
“왕윤에게 갈 것이다. 너의 양부.... 아니. 이제 양부라고 할 수도 없는 늙은이지. 너를 죽이려 했던 그 늙은이에게 가서 네 복수를 대신 해주마.”
이의민이 왕윤에게 가겠다고 하니 초선은 필사적으로 말렸다.
“가가! 제발 그러지 마세요.”
이 와중에도 왕윤을 걱정하는 초선을 보며 이의민은 혀를 찼다.
“하! 너는 그런 일을 당하고도 억울하지 않느냐? 아직도 왕윤을 아버지로 생각한단 말이냐? 세상에 어떤 아비가 딸자식을 굶겨 죽이려고 이리 가둔단 말이냐?”
이의민은 초선이 답답했다. 그가 봐도 너무 착해 빠졌다. 그래서 화도 이리 대신 내주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그래도 초선은 왕윤에게 잘못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울면서 이의민에게 숨겨왔던 진실 하나를 실토했다.
“실은 가가.... 아니. 승상. 소녀의 잘못이 맞습니다. 소녀가 처음 승상께 접근을 할 때부터 소녀는 더러운 계략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도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것이 나라와 황실을 위한 것이라 믿고 계십니다. 그러니 갑자기 변심한 소녀를 그리 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한 초선은 눈을 감았다. 이제 이의민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그대로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래. 내 과거 잘못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야. 그것이 마땅하다면 그리 되어야 하겠지....’
이렇게 시원하게 밝히고 나니 그동안 가슴 한구석이 막힌 듯 불편했던 기분이 뻥 뚫린 느낌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이의민의 처분을 기다리는 초선.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이의민의 대부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조심스레 이의민을 쳐다보았다. 이의민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승상.... 어찌....?”
“아니 그래도 네가 모든 것을 내게 밝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몰랐는데, 하필 오늘 같은 날 밝히다니.... 참으로 미련스럽구나.”
이의민이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얘기하자 초선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그런데 왜....?”
“내 뒤에 공달 같은 이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아느냐? 가만히 앉아서 천리 길을 내다보는 사람들이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없지만 봉효나 중덕 같은 인물들도 마찬가지지. 그뿐 만이겠느냐? 유엽과 종요, 미축 등도 각자의 자리에서 남들과 다른 특출 난 재주를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 인물들이 나를 돕고 있는데, 내가 왕윤의 그런 얄팍한 계략을 정녕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이미 진작 꿰뚫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네 의도 역시 어느 정도 파악했지. 네가 처음에는 수작을 부리려고 접근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네가 진심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도 내 수하들도 너를 가만히 놔둔 것이었다.”
초선은 이의민의 설명을 듣고 보니 자신이 참으로 무모한 짓거리를 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의민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애초에 자신을 강하게 내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기다려주었다는 얘기 아닌가.
“흐흑! 정말이지 승상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난날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할지, 이런 소녀를 받아주신 것을 감사해야 할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지 과거 따위가 아니다. 지금은 내게 다른 마음 같은 건 분명 없지 않느냐?”
“어찌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소녀의 마음속에는 승상을.... 아니. 가가를 사모하는 마음 밖에 없습니다. 가가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평생의 지아비로 모시고 싶습니다.”
“그거면 됐다.”
그렇게 모든 것을 용서해준다는 이의민이다. 초선은 그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해결할 부분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가가. 소녀를 이리 용서해주셨으니 소녀의 아버지도 용서해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그건 아니 된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얘기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소녀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설령 네 잘못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건 내게 잘못을 한 것이지 왕윤에게 잘못을 한 게 아니지 않느냐? 더러운 계략을 세우고, 그 계략을 따르지 않는다고 벌을 내리다니...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더군다나 자신의 딸이 아닌가? 진정 딸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네 마음을 짓밟는 짓은 하지 못했을 거다.”
이의민의 분노서린 얘기에 초선은 설득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만큼 이의민의 분노는 옳았고, 왕윤은 처벌 받아야 마땅했다.
그래도 초선은 왕윤을 아예 저버릴 수가 없었다. 평생을 아버지로 따르며 살아왔는데 어떻게 한순간에 버릴 수 있으랴. 다른 이들은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초선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다.
“가가. 소녀 간절히 청하옵니다. 제발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그 분을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나이도 많으신데, 한적한 곳에서 천수라도 누릴 수 있게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만약 오늘 아버지께서 죽으신다면... 소녀, 평생 죄책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하! 네가 왕윤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죄책감을 느낀단 말이냐?”
답답해진 이의민은 초선을 채근했지만, 그녀는 말없이 그의 옷소매만 만지작거렸다. 결국 이의민이 먼저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으휴! 알겠다. 알겠어. 왕윤의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 하여간 착해 빠져가지고서는.... 그래도 사건이 일어났고 아닌 밤중에 움직인 사람이 몇 명인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일단 승상부에 가 있거라. 정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가 너의 거처나 호위에 대한 대책을 세워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가가... 헤헤.”
이의민이 이리 얘기하자 초선은 배시시 웃었다. 결국 이의민은 초선의 저 표정을 보기 위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
한참 잠에 빠져 있어야 할 새벽시간. 하지만 왕윤의 집에는 누구하나 눈을 붙인 사람이 없었다. 그의 집 주변에는 무장한 군사들 수백여 명이 횃불을 들고, 집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틈이 없어보였다.
왕윤의 집에서는 식솔들이 불안한 눈으로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왕윤의 곁을 지키는 이도 몇 남지 않은 하인들밖에 없었다.
왕윤으로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대략 이틀 후면 하북으로 출정이었다. 그래서 초선에 대한 일을 이의민이 알아차릴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왕윤은 처음부터 찬찬히 짚어가면서 복기를 해보았지만,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디서부터 문제였는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왕윤은 생각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은 식솔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모두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윤이 책임져야 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챙기기는커녕 자신의 몸도 건사하지 못하게 됐다. 그래도 왕윤은 애써 의연한 목소리로 식솔들에게 얘기했다.
“모두 불안해하지 마라. 저들이 원하는 것은 내 목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어주면 그만이다. 너희들에게까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크흐흑! 대인....”
식솔들은 모두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흘렸다. 고집불통에 답답한 사람이긴 해도 왕윤은 그들에게 나쁜 주인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혼자 다 안고 가겠다는 말에 더 서글퍼졌다.
모두 슬퍼하는 가운데 남은 식솔들 중 가장 힘 좀 쓴다는 구취가 벌게진 얼굴로 나섰다.
“크흑! 다들 이대로 대인께서 저놈들에게 끌려가는 걸 보고만 있을 겁니까?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인을 지켜야 합니다!”
구취는 왕윤 앞에 부복한 후 부르짖었다.
“대인! 분명 우리 중에 이의민에게 정보를 흘린 배신자가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 저들이 미리 알고 이리 대인을 압박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배신자가 누구인지 반드시 밝혀내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합니다.”
구취는 왕윤을 열렬히 따르는 충복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왕윤을 따라 죽을 작정인데, 죽기 전에 배신자라도 색출해서 같이 데리고 가려는 심정이다.
“누구냐?! 이의민에게 고발한 배신자 놈이....?! 어서 이실직고해라!”
왕윤은 그런 구취를 만류하며 고개를 저었다. 일이 이리 된 마당에 배신자를 색출한다한들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만 두게나. 구 서방. 우리에게 다음이 있다면 모를까, 이미 모든 것이 끝났는데 지금 와서 간자를 잡아낸들 무엇 하겠나? 괜히 마지막까지 서로를 의심하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하게.”
그때 왕윤의 집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가장 먼저 대부를 맨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이의민이다.
왕윤은 숨지도 않고 바로 그 앞에 나아갔다.
“오셨소? 승상. 내 기다리고 있었다오.”
“내 귀에는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로 들리는군. 유언은 그게 끝인가?”
“내가 살아온 인생이 내 유언이거늘, 굳이 남겨둘 필요가 있겠소? 다만 초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오.”
왕윤이 뻔뻔하게 초선의 이름을 올리자 이의민은 겨우 식혔던 화가 다시 끓어오름을 느꼈다. 아까 망곡에서 내비쳤던 살기가 다시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대부로 왕윤의 몸통을 쪼갤 기세였다.
이에 죽기를 각오한 구취가 칼을 들어 이의민에게 달려들었다.
“이 역적 놈!!”
평소 같으면 패기가 대단하다면서 한번은 받아주었을 이의민도 이번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대로 대부를 휘둘러 구취의 머리를 박살냈다. 마지막까지 열렬히 왕윤을 따랐던 구취는 그렇게 허무하게 저세상으로 갔다.
왕윤은 피 묻은 대부에 스스로 목을 들이대며 이의민에게 말했다.
“승상. 구 서방을 끝으로 더 이상 피는 보지 맙시다. 여기 있는 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오. 모든 것은 다 내가 꾸민 짓이니 나 하나의 목이면 충분하지 않소?”
이의민은 왕윤의 말에 대한 대답으로 대부를 힘껏 들어올렸다. 왕윤은 거대한 대부를 보며 눈을 슬며시 감았다. 이제 곧 저 대부가 자신의 머리를 박살내리라.
“승상... 백성들을 대하는 마음이 지금과 변치 않으시길 바라겠소... 부디 성군이 되시오.”
이의민의 대부가 아래로 힘차게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