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이의민의 마음 (3)
순유는 생각하고 있던 바를 술술 얘기했다.
“총관의 얘기를 해석해보면 달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구하라는 말은 폐월을 구하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즉, 초선을 구하라는 뜻이죠.”
“초선을 구하라고? 그럼 초선이 어디 납치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대체 어디로....?”
“북망산이겠지요.”
“허어!”
이의민은 순유의 해석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풀이를 자세히 들어보니 구구절절 옳은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젠장! 그럼 대체 왕 태사는 왜 초선이 납치되었다고 하지 않고 열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했을까? 아무리 정적인 내게 치부를 감추고 싶다고 해도 그는 누구보다 초선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나? 내손이라도 빌리는 게 당연했을 터인데....”
“초선을 납치한 주체가 바로 왕 태사라면 어떻습니까?”
“뭐라고? 왕윤이....? 자신의 딸을....? 도대체 왜?”
순유는 일전에 정욱, 종요 등과 나누었던 얘기를 꺼냈다.
“주군. 저희는 그간 초선과 왕윤에 대해 철저히 조사를 했었습니다. 확실하게 결정이 나지 않아 아직 보고를 드리지는 않았지만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초선이 처음 주군께 접근을 했을 때는 분명 왕윤의 검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즉, 미인계로서 접근을 했던 것이지요.”
“그럴 리가.... 믿기지는 않겠지만 나도 여인이 처음은 아냐. 초선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어. 절대 다른 의도로 내게 접근했던 것이 아니라고.”
“예. 그건 그녀의 심경이 나중에는 그리 변한 것이지요. 하지만 처음에는 분명 왕윤의 지령을 받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점을 미루어보면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마 초선과 왕윤은 최근 주군께 접근하는 이 계략을 두고 의견 충돌이 있었을 겁니다. 왕윤은 여전히 주군께 미인계를 쓰려고 했고, 초선은 마음이 바뀌었으니까요. 결국 초선이 내린 결론은 주군을 선택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왕윤은 그녀를 북망산에 가두었고, 총관이 주군께 은밀히 알린 것입니다.”
순유는 마치 자신이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왕윤과 초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예측해냈다. 역시 이의민 휘하의 최고 두뇌다운 추리력이다.
“그 말이.... 진정 사실인가?”
“물론 이것은 전부 추측일 뿐입니다. 허나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언제 제 추측이 틀린 적이 있었습니까?”
이의민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순유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의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 나갈 채비를 했다. 이에 곽봉이 놀라 말렸다.
“의민이! 지금 나가서 어쩌려고?”
“어쩌긴 뭘 어쩝니까? 북망산에 가둬뒀을 거라는데 당장 가봐야겠소.”
딴 건 다 수하들의 손에 맡길 수 있지만, 초선을 찾는 것은 자신이 직접 해야만 할 것 같다.
“그 넓은 북망산을 다 뒤지려고 그러는가? 그러지 말고 기다려보게. 차라리 왕 태사에게 가서 초선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난 이후....”
“그 고집불통 늙은이에게 물으면 순순히 답해주겠소? 아마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대답하지 않을 것이오. 차라리 직접 북망산 한곳 한곳을 다 뒤지는 게 더 빠를 거요.”
“이틀 후에 하북으로 출정 나가는 것은 어쩌고?”
“이틀이라는 시간이 있잖소. 그리고 출정도 중요하지만 내게 그 못지않게 초선도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소. 출정식 전에 어떻게든 그녀를 찾을 테니 걱정 마시오.”
그렇게 밖으로 나가는 이의민. 결국 곽봉까지 따라 나섰다.
“알았다. 그럼 나도 가마.”
그 둘을 따라 순유도 헐레벌떡 뒤따라 나왔다. 그리고는 한가지 좋은 조언을 해주었다.
“북망산을 다 뒤질 필요는 없을 겁니다. 북망산은 신성한 곳이라 황실을 제외한 다른 이가 함부로 사유화 할 수 없는 땅입니다. 그래도 북망산 중 사유지로 허락된 곳이 몇몇 있는 데 그곳만 찾아보면 될 듯합니다. 저는 속히 승상부로 가서 북망산에서 사유지로 허락된 곳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주군과 곽 장군은 수색대를 구성하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알았다. 최대한 빨리 와라.”
순유가 승상부로 달려가고 이의민은 즉시 낙양에 비상 소집령을 내렸다. 초선을 찾기 위해 수색대를 모집한다고 하니, 군사들은 너도나도 자원했다.
그래도 아무나 다 뽑을 수는 없는 일이라 자원한 자들 중 가장 날래고 눈썰미가 좋은 자들을 백여 명 정도 골랐다.
그리고 그 백여 명 안에는 서황과 장료 같은 고위 장수들까지 모두 포함됐다. 여인 하나 찾는데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그 누구도 허투루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순유 역시 이런 일이 있을 걸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것인지, 조금의 지체도 없었다. 승상부에서 바로 북망산의 토지대장을 모두 확인하고 왕윤이 소유한 사유지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리고 왕윤에 대한 대비까지 놓치지 않았다.
“북문 도위는 듣게. 지금부터 왕 태사의 집을 포위한다. 거기서 개미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서는 아니 된다.”
이의민은 순유로부터 왕윤의 사유지 위치를 전달받고 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말을 타고 가기 힘든 지형이라 직접 걸어, 아니. 달려갔다. 예전에 흑산적이나 백파적을 잡기 위해 뛰어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분명 왕윤의 사유지로 특정을 했음에도 초선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왕윤의 사유지만으로도 제법 넓은 땅이기도 했고, 그곳의 지형이 워낙 험준하기도 했다.
결국 순유까지 직접 와서 살폈다.
“젠장! 공달. 이 곳이 맞는가? 초선을 숨길만한 건물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건물이 없다면 아마 자연지형을 이용한 구조물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봐라! 작은 틈이라도 놓치지 않고 샅샅이 뒤져라!”
그렇게 백여 명의 사람들이 북망산 한 곳을 끊임없이 수색하고 있다.
**
어두운 동굴 속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흑흑흑흑!!”
어딘지 모르게 소름 돋는 것 같은 이 소리는 한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였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초선이었다.
그녀는 망곡의 동굴 감옥에 벌써 이틀째 갇힌 상태로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벌어진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목은 타들어 갔고 배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윤은 그녀에게 일체의 물이나 음식을 주지 않고 동굴 속에 가둬 버렸다. 초선은 동굴 앞 철창에서 자신을 지키는 하인들 10명을 보며 애원했다.
“제, 제발 먹을 걸 다오.... 아니. 물 한 모금이라도....”
“태사님께서 아씨께 아무것도 드리지 말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저희 같은 소인들이 어찌 그 명을 거부하겠습니까요....”
하지만 하인들은 모두 그녀의 애원을 외면했다. 초선은 그걸 보며 깨달았다. 왕윤이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가 끔찍이도 사랑했던 양부 왕윤이 자신을 이리 가둔 것도 모자라 정말 굶겨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도저히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대체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일이.... 흑흑! 아버지...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요? 소녀는 죽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닙니다. 아버지와 승상, 두 분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 몹시도 슬픕니다....’
초선은 울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이대로 이의민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다시 밀려들었다.
‘정말 이대로 승상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걸까....? 승상께서는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날 찾으실까....? 관심도 없으신 건 아닐까?’
이의민이라면 초선이 없어진 것을 알고 귀찮은 존재가 사라졌다며 오히려 좋아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더 흘러나왔다. 최근 이의민과 사이가 제법 좋아졌다고는 해도 사실 초선의 일방적인 행동이었을 뿐이지 않은가.
초선은 암담한 상황으로 인해 점점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또 눈물을 흘리다 지쳐 잠이 들고, 다시 깨면 눈물을 흘리는 걸 반복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하면서도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았다. 한참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초선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의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죽기 직전에 환청을 듣는 것이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그 분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내 소원이 하늘에 닿은 것인가....’
하지만 그녀가 들은 목소리는 결코 환청이 아니었다.
“뭐, 뭐야?!”
망곡 앞을 지키던 하인들이 갑자기 크게 당황했다. 그들 앞으로 거대한 도끼를 든 남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누, 누구냐?! 이곳은 왕 태사의 사유지로서....!”
당황하며 소리치던 하인의 목이 단번에 달아났다.
“죽고 싶으면 내 앞을 막아봐라.”
나머지 하인들은 감히 그 앞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바짝 엎드렸다. 대부를 든 사내는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한곳만을 보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여기 있었군.”
비몽사몽 중이었던 초선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리고 눈앞에 대부를 든 사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보였다.
“스, 승상....?”
“드디어 찾았네.... 어이. 말도 없이 그렇게 사라지면 어떡하느냐?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좀 해야 될 거 아냐.”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투의 이의민이었다. 사람을 걱정하는 건지 책망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초선은 지금 이의민이 전혀 밉지 않았다.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음성은 무척 떨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떨림을 듣고 이의민이 얼마나 자신을 걱정했는지, 또 지금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지 충분히 느껴졌다.
이의민은 그대로 맨손으로 철창을 뜯어내버렸다. 이의민이 안으로 들어가니 초선은 몸을 움직일 힘이 전혀 없었지만, 젖 먹던 힘을 짜내 그에게 안겼다.
“가가...!”
이의민은 그런 그녀를 덥석 안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인지 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겼고, 그대로 기절했다.
“초선? 초선?”
놀란 이의민은 그녀를 흔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저 기절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안도하고는 그녀의 몸을 조심히 안고서 망곡 밖으로 나왔다.
이의민이 밖으로 나오니 백여 명의 수색대와 순유가 불러온 의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의민이 초선을 조심스레 내려놓자 의원들이 바로 그녀의 맥을 짚었다.
이의민은 다소 초조한 말투로 물었다.
“그녀는 괜찮은가? 별일이 없겠느냔 말이야.”
“기력이 많이 쇠하셨지만, 몸에 큰 이상은 없는 걸로 보입니다. 며칠 잘 요양하시면 기력도 금방 회복할 것입니다.”
“다행이군. 일단 초선을 승상부로 데려 가라.”
초선만 혼자 데려가라는 얘기에 따라온 장료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주군. 초선 낭자랑 같이 가시지 왜....? 헉!”
그러던 장료는 이의민에게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여태껏 그는 이의민 바로 옆을 머물며 그가 내뿜는 강한 살기를 한두 번 느껴본 게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의민이 내뿜는 살기는 여태껏 느꼈었던 그 어떤 기운보다 강하고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여포를 상대할 때보다 더한 살기였다.
“왕윤. 그 늙은이의 집으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