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이의민의 마음 (2)
이의민은 다음 날도 낙양의 대소사를 대충 둘러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을 보냈다. 원래라면 이것조차 별로 하기 싫었으나, 승상이라는 책임감으로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업무를 보았다.
저녁이 되기 전 이의민은 승상부를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오늘이야말로 초선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단지 하루만 보지 못했을 뿐인데도, 이의민은 그녀의 공백이 무척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오늘도 초선은 이의민의 집에 오지 않았다. 늘상 들려오던 청아한 목소리는 오간데 없는 고요한 안방이 이의민을 맞이할 뿐이었다. 크게 실망한 이의민.
“오늘도 초선이 오지 않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승상.... 소인이 연통을 넣어보겠습니다.”
그전까지는 그리 오지 못해 안달이었던 그녀가 이틀이나 연속으로 보이지 않으니 기분이 은근히 나빠지는 이의민이다.
‘젠장! 대체 왜 갑자기 아니 오는 것인가? 설마 꼴에 여인이라고 튕기기라도 하는 건가?’
이의민도 고려시절부터 수없이 많은 여자들을 만나보면서 그녀들이 일종의 튕기기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설사 미인계로 접근한 여인들이라고 해도 튕기기를 했다. 바로 남자를 더 쉽게 조련하기 위해. 하지만 이의민이 느끼기에는 초선은 그런 짓을 할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더 황당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니면 정말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이의민은 연통을 넣어보겠다는 총관을 막았다.
“아니다. 내가 직접 가지.”
결국 자신이 직접 초선을 찾아가보기로 한 이의민이다. 매일 초선만 먼저 이의민의 집을 찾았었는데, 이렇게라도 되갚으려는 의도도 있다.
“나 승상이다! 태사는 안에 계신가?”
왕윤의 집 앞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난리가 났다. 평생 찾아올 일이 없을 것 같던 승상 이의민이 직접 찾아왔으니 말이다.
문지기들은 허겁지겁 왕윤을 부르러 갔고, 얼마 후 왕윤이 직접 나왔다.
“승상? 승상께서 어인 일로 이 늙은이의 집에 다 오셨소?”
이의민은 초선이 어디 있느냐고 당장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왕윤은 그간 이의민의 앞길을 주구장창 막으려고 했던 정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의민은 왕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태사라는 직책과 자신보다 한참 더 먹은 나이를 제외하고서라도, 혹시 앞으로 관계가 어찌 될지 모르는 사람 앞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지나가다가 안부를 여쭐 겸 들렀소. 잘 지내셨소?”
왕윤은 이리 빨리 이의민이 자신을 찾은 것을 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 초선이의 미인계가 아주 제대로 통한 모양이로구나. 허나 이의민. 넌 결코 초선이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왕윤은 속마음을 숨기고 시치미를 떼며 웃는 낯으로 이의민을 대했다.
“승상의 배려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소이다. 허허.”
이의민은 어떻게든 초선에 관해 묻고 싶지만 그리 말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마음이 급한 상황에서는 더욱 말이다.
“그게.... 한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무엇이오? 언제든 물어보시오. 내 승상께 대답해드리지 못할 게 없소.”
결국 이의민은 어렵게 초선에 대해 말을 꺼냈다.
“흠! 흠! 혹시.... 초선 낭자가 안에 있소?”
“오! 승상께서 먼저 제 여식을 찾았다니.... 이거 참으로 영광이오.”
“아니오. 최근 초선 낭자가 제 집으로 몇 번 온 적이 있소. 그런데 어제 오늘 갑자기 발길을 뚝 끊지 뭐요? 그래서 혹시 낭자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이리 찾아온 거요.”
“제 여식 말입니까? 아! 그러고 보니 승상께 연통을 넣는 다는 걸 깜빡하고 말았소. 아이고! 늙으면 죽어야지.... 참으로 송구하오. 초선은 지금 열병에 걸려서 방안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오.”
초선이 병에 걸렸다는 얘기에 덜컥 놀란 이의민.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겠다는 듯한 모습이다.
“열병?! 얼마나 큰 병에 걸린 것이오?! 설마 죽을병이오?!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것이오? 아니 되겠소. 내 그녀의 상태를 직접 보아야겠소. 어서 그녀가 있는 방으로 안내해주시오.”
이의민이 이 정도로 서두르는 모습은 전쟁터에서도 거의 없었다. 그녀가 아프다는 말에 이의민은 그 정도로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왕윤은 그런 이의민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계책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정도로 크게 반응을 하다니.... 만약 전쟁 중에 초선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엄청나게 동요하겠군. 정말 원소와 공손찬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겠어.’
“허허허. 승상. 하북 전쟁이라는 대업을 앞두고 어찌 이러시오? 초선의 열병이 승상께 옮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런단 말이오?”
“그딴 것은 상관없소. 내 지금 당장 그녀를 봐야겠소.”
“이런다고 초선이가 좋아할 것 같소이까? 만약 열병이 승상께 옮는다면 초선이는 심한 자책감에 빠질 것이오. 그로 인해 전쟁을 망친다면 어쩌면 스스로 목숨까지 끊을 수도 있단 말이오. 그러니 승상께서는 보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대업을 생각해서.... 또 초선이를 생각해서 자제해주길 바라오.”
결국 이의민은 왕윤의 얘기에 그녀에게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딴 건 둘째치더라도 그녀가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동안 이의민이 봐왔던 초선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 아닌가.
‘그래.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나는 이 나라의 승상이야. 이전에는 나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다 했지만, 이제는 그러면 아니 된다.’
“알겠소. 그럼 안부를 전해주시오.”
“여부가 있겠소? 그런데 벌써 돌아가시는 거요?”
“사실 일이 있어서....”
일은 딱히 없지만 초선도 없는 이 집구석에 별 볼일은 없는 이의민이다.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왕윤이 붙잡았다.
“기왕 귀한 발걸음을 해주셨으니, 북망초차라고 딸아이가 즐겨먹는 차를 대령하겠소이다. 초선이도 보지 못하셨는데 그거라도 드시고 가시오.”
이의민이 듣기에도 솔깃한 얘기였다. 그녀를 직접 보지 못하는 대신 그녀의 채취라도 느껴보고 싶었던 이의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얼마 후 다과상이 나오고, 그녀가 즐겨 마신다는 북망초차가 나왔다. 은으로 된 작은 찻잔에 담긴, 살짝 붉은 빛을 띠는 차를 보고 있으니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렇게 그녀를 떠올리며 차를 한 모금 마시려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승상. 차 맛이 어떠십니까?”
“음?! 자네는....?”
초선이 이의민의 집에 올 때 그녀를 항상 수행하고 오던 이 집의 총관이었다.
원래 주인이 예쁘면 기르는 개도 예뻐지는 법이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쓸 사람이었지만, 이의민은 살짝 반가운 표정으로 아는 척을 해주었다.
“그간 잘 지냈나? 자네하고도 못 본지 이틀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승상.”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이의민은 다시 북망초차를 음미했다.
“음.... 향이 아주 좋군. 이 차가 북망초차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아가씨께서 평소 즐겨 드시는 차입니다.”
“그래. 이 찻잎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가?”
“북망산에 있는 달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이의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총관이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북망초차라고 했으니 북망산에서 구할 수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 뒤에 달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구할 수 있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얼핏 들으면 말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승상인 이의민이 왕윤의 집 총관과 농담 따먹기를 같이 할 위치는 아니지 않은가.
이의민은 인상을 굳히면서 총관에게 되물었다.
“자네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런 소리를 그냥 하지는 않았을 테고....”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습니다. 소인은 그럼 이만....”
총관은 자세한 설명 없이 그대로 나가버렸다.
이의민은 기분이 나빴지만 총관이 자신에게 저러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다.
‘평소 하는 행동으로 보면 이유 없이 저럴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남은 차를 단숨에 입에 털어 넣으며 일어선 이의민은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 승상부로 향했다.
“공달은 퇴청했나?”
“위장군의 댁에 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흠! 별일이군. 공달이 곽 형의 집에....?”
순유가 곽봉의 집에 갔다는 얘기에 이의민도 자연스럽게 곽봉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곽봉의 집으로 가니 순유와 곽봉이 이미 술상을 펴놓고 있었다.
“오! 주군? 어찌 오셨습니까?”
“왔냐? 의민이.”
“공달. 자네가 곽봉 형의 집에 다 오다니. 참 의외로군.”
“하하하! 요즘 낙양에 떠도는 얘기가 있습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위장군과 술 한잔 하는 게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입니다.”
“후훗! 자네가 만병통치약을 찾을 정도면 고생이 참으로 많다는 얘기로군. 어째 내게 시위하는 소리로 들리는데?”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군 밑에서 일하면서 애초에 각오를 한 바입니다.”
“끝까지 고생이 많다는 얘기에 부정은 하지 않는구먼. 흐흐.”
이의민과 순유가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의민은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초선에 대한 걱정이 남아 있었다.
그걸 예리하게 간파해낸 곽봉이 물었다.
“의민이. 무슨 고민 있는가? 표정이 별로 좋지 않네.”
곽봉의 질문에 이의민은 순순히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여기 있는 곽봉이나 순유나 숨길 게 없는 사람들이다.
“항상 보일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막상 보이지 않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오. 어느새 그녀가 내 마음 깊숙이 들어온 것 같소. 형님.”
“흐흐! 내가 보기엔 자네랑 초선 둘만 몰랐던 거 같네만. 그런데 그녀... 아니지. 이제 제수씬가? 제수씨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왕 태사의 집에 직접 찾아가니 열병에 걸렸다고 합디다.”
“요즘 시기에 열병이라니....”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순유와 곽봉. 그래도 큰 감흥은 없었다. 요즘처럼 안정된 시기에 그것도 태사의 여식이 열병 정도로 죽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뭐 곧 낫겠지. 너무 마음 쓰지 말게. 자네가 하북에서 돌아오면 또 뻔질나게 자네 집으로 들어올 거야.”
“흠흠! 마음 쓰긴 누가 썼다고... 아! 그런데 그 총관이란 놈이 내게 이상한 말을 남겼소. 사실 그걸 물어보려고 공달을 찾은 것이고....”
“총관? 그 늙수그레한 놈? 왜?”
“아니! 그녀가 좋아한다는 차가 북망초차인데, 어디서 구하냐고 물어보니 알 수 없는 말만 하지 뭐요. 북망산에 있긴 있는데, 뭐라더라....? 달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구한다던가....?”
“낄낄낄!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나보군. 아니면 의민이 자네가 제수씨를 빼앗아가서 싫어진 거 아닌가? 총관이라도 제수씨를 오래봤으니 마치 아비 같은 심정일게 아닌가.”
곽봉도 총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웃고 있는데, 이중에서 유독 한사람만 표정이 심각했다.
“이봐. 공달. 왜 그러고 있나?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순유는 심각한 표정으로 잠깐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 총관이란 자의 얘기가 뭔가 조금 묘해서 말입니다.”
“뭐가 묘하다는....?”
“총관이 한 얘기 중에 말입니다. 달이 비치지 않는다.... 그건 아무리 봐도 초선에 대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녀가 바로 폐월이 아닙니까?”
“아!!”
순유의 말을 들은 이의민은 순간 술이 확 깨는 기분을 느꼈다.
“계속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