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32화 (132/175)

132. 이의민의 마음 (1)

어두운 밤, 왕윤의 집에서 사람들 몇몇이 은밀히 주위를 둘러보며 나왔다. 그들은 한 명의 사람을 결박시키고 있었는데, 그 한 명이 바로 초선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초선을 망곡으로 데려가기 위함이다.

그들은 곧 마차에 초선을 태웠다. 그녀의 입에는 재갈까지 물려 있었으니, 그 누구도 그녀가 마차 안에 있는지 알기 힘들 터였다.

결국 초선을 태운 마차는 어두운 새벽시간을 이용해 조용히 나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차는 날이 막 밝아질 때쯤 되어서야 다시 왕윤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갈 때는 분명 사람 한명을 태우고 나갔던 마차가 돌아올 때는 비어있었다.

하인들을 인솔해온 총관은 죽을상이었다. 그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바로 왕윤의 침소로 갔다.

그런데 그가 왕윤의 침소로 가니, 왕윤 역시 밤새 자지도 않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방 안의 불은 환히 켜져 있었고, 왕윤 앞에는 안주 하나 없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태사님. 소인, 태사님의 명을 받들고 돌아왔습니다.”

“들어오게....”

밤새도록 술을 마신 것 같았지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몹시 정갈한 태도로 고고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확실히 왕윤다웠다. 그런데 그의 두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왕윤은 흐르는 눈물을 숨기기 위해 애써 총관을 마주보지 않았다. 그렇게 뒤돌아 앉은 상태로 물었다.

“초선이는 망곡에 잘 가두고 왔는가?”

“예....”

“그럼 자네들도 이만 들어가서 쉬게.”

총관은 왕윤의 얼굴을 직접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왕윤과 함께 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모르겠는가.

총관은 자신의 눈물을 숨기려하는 왕윤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가 결국 참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태사님!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아가씨는 태사께서 친딸 이상으로 생각하시던 수양딸이 아닙니까? 정말 아가씨를 망곡에 이대로 두실 겁니까?”

그간 왕윤이 어떠한 명을 내린다고 해도 군말 없이 따랐던 총관이다. 특히 이미 명을 수행하고 난 이후에 이런 식으로 항명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랬던 총관도 이번 명만큼은 고분고분 따를 수 없는 모양이다.

총관은 치도곤을 받을 각오까지 무릎 쓰면서 왕윤에게 얘기했다. 하지만 왕윤의 태도는 단호했다.

“자네가 괴롭다한들 나보다 괴롭겠는가? 이미 내린 결정일세.”

“태사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물과 음식까지 금지하신 건 너무 지나치신 처사입니다. 아가씨를 살려주십시오. 망곡에 가두고 평생을 살게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초선이가 살아있다면 이의민이 가만있겠는가? 모든 수를 써서라도 초선을 구출하려 할 것이네. 이번에 이의민이 하북 원정을 떠나기 때문에 그나마 망곡에서 조용히 죽을 수 있게 만든 것이지, 그마저도 아니었다면 내가 초선이의 가슴에 직접 칼을 박아야 했을 수도 있네.”

“태사님.... 대체 왜 그렇게 까지 하셔야 합니까?”

“우리 집안에서 역적의 배필이 나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좋은 말로 해서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내 손으로 없애버리는 수밖에....”

“하지만 태사님께서 아가씨와 얘기한 시간은 고작해야 1시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아가씨를 설득한다면....”

“그만! 난 그 아이를 잘 알고 있네. 피는 섞이지 않았을지언정 나와 닮은 구석이 많은 아이일세. 특히 그 고집만큼은 누구보다 날 닮았지. 그래서 잘 아네. 한번 고집을 피운다면 누구 하나 쓰러지기 전까지는 그 고집을 절대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야.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네. 쓰러지기 전에 고집을 꺾지 않을 거라면, 쓰러지게 만드는 수밖에....”

사실 왕윤이 총관에게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초선을 죽이기까지 하려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왕윤은 이의민이 하북에서 전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은밀히 그녀의 죽음을 알릴 셈이었다.

하북 전쟁에 나선 이의민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물론 초선의 죽음 때문에 이의민이 흔들릴지 아닐지는 미지수다. 설사 이의민이 흔들린다고 해도 원소나 공손찬이 그 기회를 잡아서 이의민을 잡을 수 있을지는 더더욱 미지수였다. 하지만 왕윤으로서는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래도 원소나 공손찬은 동탁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 아닌가... 분명 기회를 포착한다면 이의민도 쓰러뜨릴 수 있는 인물들이다.’

왕윤은 애써 그리 생각을 했지만, 막상 자신이 생각해도 실현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왕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그 정도밖에 없었다.

왕윤이 그리 생각하며 다시 술을 한잔 마실 때 총관이 다시 한번 그 앞에 엎드렸다.

“태사님! 제발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이의민이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태사님과 이 가문은 어찌 되겠습니까? 이의민의 분노를 어찌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딸아이를 죽이고 내가 살기를 바라겠는가? 물론 이의민이 이번 하북 원정에서 패한다면 그의 화를 피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승리한다면 이제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겠지. 그렇다면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총관은 그런 왕윤을 보고 답답함을 넘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걸 만고의 충절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앞뒤가 꽉 막혀서 자기 생각만 옳다고 느끼는 똥고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유야 어떻든 초선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지는 총관이다.

‘정말 노망이라도 드신 건가.... 에휴! 초선 아가씨만 불쌍하지....’

그럼에도 왕윤은 오히려 이게 초선을 위하는 일이라는 궤변까지 늘어놓고 있다.

“초선이가 이리 죽는 것은 그 아이에게도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대책 없이 역적 놈의 첩실도 아니고 정실이 되게 생겼지 않느냐? 살아생전에야 호의호식하며 살겠지만 죽어서는 모두가 그녀의 무덤에 침을 뱉을 것이다. 우리 왕씨 가문 역시 대대손손 지탄을 받겠지. 반대로 망곡에서 죽으면 초선이는 죽은 뒤에도 황실에 충절은 지킨 의인으로서 모두에게 숭배 받을 것 아니겠느냐?”

총관은 이제 왕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그것이 그리도 중요한 것입니까? 살아생전 괴로우면 죽고 난 이후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태사님께서도 이리 괴로워하시지 않습니까?”

총관의 간곡한 외침에 왕윤은 끝내 눈물을 숨기지 못했다. 왕윤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시냇물처럼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그의 뜻은 끝내 꺾이지 않았다.

“됐네! 더 이상 이에 대해 말하지 말게. 난 대의를 위해 확실히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절대 없네.”

결국 총관은 왕윤을 설득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확실히 왕윤의 고집은 절대 꺾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총관이 물러간 이후에도 왕윤은 계속해서 술잔을 비웠다. 평소에 웬만하면 절대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는 그도 오늘만큼은 취해서 다 잊어버리고 싶은 모양이다.

**

하북 원정이 드디어 낙양 전체에 공표가 됐다. 낙양의 모든 군사들은 그에 맞춰서 일정이 돌아갔다. 사실 서량 원정이 끝나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 또 발표된 원정이다.

군사들이 불만을 가질 법도 한데, 불만이 별로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일전에 초선이 엿들었던 병사들의 대화처럼 원정을 기다리며 차출을 바라는 이도 제법 많았다.

그건 바로 공과를 확실히 구분하여 상벌을 내리는 이의민의 치세 덕분이었다.

이의민의 군대에서는 말단 보사라고 하더라도 그냥 화살받이 역할만 맡는 것이 아니다. 그런 얘기가 팽배해져 있다.

그건 지난 여러 차례 전쟁에서 충분히 드러난 사실이다. 서량 원정 때만해도 보사로 출정을 하여 공을 제법 세운 후 장수가 되어 돌아온 이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장수 직 선발을 남발하는 것도 아니었다.

장수들 중에 불성실한 자가 있거나 큰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있다면 어김없이 병사 신분으로 강등이 됐다. 그리고 그 기준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고 투명했다.

물론 이의민이 집권하기 이전이라고 그렇게 신분상승을 한 예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러니 대부분의 평범한 이들은 신분상승이란 자신에게 벌어질 일이 없다고 여기며 의욕이 떨어져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의민 집권 이후부터는 그게 결코 꿈이 아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너도나도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그리고 설사 공을 세우지 못해 승진을 하지 못하더라도, 특히 다른 이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능력이 더 떨어져서 승진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원정에 자원을 하는 이가 많았다.

고생한 자는 그만큼 더 챙겨준다. 이것이 이의민이 지론이었다. 이의민 휘하에서는 봉급을 받아도 원정에 참여한 이들이 더 받았다.

뿐만 아니다. 배식의 수준 역시 낙양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원정에 참여한 자들이 더 좋다. 낙양에 있는 보사들의 경우 평소에 고기까지 배급받지는 못하지만 원정에 참여하면 심심하면 고기가 나온다. 이의민의 치세 이후 웬만하면 배곯는 일은 없다고 해도 그래도 평범한 민초들에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먹는 것 아닌가.

그러니 딱히 출세에 대한 욕구가 없다고 하더라도 너도나도 원정에 자원을 하는 군사들이다.

이의민은 그런 군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낙양을 떠나기 전 마지막 점검을 서둘렀다.

다른 일들은 몰라도 군사들을 살펴보는 일은 자신이 마지막에 꼭 참관을 했다.

“곽봉형. 훈련은 거의 마무리가 된 거요?”

“그렇지. 특히 요새 애들의 수준이 많이 올라갔다니까? 다들 훈련을 어찌나 열심히 받던지. 예전에는 적어도 도위 정도할 놈들이 보사인 정도야.”

“그렇소? 그럼 오늘은 훈련을 일찍 마치고 집에 돌려보내주는 것이 어떻겠소?”

“음... 출정 하루 전날 그러는 게 낫지 않을까?”

“괜히 하루 전날 그러면 마음만 더 심란해지니 말이오. 그리고 가족들과 고기라도 좀 먹을 수 있게 적당한 금일봉도 조금씩 지급하고....”

“좋아. 그리 하지.”

훈련장을 떠난 이의민은 다음으로 승상부에 갔다. 문사들 역시 군사들 못지않게 바빠 보였다.

“태상. 황하를 통해 보급을 보내면 되겠습니까?”

“수로보단 육로가 나을 것일세. 수로가 빠르고 간편하지만 적들도 그걸 알고 노릴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지. 조금 늦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것이 좋을 걸세. 보급일정과 물량은 태복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역시 이의민이 없더라도 잘 돌아가고 있다.

‘음.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내가 끼어들 일은 없겠군.’

이의민은 할 일 다 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갔다. 스스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요즘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인들의 인사를 건성건성 듣고 초선이 항상 있던 안채로 들어가는 이의민. 그런데 평소랑 달랐다. 평소라면 이의민이 안채에 도착하기도 전에 초선이 마중 나와야 할 터였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음.... 총관. 그 혹시 아니 왔나?”

“초선 아가씨 말입니까? 오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총관은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답했다.

“그래? 왜 오늘은....”

“연통을 넣어볼까요?”

“아니야.... 뭐 연통까지.... 하루쯤 바빠서 못 올 수도 있는 거지. 크흠!”

‘이상하군. 처음엔 어떻게든 내쫒으려고 했던 사람인데, 막상 보이지 않으니 밀려드는 이 허전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윽고 식사 상이 들어왔다. 초선이 있을 때보다 더 화려한 상차림이었지만, 이의민은 그 상이 너무 초라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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