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초선의 마음 (5)
이의민의 집에서 나오는 초선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루하루를 보낼수록 이의민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후훗! 역시 승상께서도 내 매력에 빠지신 것이지. 어쩌겠어. 역시 나를 좋아하지 않을 사내는 없다니까.”
초선은 스스로 뿌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동시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좋은 기분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길거리에서 순찰을 도는 보사들의 대화를 듣게 됐다.
그 직후 초선의 표정은 급격히 굳었다.
“사흘 후 하북으로 출정을 간다지?”
“낙양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출정인가?”
“그래도 자네는 그냥 낙양에 남겠다고 신청을 하면 남을 수 있지 않은가? 자네는 승상께서 차출하실 때 마다 원정군에 지원을 했잖은가? 그럼 아마 이번 차출은 확실히 면제받을 수 있을걸?”
“아니. 난 이번에도 하북 원정군으로 자원을 할 생각이네.”
“굳이 왜 그러는 거야?”
“승상께서 이번에도 직접 하북으로 가신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른 곳은 몰라도 승상께서 직접 가시는 곳은 무조건 따라갈 것이네.”
“하긴.... 승상께서 직접 가시면 승리는 무조건 떼 논 당상이라....”
초선은 보사들의 얘기를 듣고서야 이의민이 사흘 후 하북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장 매일 보는 이의민의 얼굴을 당분간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초선은 이 얘기가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뭐라고....? 승상께서 정말 사흘 뒤 하북으로 가신다고....? 이게 정녕 사실인가?’
초선의 표정이 어둡자 덩달아 총관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그는 요 며칠 초선의 기분이 좋아 보여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녀가 또 달라진 모습을 보이니 불안했다.
“저.... 아가씨....? 혹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저씨. 혹시 승상께서 하북으로 가신다는 소문이 정말인가요?”
그제야 총관은 초선이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깨달았다.
“아가씨... 그건 사실입니다. 이미 낙양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총관의 입으로 직접 사실을 듣자 초선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초선은 이의민이 당분간 하북으로 가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견디기 힘들었다.
초선은 이의민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의 매력에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면 커졌지 절대 줄어들지 않았다. 단순히 그가 여느 사내들과는 달리 그녀에게 시큰둥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의 애를 태우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가 이의민에게 반한 요인이 그것뿐이라면 곽봉도 좋아했을 테니.
그럼 이의민이 잘 생겨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다. 이의민의 외모는 사실 아무리 콩깍지를 쓰고 봐도 잘 생긴 편은 아니다. 남자답게 우락부락하게 생기긴 했지만 잘 생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 이의민이 승상이라는 위치에 있는 절대적인 권력자라서 그런 걸까? 물론 이의민이 현재 그런 위치긴 하지만 초선은 그것에 연연하는 여인은 아니었다. 비록 친딸은 아니지만 왕윤의 수양딸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었다. 그리고 이의민이 절대 권력을 잡기 전 수많은 권력자들이 그녀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녀가 거기에 연연하는 여인이었다면 진작 자신에게 추파를 던진 이들 중 하나에게 자신을 내주었을 터였다.
그녀가 점점 이의민에게 마음을 뺏긴 건 역시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자신감 때문이었다. 넘치기는 하지만 주변인들에게 절대 거만하게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는 자신감이다. 그에 초선은 자신도 모르게 이의민에게 자연스럽게 빠졌다.
‘승상을 붙잡을까? 하지만 내가 뭐라고.... 아직 그분의 마음속에 완전히 들어간 것도 아닌데.... 거기다가 난....’
초선은 이의민에게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밝힐까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바로 그녀가 이의민에게 접근한 애초의 목적이 불순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순수하다고 해도 그 시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이의민을 붙잡지도 못하고 그냥 보내자니 너무 우울한 기분이었다. 혹시라도 이의민이 전쟁 중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영영 못 보게 된다면 그녀로서는 절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초선은 결국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계속 이렇게 진실을 숨기고 그 분을 만날 수는 없어. 이제는 내가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해. 떠나시기 전에 승상께 말씀을 드리고 용서를 받는 거야. 하북에서 돌아오셨을 때 나는 그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어. 혹시 돌아오시지 못하시더라도, 그리 해야만 후회가 없을 것 같아.’
초선은 그간 왕윤과 이의민 사이에서 속으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 승부의 무게추가 이의민 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이의민이 갑자기 하북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녀 스스로도 몰랐던 그녀의 진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초선이 결국 왕윤 대신 이의민을 선택한 것은 사적인 감정이 컸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아버지께는 죄송스럽지만.... 대승적으로 봐도 승상께서 이 나라를 지탱해주셔야 해.’
아버지인 왕윤은 황실이 바로 서야 백성들이 행복하고 평안한 치세가 이루어진다고 얘기했었다. 그렇기에 나라를 좀 먹는 역적들과 간신배들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의민이 역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백성들이 어려워 진 건 아니다. 오히려 백성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살기 좋아졌다.
초선이 많은 날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나라의 백성들이 이토록 행복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이의민의 치세라면 한나라의 구태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행복할 것 같다. 자신의 양부 역시 그 구태에 해당되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그녀가 봐도 왕윤의 뜻대로 이의민이 실각하는 것보다 이의민이 이대로 승상의 자리를 차지한 채 조정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한나라를 위해서도 좋아보였다.
‘승상은 절대 나라를 좀 먹는 역적이 아니야.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야 해.’
결국 초선은 이의민을 만나러 가기 전 왕윤을 먼저 만나기로 했다.
“아버지. 소녀가 지금 아버지께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왕윤은 갑자기 초선이 자신을 찾았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녀를 맞이했다.
“오오! 그래.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냐?”
왕윤은 초선이 자신의 계획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매일 같이 이의민의 집에 들락날락 거리는 것도 오직 미인계를 위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초선이 지금 자신을 찾은 이유도 이의민에 대한 미인계가 얼마나 잘 되고 있는 것인지 보고를 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아버지. 오늘은 소녀가 아버지께 술을 한 잔 따라드리고 싶습니다.”
“응? 갑자기 술이라니? 허허! 아니 될 건 없지. 여봐라! 술상을 차리거라.”
초선이 갑자기 술을 대접한다고 하자 약간 의아한 왕윤. 미인계에 대한 보고를 왜 술을 마시면서 한단 말인가? 왕윤이 평소에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왕윤은 의아해하면서도 초선의 의도대로 순순히 술상을 차리게 했다.
왕윤은 초선의 의도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기분 좋게 술을 두어 잔 정도 마셨다. 그런데 초선이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굳게 마음을 먹고 왕윤 앞에 앉았지만, 막상 얘기를 하려니 입이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 초선아. 이 늙은 아비와 담소만 나누려고 네가 이러지는 않을 거고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왕윤의 질문에 초선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아버지. 너무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실은... 소녀, 승상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
술잔을 입에 갖다 대려는 왕윤의 손이 멈추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왕윤. 하지만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그래. 그럴 수도 있다. 너도 이미 과년이 지났고, 이의민은 역적이긴 하지만 여인이라면 호감을 가질 만한 사내대장부 중에 대장부지. 자연스러운 일이다. 네 마음이 괴롭겠지만, 어차피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다. 그 놈이 죽고 나면 달포도 지나기 전에 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우리의 계획만 생각해라.”
차분한 음성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딸아이의 뜻대로 결코 해줄 수 없는 아비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어쨌든 초선에게 말하는 내용은 날카롭고 단호했다. 절대 자신의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음을 그녀에게 확실히 전달하고 있었다.
왕윤은 그러면서 초선이 자신의 뜻을 거부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여태껏 단 한번도 왕윤의 뜻을 어겨본 적이 없는 초선이 아닌가.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른 초선이다. 그녀도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아닙니다. 아버지. 실로 두려운 마음이지만... 소녀는 아버지의 뜻을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 이는 소녀의 사감만이 담긴 게 아닙니다. 백성들의....”
“닥치거라!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왕윤이 생전 처음으로 초선에게 역정을 내며 술상까지 엎어버렸다. 왕윤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아니. 모를 수가 없다. 한나라 황실 입장에서 보면 역적인 이의민이지만, 만백성을 위해서는 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한 황실에 대한 충심이 깊은 왕윤으로서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반박하기 힘든 초선의 얘기에 화를 낼 수밖에 없다.
“아, 아버지....!”
늘 자신을 예뻐해 주던 왕윤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불 같이 화를 내고 있다. 처음 겪는 일에 초선은 당황했지만,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아버지. 진정 백성들의 얘기가 들리지 않으시나요? 지금 당장 저잣거리에 나가보세요.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시던 백성들의 표정을 직접 보세요. 역적이 없던 때와 지금과 비교를 해보시란 말이에요.”
“멍청한! 네가 지금 콩깍지가 단단히 씐 게야. 그것이 그의 본심이리라 생각하느냐? 나라를 찬탈하기 위해 백성들을 위하는 척 행동하는 것이다. 널 포함한 모두가 그 놈에게 속고 있단 말이다! 너 같은 아녀자가 뭘 안다고 그러는 것이냐? 그러니 제발 내 말을 따르거라.”
왕윤은 거의 사정하다시피 초선에게 얘기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초선도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소녀... 이번만큼은 아버지를 따를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이익! 그래도! 너의 목숨을 거둬주고 먹여주고 입혀준 나다. 정녕 이 아비를 버리고 그 놈에게 가겠다면 오늘부로 너와 나의 인연은 끝이 난 것이다. 넌 내 딸이 아니다.”
왕윤은 분에 겨워 독한 말을 내뱉었다. 그에 초선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아아....! 아버지께서 내게 저리 심한 말을.... 본심이 아닐 것이다. 너무 화가 나셔서 저런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왕윤의 말에 초선은 슬퍼할 기색도 없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총관! 초선을 망곡으로 데려 가라.”
헐레벌떡 뛰어온 총관이 대경하며 되물었다.
“태, 태사님.... 아가씨를 망곡으로 데려간다는 말씀이 진정이십니까....?”
총관은 오늘 처음으로 귀를 의심하며 명령을 확인했다. 망곡이 대체 어떤 곳인가? 망곡은 북망산 근처의 왕윤의 사유지다. 사유지라지만 재산 가치가 있는 집이라든지, 논밭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것이라곤 창살이 있는 작은 동굴뿐이었다. 대대로 왕씨 집안의 죄인들을 가두는 곳인데, 바로 그곳에 그리 아끼는 딸을 데려가라고 명하는 왕윤이다.
“몇 번 말하게 만드느냐? 초선을 망곡으로 데려가라고 일렀다!”
“아, 아버지....?!”
왕윤은 당황하며 되묻는 초선을 애써 무시하며 총관을 더 채근했다. 총관도 하염없이 왕윤과 초선을 쳐다보다가 결국 초선을 잡아끌었다. 참으로 아연실색한 명이었지만, 어쨌든 왕윤의 명이기에 듣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