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초선의 마음 (4)
초선은 이의민, 곽봉과 함께한 술자리 이후 부쩍 이의민의 집을 찾는 빈도가 잦아졌다. 웃긴 건 이의민도 더 이상 그녀의 방문을 막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아예 대놓고 안주인처럼 부엌과 안방을 차지해버렸다. 특히 이의민의 식사는 거의 그녀가 주도적으로 챙기고 있었다.
“승상! 소녀가 준비한 생선 요리에요. 이거 좀 드셔보세요.”
초선은 맛있게 구워진 생선구이를 조심조심 은젓가락으로 살을 발라 이의민의 입에 넣어주려고 했다.
“아! 됐어. 내가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 놔둬.”
“네. 그럼 밥 위에 올려드릴게요.”
이의민이 살짝 짜증을 내는데도 초선은 싫은 기색 하나 없다.
‘하! 거 참.... 내가 그리 싫은 티를 냈는데도....’
이의민은 그런 초선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초선이 밥숟가락 위에 올려놓은 가시가 발린 생선요리를 잘도 입에 넣었다. 이의민도 은근히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이의민을 위해 생선 가시를 바르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이의민 역시 고려시절에 수도 없이 미인계에 당해봤다. 그가 젊었을 적에는 여인이 자신에게 계략으로 접근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당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좀 들고 노회해진 이후부터는 여인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자신에게 접근을 하는 것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초선은 겉과 속이 다른 여인들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정말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초선의 모습에 이의민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맛이 어떠세요?”
“흠.... 나쁘지는 않군. 꽤나 먹을 만한 요리야. 그래도 역시 육고기가 나아. 고기는 역시 육고기를 따라오지 못하지.”
“그래도 생선이 육고기보다 몸에 더 좋잖아요. 그래도 승상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다음에는 돼지나 소 요리로 준비를 해볼게요.”
“그래. 나름 기대해보겠어.”
그렇게 이의민이 호사를 누리고 있을 무렵 심준이 갑자기 찾아왔다.
“승상! 급한 보고가 들어왔으니 속히 승상부로 와주십시오!”
이의민과 초선은 동시에 심준을 째려보았다. 모처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신들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뭐냐? 지금 나 밥 먹는 거 아니 보이냐?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감히 승상인 나를....”
“흐억! 스, 승상.... 송구합니다만, 지금 구경 분들과 휘하 장수 분들 모두가 모여 있습니다....”
이의민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래? 별 수 없군. 다녀오지.”
“다녀오십시오. 승상. 음식이 식지 않게 데워놓고 있겠습니다.”
초선은 마치 안주인이라도 되는 냥 대놓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이의민 살짝 골치가 아픈 느낌이었지만, 이것가지고 그녀와 실랑이할 여유는 없었다. 승상부로 구경을 비롯한 수하들이 다 모여 있다면 정말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다.
이의민이 승상부로 들어가자 기다리던 모두가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정말 심준의 말대로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곽가 등을 제외하면 다 모여 있었다. 그만큼 이곳에 모인 것도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역시 첫 번째 보고는 이 자리에서 이의민 다음이라고 할 수 있는 순유다.
“주군. 청주로 갔던 광록훈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청주 구원은 대성공이라고 합니다. 쳐들어온 하북의 군사들을 모두 물리쳤다고 합니다.”
“역시 봉효야. 기대 이상으로 잘해줬군. 그런데 만약 청주 수비 후 병력 피해가 크지 않으면 따로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아니 그래도 광록훈은 적들을 물리친 직후 바로 황하를 넘어 평원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지금쯤 이미 평원을 점령했을 것입니다.”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군. 확실히 호응을 해서 봉효가 하북에서 더 활개를 칠 수 있도록 도와야겠군.”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가용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낙양의 수비병들을 넉넉히 둔다고 쳐도 10만은 운용 가능합니다.”
“봉효가 8만을 가지고 있으니 총 18만의 군사들로 하북을 공략하는 셈이로군. 지도를 가져와라!”
이의민의 명에 따라 관리 몇몇이 제법 정교한 지도를 가져와서 탁자에 펼쳤다. 이의민은 그 지도에서 한군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눈을 빛냈다.
“이곳이 본초 놈이 있다는 업성인가?”
“그렇습니다. 물론 낙양에서 업성으로 가기까지는 크게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순유는 지도에서 두 곳을 가리켰다. 한곳은 하내고, 다른 한곳은 복양이었다.
“둘 다 낙양에서 그리 멀지는 않군. 그럼 공달이 보기에는 하내와 복양, 둘 중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나?”
“두 군데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복양의 경우 낙양이나 연주, 청주, 서주를 포함해 여러 지역에서 지원을 받기가 쉽습니다. 허나 복양 근처에 황하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강줄기들이 많습니다. 즉, 업까지 가려면 또 강을 여러 번 건너야 합니다. 물론 그 강들은 황하처럼 크지는 않기에 건너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지만 역시 육로로 가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내의 경우 장점과 단점이 그 반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강을 건널 필요는 없지만, 대신 다른 지역과의 연계는 훨씬 더 힘듭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라고?”
“장단점이 극명히 갈리지만 저는 복양을 권하고 싶습니다. 하내는 방금 말씀드린 단점 외에도 또 하나의 결정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내가 병주와 기주에 둘려 쌓여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적의 땅인 병주와 기주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큰 부담입니다.”
“흠! 그렇군. 그럼 결국 복양으로 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이의민이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찰나 전령이 들이닥쳤다.
“승상! 승상! 사례교위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만총은 하내로 파견 나간 후 항상 정기적으로 상황보고를 했다. 이번 서신 역시 정기보고의 일환이다.
이의민은 즉시 만총의 서신을 펴보았다. 공교롭게도 서신에는 병주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이거, 이거. 우연치고는 기가 막히는군.”
“사례교위가 뭐라 보고를 해왔습니까?”
이의민은 바로 순유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순유는 서신을 보면서 침음을 흘렸다.
“으음.... 아무래도 제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만총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 병주는 거의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 여파가 병주를 넘어 하내까지 미치고 있다고 하니 보통 일은 아니었다.
병주가 그리 된 이유는 역시 원소의 무리한 징병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징병만 하고 치안을 위한 최소한의 군사도 배치하지 않았으니 무법지대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생각을 바꿔야겠다고....? 만총의 보고 때문인가?”
“예. 주군. 복양이 아닌 하내로 가시지요. 본대는 기주에 있는 원소군과 싸우되 소수의 병력을 병주로 돌리면 그곳은 아주 쉽게 점령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병주는 빈 땅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병주를 차지한 후 양방향으로 기주를 공격하면 더욱 원소를 공략하기 쉬울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군. 그럼 사흘 후 출정할 것이다! 순유는 나를 따라 하북 원정대로 오고 장수로는 서황, 장료, 황충 등도 나를 따른다. 종요와 정욱, 미축은 낙양을 방비하면서 지금까지 얘기했던 안건들을 승계하여 처리하도록. 대장군과 원술, 그리고 노숙은 우리 사람이니까 필요하다면 그들과 상의하고.... 그리고 몇몇 감시해야 하는 대상들, 그들도 잘 지켜보고 보라고.”
일사천리로 하북 원정이 결정됐다. 또 다시 낙양을 비워야 했지만, 이의민은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낙양에만 있는 건 좀이 쑤셔서 더 싫다.
그래도 이의민에게 최근 낙양에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 생기긴 했다.
“회의 다 끝난 거지? 그럼 난 이만 먼저 가겠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평소 같으면 이리 모인 김에 술이나 한잔 먹으러 가자고 했을 이의민이 누구보다 먼저 승상부를 빠져나갔다. 그 뒤를 보는 이의민의 수하들.
그들은 이의민이 왜 저리 서두르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종요는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정욱에게 물었다.
“하남윤. 주군께서 저리 가시는 건 역시 최근 초선과 자주 만나시기 때문이지요?”
“그렇소. 처음에는 주군께서도 관심을 보이시지 않으셨지만, 요즘은 그녀에게 조금 관심이 생기신 듯하오.”
“허허. 주군께서 여인에게 관심이 생기신 것이 나쁘지는 않은 일이긴 한데....”
이의민의 수하들은 좋으면서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드디어 이의민이 관심을 보이는 여인이 생겼다는 것은 정말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진짜 떠도는 괴소문처럼 남색가가 아니라 여인을 좋아하는 정상적인 사내라는 말이니, 대를 이을 후세를 볼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왕윤의 딸이라는 부담이 있는 상대임에도 초선을 만나는 것을 거세게 반대하진 않았었다. 게다가 지금 보니 초선 정도 되는 미모의 여인이 아니면 이의민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 점은 이들의 오해지만 말이다.
하지만 막상 이의민과 초선이 서로 관심을 보이고, 점점 더 사이가 가까워져 가니 점점 걱정이 됐다. 그래서 순유나 정욱, 종요 등은 자신들의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그녀의 뒷조사를 했다.
“하남윤이 보기에는 초선이 어떤 것 같소?”
“저도 많은 인력을 이용하여 그녀를 감시해왔소만.... 아무래도 그녀가 주군을 대하는 감정은 진심인 것으로 같소이다.”
“그렇다면 왕윤도 같은 생각인 것 같소?”
“그럴 리가 있겠소? 왕윤에 대해서도 충분히 조사해 본바, 그는 필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소. 즉, 초선과 왕윤은 지금 같은 뜻이 아니라는 소리요.”
정욱의 대답에 종요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그답지 않은 얘기를 꺼냈다.
“그럼 이러면 어떻소? 왕윤만 몰래 제거해버리는 것이오. 그럼 주군이 초선과 맺어진다고 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아니오?”
하지만 정욱은 종요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 되오. 주군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진실인 만큼, 양부에 대한 각별함 또한 진심인 초선이오. 만약 왕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증좌가 없어도 무조건 우리가 했다고 생각할 거요. 그럼 그녀가 가만히 있겠소?”
그녀가 정말 이의민의 안주인이 된 후 보복이 두려운 건 아니다. 다만 이의민이 모처럼 연인을 만들었는데, 자신들의 공작 때문에 잘못된 인연이 되도록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순유가 정리하듯 얘기했다.
“결국 문제는 그것이군요. 초선도 언젠가는 주군과 왕윤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 할 테고, 그 결정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는 것....”
정욱도 그 문제 때문에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답했다.
“뭐 왕윤을 어떻게든 구워삶든,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아보든 해야겠지요. 일단 출정에 나서시는 분들은 하북 일에만 신경 써주시오. 여기 일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보겠소.”
그렇게 흩어지는 이의민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