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초선의 마음 (3)
두 사내가 조촐한 술상하나를 놓고 신나게 떠들고 있다. 둘은 어찌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 지, 술을 마시는 내내 웃음소리가 떠나가지 않았다.
“크하하하하! 의민이. 그 날 기억나나? 평소에는 얼굴 한번 본적도 없던, 십상시 놈들을...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어야 했던 그 재수 없는 놈들 내 손으로 잡았다고! 그 때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지. 평범한 외성보사였던 내가 위장군 이라니....”
“크흐흐! 그때 형님이 아주 큰일을 하셨소. 내가 수십의 적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 내 뒤를 지켜줬잖소. 그때는 내 실력도 전혀 모르고 있을 때가 아니요. 그 직후 내 생각했었지. 아! 이 형님은 내가 평생을 끌고 가야할 인연이다. 내가 이 나라 최고 권력을 잡는다면 같이 잡는 거고, 죽으면 같이 죽는 거다.”
“아! 그 죽는 건 좀 따로 하면 아니 되겠나? 크크크. 사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도 마음속으로는 수 백 번 넘게 고민을 했었어.”
“그건 내가 곽봉 형 입장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요. 자! 한잔 쭉 들이킵시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그 둘이 현재 한나라 조정을 좌지우지 하고 있는 승상 이의민과 위장군 곽봉이란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위장군 승진 기념이라는 명목으로 술자리를 가졌지만, 실상은 과거 추억을 떠올리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이의민과 곽봉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명이 더 있었는데, 그 자태가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바로 초선이다. 이의민이 술시중을 들지 말라고 했는데도 굳이 옆에서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아! 이런! 우리가 이런 아리따운 소저를 자리에 앉혀 놓고 우리끼리만 아는 얘기만 하고 있었구려. 참으로 미안하오.”
곽봉이 초선에게 사과하자,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정말 재미있어요. 소문으로만 들었던 두 분의 영웅담을 두 분의 입으로 직접 들을 수 있으니 오히려 소녀는 좋은 걸요.”
초선이 하는 얘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여태껏 초선은 이런 술시중이 처음은 아니다. 왕윤의 시중을 들거나, 그의 손님들이 오면 그녀도 동석했던 경험이 있었다. 왕윤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와 동석했던 술자리의 경험은 그녀 입장에서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왕윤이 아닌 다른 사내들은 술자리에서 그녀에게 음심의 눈빛을 보내곤 했다. 물론 왕윤이 눈앞에 있으니 대놓고는 아니더라도 은근히 눈빛을 던지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녀에게 눈치가 없었다면 괜찮았겠지만, 누구보다 사내의 눈빛을 잘 읽는 그녀였기에 그런 자리가 불쾌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의민과 곽봉에게서는 전혀 그런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곽봉은 정말 그녀를 친동생인 듯 대해주고 있고, 이의민은 이제 막 그녀에게 관심이 생긴듯했지만, 여자로 보는 눈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왕윤과의 술자리가 탐탁찮았던 이유는 그녀가 느끼기에 그 술자리가 아무런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걱정한다고 하는 얘기가 대부분이었는데 내용이 하나같이 지루하고 똑같은 이야기들뿐이었다.
반면 이의민과 곽봉이 하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저잣거리에서 들리던 둘의 영웅담을 생생하게 듣는 것도 좋았다. 게다가 그 둘이 직접 얘기한 것이니 저잣거리에서는 모르는, 혹은 잘못된 이야기까지 정확한 내용으로 들을 수 있으니 더욱더 그랬다.
그래서 여태껏 가져 왔었던 다른 술자리와는 지금의 자리가 매우 즐거운 초선이다.
신나게 떠들던 곽봉은 은근한 표정으로 잠시 술상에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술상 쪽을 슬쩍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의아한 이의민.
“뭐하는 거요?”
“이렇게 보니까 참 둘이 잘 어울린단 말이지. 이러다가 조만간 제수씨 하나 생기는 거 아니야?”
곽봉의 농에 초선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이의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렇게 좋으면 형님이 데리고 가서 살지 그러오? 형님이 항상 하는 얘기가 그거 아니요? 영웅은 삼처사첩이 기본이라고.”
“헉! 아우가 그런 얘기를 하니까 여기 초 소저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지지 않았는가? 소저. 안심하시오. 우리 마누라가 생긴 거답게 낙양 최고의 여걸이오. 아마 내가 새로운 여자를 들였다간....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아니 되겠다. 아우는 그냥 하지 마.”
“뭘 하지 말라는....”
“그냥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익살스러운 둘의 대화에 초선의 입가에 다시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 세 사람에게 즐거운 시간이 밤늦도록 이어졌다. 그래도 밤을 아예 새울 수는 없는지 이의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자! 마음 같아서는 날을 새고 싶지만, 지금은 전시나 다름없으니 여기서 파해야겠소. 형님도 이만 일어나시오.”
“덕분에 잘 마셨네. 의민.”
“그럼 소녀도 일어나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방에서 나서려했다. 그때 이의민이 초선의 등 뒤에 대고 얘기했다.
“어이! 집에는 어찌 가느냐? 오늘은 수행원들도 없는 거 같던데?”
“요즘 승상 덕분에 낙양의 치안이 아주 잘 되어 있지 않습니까? 밤늦게 아녀자가 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이 근처는 더더욱 그렇고요. 집까지 먼 거리도 아니니, 혼자서도 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어찌 여자 혼자 보낼 수 있나? 호위 군사 몇을 붙여줄 테니 그들과 같이 가라.”
“아니에요. 정말 괜찮습니다.”
초선이 만류하는데도 이의민은 기어코 호위를 붙여주었다. 여전히 무심해보였지만 문전박대나 다름없던 지난번과 비교하면 그래도 훨씬 달라진 태도였다. 초선도 그런 이의민의 변화를 느끼고 속으로 미소 짓고 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승상.”
“그러든지 말든지....”
무심코 툭 던지는 인사 같지 않은 인사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초선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
장강을 따라 거대한 선단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양주.
양주의 어느 항구에 도착한 선단은 그곳에서 정박하고는 배 안에 실린 물건들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급하지 않고 매우 느긋하게 말이다.
“천천히 움직여라! 급하게 물자를 내리지 않아도 된다.”
선원들을 지휘하는 자들은 총 네 명이었다. 그들 중 세 명은 원술의 휘하의 사람인 양홍과 뇌박, 진란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명은 한때 낙양의 병신 삼인방이라고 불렸던 정한이다.
정한은 그래도 그간 견마지로를 다한 공을 인정받았는지, 선단 인부들의 관리를 맡아 이 자리에 오게 됐다.
선원들이 배에서 제법 많은 물자들을 내리고 장강 강변에 그 물자들을 전시하듯 늘어놓았다.
얼마 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대부분 양주 백성들이었다. 양홍은 모여든 백성들을 향해 외쳤다.
“자! 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줄 것이니 줄을 서시오! 줄을 서지 않으면 구휼미는커녕 매를 맞고 쫒아낼 줄 알아!”
그들이 대량의 물자를 실은 선단을 몰고 이 양주까지 온 까닭은 역시 일전에 어전회의에서 나온 양주 백성들 구제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이의민이 자신의 수하들에게 전담시킬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원술이 강하게 요청을 했다. 사도로서 자신의 근거지 코앞에 위치한 곳의 구휼은 자신이 맡겠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의민은 원술에게 양주의 구휼을 맡기되 정한 정도만 보낸 것이었다.
원술의 장수인 뇌박은 정한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어이! 정한...”
“예! 장군님.”
“명부랑 하나하나 대조해 보면서 구휼미를 나누어 줘라. 그 누구라도 부정 수급하는 자가 있으면 아주 치도곤을 낼 테니... 알아들었느냐?”
“예! 알겠습니다. 확실히 확인하겠습니다.”
그렇게 정한과 인부들이 구휼미를 양주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있는데, 백성들과는 조금 다른 복장의 무리들이 이곳으로 다가왔다.
이곳의 호위 책임으로 있는 뇌박이 그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응?! 네놈들은....? 네놈들은 또 무슨 꿍꿍이로 이곳을 찾은 것이냐?!”
상대도 양홍과 뇌박 등에게 우호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여긴 우리 땅이다. 땅의 주인이 오겠다는데 네놈들이 무슨 권리로 막는 것이냐?!”
다가온 무리는 정보와 황개, 그리고 그와 함께 온 군사들, 즉, 손견의 군사들이었다. 한마디로 이곳에 있는 양홍, 뇌박, 진란 등과는 얼마 전까지 치고받고 싸우던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뇌박이 성질을 내려하자 양홍이 그를 말리며 유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역시 말싸움은 장수들보다 양홍 같은 모사들이 한수 위다.
“호오! 다들 살아는 계셨구려. 촌구석으로 도망치시고 그 이후로 소식이 잘 들리지 않으니 풍토병으로 객사라도 한 줄 알았잖소.”
이에 황개가 참지 못하고 무기를 꺼내려는데, 정보가 말렸다.
“이 새끼가....!”
“참으시게. 공복.”
양홍은 계속 빙글빙글 웃으면서 정보와 황개를 도발했다.
“굳이 참으실 필요 없소. 우리는 군사도 거의 없고 대부분 인부들뿐이오. 그대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지.”
양홍이 이리 상대를 도발하는 건 상대방이 절대 못 칠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물론 이의민의 군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황명을 받은 황제의 군대이기도 했다. 게다가 침략 목적이 아닌 구휼의 목적이다. 실제로 양홍의 말처럼 최소한의 호위 군사를 제외하고는 전부 인부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을 친다는 것은 세상의 도의를 다 저버리고 황실과 백성의 적이 된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정보나 황개 입장에서는 더 화가 나는 일이었다. 손만 뻗으면 죽일 수 있는 적이 눈앞에 있는데 전혀 손을 댈 수 없으니 말이다.
이때 손견군 사이에서 한 사내가 나왔다.
“이런.... 황 장군과 정 장군은 잠시 뒤로 물러 계시지요. 손님을 앞에 두고 너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백옥 같은 외모의 미남자였다. 양홍은 그를 단숨에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호오! 미주랑 아니시오. 옥 같은 얼굴이 더 좋아지셨구려.”
원술과 전쟁을 할 때만 해도 너무 어려서 중용을 받지 못했던 주유는 이제 손견 휘하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가 됐다. 단순히 손책의 오른팔이 아니라 손견의 오른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칭찬으로 듣겠소. 자!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거요?”
“글쎄요. 워낙 할 일이 많아서....”
양홍이 계속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놀리듯 대답하자 결국 황개가 분을 참지 못했다.
“구휼미를 주러 왔다면서! 그럼 쌀을 놓고 후딱후딱 꺼지면 되지 뭔 말이 많은가!”
“그럴 수는 없지요. 우리는 황제의 집행관이오. 황제폐하께선 우리들이 양주 백성들에게 ‘직접’ 쌀을 나눠주라고 명하셨소. 그런데 어찌 쌀만 두고 갈 수 있겠소?”
“이익! 그럼 대체 언제까지 있겠다는....?”
“왜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드시오? 아까도 말했다시피 워낙 양주에도 백성들이 많으니 정확한 시간은 장담 못하오. 우리도 구휼미를 나눠주는 것만으로 바빠서 정신이 없으니 다른 쪽엔 관심도 없소.”
양홍의 말이 사실일리 없다. 그들 4인이 겉으로 받은 명은 양주의 구휼이지만, 이의민에게 은밀히 따로 받은 명은 양주의 감시와 동태파악이었다.
노숙의 머리에서 나온 이 계획 덕분에 아주 대놓고 당당하게 적진을 시찰 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은 4인이었다.
손견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주유와 정보, 황개 등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고.
황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주유에게 외쳤다.
“군사! 그냥 저들을 죽입시다! 감히 우리 땅에서 저놈들이 저리 활개 치는 것을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소!”
그나마 여태껏 침착하던 정보까지 황개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도 공복의 말에 동의하오. 이리 참기만 하다가는 우리는 계속 적들에게 모든 걸 내어줄 수밖에 없소. 그냥 저들을 죽이고 저 쌀을 군량미로 씁시다. 어차피 큰 모험을 해야 이의민을 이길 수 있는 것 아니오? 민심 따위 나중에 회복 가능하오.”
황개와 정보는 주유의 답도 듣지 않고 무기를 꺼내려했다. 그때 주유의 호통이 이어졌다.
“두 장군은 당장 멈추시오! 주군께 정녕 누가 될 참이오?!”
주유가 두 장수를 쏘아 봤다. 나이도 자신보다 많고, 오랫동안 손견의 충복 노릇을 한 이들에게 말이다. 주유는 조금도 기세를 줄이지 않았고, 백전노장인 둘은 항변 한마디 못하고 조용히 무기를 집어넣었다. 주유가 최근 손견의 오른팔의 위치까지 어떻게 오를 수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저들을 죽이고 쌀을 훔친다. 그렇게 되면 승리했을 때가 문제가 아니오. 승리하는 과정에서 성난 민심은 거센 파도가 되어 우리를 덮칠 것이오. 두 분 장군은 명심하시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주유도 황개나 정보 못지않게 분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 지금은 그리 활개를 치겠지. 허나 두고 보아라. 내 반드시 너희들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
주유는 강하게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