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초선의 마음 (2)
집을 나온 초선은 어디론가 빠르게 걸어갔다. 그런데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그녀가 가는 방향은 이의민의 집이 아니었다.
“보자.... 분명히 이 근처라고 했는데.... 찾았다!”
이의민의 집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이 초선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가 온 이 집은 어디고, 왜 이곳으로 왔을까?
으리으리한 이 집의 주인은 적어도 낙양에서 힘 좀 꽤나 쓴다하는 고관의 집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런 집 답게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들 역시 상당히 많은 수가 있었다.
“뭐냐? 무슨 일로 이곳을.... 누, 누구십니까....?”
문지기가 초선의 앞을 막았다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황홀경에 빠진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사내들의 흔한 반응이다.
‘이게 정상인데....’
초선은 자신을 보는 흔한 반응을 확인하고는 문지기에게 물었다.
“여기가 후장군님의 집이죠?”
문지기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아, 아닌데.... 아니. 맞습... 맞습니다.”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 대답은 뭐죠?”
“그, 그것이....”
그녀의 미모에 단단히 빠져버린 것인지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지기들.
“여기가 후장군님의 집이라면 후장군님을 뵙게 해주세요. 아니라면 갈게요.”
그런데 정말 후장군의 집이 맞는 것인지, 문지기들은 쭈뼛거리면서도 주인을 부르려고 한다.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왕 태사의 여식인 초선이라고 해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장군, 아니. 후장군이었던 곽봉이 등장했다. 그도 초선의 모습을 보자마자 크게 감탄했다.
“과연 폐월이라고 할 만 하군. 한데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했소?”
곽봉이 자신을 찾은 이유를 물었지만, 초선은 웬일인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곽봉은 그런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알겠다는 듯 얘기했다.
“그대가 설마 날 보러왔을 리는 없을 테고... 결국 의민이 때문에 온 것 아니오?”
날카로운 곽봉의 질문에 초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후장군님. 승상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이 바로 후장군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장군님께 조언을 구하러 왔습니다.”
“아! 이제 난 후장군이 아니오. 얼마 전 위장군으로 승진을 했다오.”
“아! 그래서 문지기들이 그랬군요.... 감축 드립니다. 대인.”
“흐흐! 대인이라... 듣기 나쁘지 않은 말이로군. 그럼 들어오시오.”
곽봉은 순순히 초선을 안으로 들였다. 분명 곽봉도 왕윤이 뒤에서 초선을 조종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곽봉도 처음에는 초선의 얼굴만 보고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냥 만나지도 않고 돌려보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폐월이라는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는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그녀를 만나보니 살짝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리 봐도 그녀에게는 검은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흠... 아무리 봐도 연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초선의 연기가 대단하여 자신이 속아 넘어가는 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곽봉은 왠지 의심만 가지고 그녀를 끊어내기가 싫었다.
‘이런 참한 처자가 아우의 배필이 되어 준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
그래서 초선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준 곽봉이다. 물론 아직까지 완전히 그녀를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에게 여러 대화를 유도하면서 속마음을 알아보려고 한다.
곽봉은 일부러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초선은 어색한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어디에 있든, 무얼 하든, 심지어 꿈에서도 그 분의 얼굴이 나옵니다.”
바로 이의민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물을 줄 알았는데, 초선은 자신의 심정을 먼저 밝혔다. 그녀가 만약 계략으로서 이의민에게 접근을 한 거라면, 그에 대한 정보가 더 중요할 터인데 말이다.
곽봉은 초선의 진심을 살짝 느끼고는 피식 웃었다.
“훗! 뭐 별일이라고.... 그거 상사병 아니오?”
“소녀가 상사병이라고요? 하지만 그건 연모하는 이어야만 가능하지 않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그 분을 연모하기도 했습니다만... 소녀는 가끔 그 분이 밉기도 합니다.”
“정말 그리 생각하는 것이오?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네. 그건 미워하는 게 아니오. 소저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에 대한 투정일 뿐이지. 내가 경험자니까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나는 소저처럼 어디에서나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오.”
“아!!”
초선은 탄식을 내뱉었다. 곽봉의 말을 듣고 보니 그간 자신의 생각과 행동들이 이해가 갔다. 그동안 자신은 이의민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이의민에게 투정을 부렸을 뿐이었다.
“역시 소녀는 승상을 연모하고 있었던 것이군요...”
초선은 자신의 속마음을 곽봉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런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외간 남자에게 이런 얘기까지 하다니....’
사실 초선은 이런 얘기를 하려고 곽봉을 만난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런 부끄러운 속마음을 왕윤도 아니고 어찌 처음 보는 곽봉에게 할 수 있을까? 처음 곽봉을 만났을 때는 정말 이의민에 대한 정보나 좀 알아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초선은 막상 곽봉을 보자마자 너무 편하게 느껴졌다. 그녀에게는 친 오라버니가 없었지만 만약 있었다면 이런 느낌일까? 고위직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곽봉의 친화력이 초선에게도 발휘되고 있다. 그래서 별 생각도 없이 곽봉 앞에서 숨기려 했던 속마음을 술술 털어놓는 중이다.
“죄, 죄송해요. 괜한 얘기를....”
“아니오. 내 소저의 마음을 충분히 안 것 같아서 조금 안심이 되오.”
“예?”
여태껏 편하기만 했던 곽봉이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말을 했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초선도 움찔한다.
“내 사실 의민이와 왕 태사 간의 불편한 관계를 충분히 알고 있소. 그래서 소저가 의민에게 접근하는 것에 대해 의심도 들었소. 그래서 일부러 소저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오.”
“그것이....”
“물론 이번 대화를 통해 소저의 순수한 의도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소. 그래서 순순히 말해주는 것이오. 단! 만약 내가 지금 소저에게 속는 것이라면.... 소저가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불순한 의도로 의민에게 접근을 하는 것이라면....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왕윤과 소저와 관계된 모든 이들을 단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을 거요. 아시겠소?”
확실히 곽봉은 자신이 위장군 자리를 노름판에서 딴 게 아니라고 증명하는 듯 무서운 기세로 초선을 압박했다. 초선은 저도 모르게 곽봉에게 모든 것을 실토할 뻔했으나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아, 알겠습니다. 대인.”
곽봉은 약간 얼어붙은 초선에게 씩 웃으면서 긴장을 풀었다.
“그거면 됐소. 그럼 내가 직접 의민이와 소저가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겠소. 아니 그래도 내일 의민이 집에서 내 승진 기념으로 겸사겸사 조촐하게 술을 한 잔 하기로 했소. 그 때를 맞춰서 들어가 계시오. 의민이가 뭐라고 하면 내 핑계 대고 말이오.”
“감사합니다. 대인.”
“아! 그리고 의민을 대할 때는 너무 요조숙녀처럼 굴지 마시오. 이의민은 아주 사악한 놈이라서 만만하게 보이면 잡아먹으려고 하거든. 차라리 뻔뻔하게 그를 대하는 게 나을 거요. 나보다 더 그놈을 잘 아는 인물은 없으니 확실하오. 그럼 행운을 빌겠소.”
“예! 대인!”
초선은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다졌다.
다음 날 곽봉은 어제 초선에게 말한 대로 이의민의 집으로 갔다. 초선 역시 몰래 따라 들어갔다.
이의민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건 큰 문제가 없었다. 곽봉이 도와주고 있었고, 이의민의 집 하인들 역시 그녀에게 적극 협조하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초선은 이의민의 집에 들어간 후 정원을 거닐었다. 이의민이 곽봉과 술을 마시는 줄 알고 안심하며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의 눈앞에 이의민이 나타났다.
뜻밖의 조우에 놀란 초선.
“헉!”
이의민은 그런 그녀를 보고 기가 차다는 듯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어이! 여기가 무슨 너희 집 안방인줄 아냐? 이리 매일 기어들어오면 어쩌자는 거냐?”
순간 초선은 다시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사내들처럼 자신을 우러러 보는 건 바라지 않더라도 이건 너무 하찮게 대하지 않은가.
그녀는 곽봉이 해주었던 조언을 떠올리고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어머! 기어 들어오다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럼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고양이처럼 들어오면 기어들어온 거지 달리 말할 필요가 있나?”
“흥! 허락을 받지 않은 건 맞지만, 이런 상황을 만든 승상께도 책임이 있어요.”
이의민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첫날 밥 먹고 가란다고 진짜 먹고 갈 때만 해도 대찬 여자라 여기긴 했다. 그래도 그때 봤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거의 정신이 나간 여자 같이 보였다.
“이거 완전 돌아이 아냐? 내가 뭘 어쨌는데 내게 책임이 있다는 거냐? 내가 널 건드리기라도 했냐?”
한편으로는 이의민도 이 황당한 여자에게 흥미가 조금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초선은 이의민의 반응으로 보고 살짝 자신감이 생겼다. 그녀가 원한 여인으로서의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그의 관심을 끈 것 같긴 했다.
자신감이 생긴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치며 이의민에게 달라붙었다.
“소녀를 음탕한 여자로 만든 건 승상이시잖아요. 게다가 기억나지 않으세요? 승상을 처음 뵙던 그 날, 승상 댁에서 소녀가 머무른 시간이 두 시진이 넘었어요. 혼인도 하지 않은 처녀가 남정네 집에 그리 오래 머물렀는데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아니?! 이 여자가 생사람 잡네. 내가 너랑 본 시간은 일다경도 채 아니 되는데? 그리고 너는 밥 먹고 가라 했다고, 진짜로 먹고 가냐? 보통 그럴 땐... 에휴! 됐다. 그래. 내가 어찌 해줄까? 낙양에 공표라도 해줘? 나랑 초선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그런 건 필요 없어요. 대신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세요.”
“그 한 가지 부탁이 뭔데?”
“오늘 위장군과 술 한잔 하신다면서요? 위장군이 되신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다가.... 그 자리에 소녀도 참석시켜 주세요. 소녀에게 술시중을 들라고 하면 들어드릴게요. 참고로 위장군께 허락도 받았어요. 소녀를 아주 예뻐하시던데요?”
이에 초선이 지난 번 만났을 때와는 어찌 이리 다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끄응! 곽봉형을 먼저 만났구나. 아무튼 그 형은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거야? 그렇게 철이 없어서야. 쯧쯧!”
“그래서 부탁은 아니 들어주시나요? 설마 사내가, 그것도 승상씩이나 되신 분이 한입으로 두말을 하시지는 않겠죠?”
혀를 차는 이의민이었지만 결국 초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알겠다. 알겠어. 그럼 조용히 있어라. 술 시중 같은 건 필요 없으니 말이야.”
“네. 얌전히 있을게요.”
이의민의 허락이 떨어지자 배시시 웃는 그녀. 벌써부터 이리 날뛰는 그녀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살짝 기대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