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27화 (127/175)

127. 초선의 마음 (1)

유비는 그길로 업성으로 갔다. 예상대로 원소가 분노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유비에게 따졌다.

“현덕!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변명이라도 해보게. 나는 지난날의 잘못도 있고 하니 백규를 믿고 그에게 내 군사를 맡겼네. 그런데 어찌 이리도 허무하게 군사들을 날릴 수가 있단 말인가? 적의 교묘한 계략에 걸려서 패한 것이라면 나도 이리 화가 나지는 않았을 걸세. 아니면 적장 중 항우와 같은 자가 있어서 졌다고 해도 화가 나지 않았을 걸세.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야. 장수가 술에 취해서 대패를 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를 어찌 책임질 건가?”

원소도 이미 모든 보고를 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패배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원소는 이번 일이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청주로 보내 잃은 군사들이 아깝긴 하지만 대신 연합의 주도권을 가져올 기회였다.

패배의 결정적인 요인이 공손찬 쪽에 있기 때문이다. 청주군이 패퇴한 이유는 역시 술이 가장 1순위였다. 그리고 그런 술판을 주도했던 이가 유비 휘하의 장비라는 보고를 들었다. 그리고 총대장으로 갔던 공손월은 그걸 막을 위치임에도 방조했다.

원소는 이 패배의 탓을 공손찬과 유비에게 완전히 돌리기 위해 더욱더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유비는 얼마 전 당당했던 모습을 버리고 원소 앞에서 완전히 허리를 굽히고 사죄했다. 그가 생각해도 변명의 여지가 아예 없다.

“비도 낯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 자사께 어찌 변명을 하겠습니까?”

잔뜩 고개를 숙였던 유비는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허나 한 가지만 알아주십시오. 공손 자사나 저에게 책임을 묻는 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뒤로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청주에 있는 대규모 적 병력이 하북으로 넘어 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저들은 지금 청주를 막아낸 것만으로 절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곧 황하를 넘은 후 가장 가까운 평원을 공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그쪽에 서둘러 수비 병력을....”

하지만 지금 유비가 말하고 있는 평원에 대한 대비는 이미 늦었다.

“급보입니다!”

“무엇이냐?!”

“평원군이 청주에서 올라온 적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 규모는 8만이며 총대장으로는 곽가라고 합니다.”

“뭣이?! 그렇게 빨리....?”

전령의 보고에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적들이 반격을 해올 거라는 건 패퇴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이미 예상한 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특히 평원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 있던 유비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원소는 그런 유비에게 냉소를 지었다.

“이미 자네의 예측은 늦어도 한참 늦었군. 백규의 사람에게 총대장을 맡긴 것도 실패했고, 자네의 아우도 역시 실패했네. 자네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들이 실패로군.”

원소는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에 대한 책임을 유비에게 돌렸다. 상당히 억지스런 책임전가였지만 지금 유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결과가 이 모양이니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유비는 한숨을 쉬며 끝내 미뤄뒀던 얘기를 꺼냈다.

‘이 패만큼은 웬만하면 쓰지 않으려 했는데....’

“일전에 약속했던 군량과 병장기, 그리고 물자들은 받지 않겠습니다.”

유비의 과감한 결단에 원소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봉기의 실수를 무마시키고 동맹을 맺기 위해 자신이 먼저 제안을 했었지만, 원소는 날이 갈수록 그것들이 아까워졌었다. 그런데 그걸 받지 않겠다고 하니 속으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원소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한껏 누그러진 어투로 유비에게 말했다.

“현덕. 나도 자네의 마음을 알고 있다네. 자네도 어떻게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것저것 해본 것이겠지. 허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되는 법이 아니겠나. 그러니 자네와 백규가 이리 책임을 진다면 나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네.”

“그것으로 용서를 해주신다니 참으로 감읍할 따름입니다.”

“자!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다들 논의 하지. 이제 평원을 어찌하면 좋겠나? 지금 바로 군사들을 끌고 가서 수복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원소의 말에 심배가 반대했다.

“그건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력 군사들을 이끌고 평원을 수복하러 간다면 이곳 업성이 비게 되는 꼴입니다. 낙양에서는 그 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겁니다.”

“그럼 그들을 이대로 하북에서 활개를 치도록 놔두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그건 아닙니다. 등 뒤에 칼을 둘 수는 없는 법이지요. 적군이 8만이라고 하니 그와 비슷한 병력을 차출하여 평원으로 보내시지요.”

“8만 가지고 평원을 탈환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상대가 성을 끼고 수비를 할 경우 같은 수의 병력으로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병법의 기본 중에 기본 아닌가?”

“당연히 무리하게 공성을 한다면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허나 저들이 이곳까지 매우 급하게 왔다는 점을 이용한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승산은 확실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라.”

“저들은 틀림없이 아주 많은 보급을 챙기고 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적들을 평원성 안에 고립시키고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면, 보급이 떨어진 적은 알아서 자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허나 비슷한 병력이라면 수성을 하지 않고 그냥 싸우려 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적들이 그리해준다면 오히려 주군에게 더 좋은 일입니다. 적 총대장인 곽가는 매우 머리가 비상한 자라고 하지만 그를 받치는 맹장들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곽가가 아무리 뛰어나다고는 하나 소장이 충분히 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소장에게 뛰어난 맹장 몇몇 만 붙여주시면 동수의 병력으로는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심배의 얘기에 전풍이나 저수, 심지어 유비나 순욱까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심배의 의견이 최선인 것 같았다. 만약 평원을 탈환하려고 무리를 하면 업이 위험해 질 수가 있다. 그리고 상대가 곽가라도 심배라면 충분히 믿고 맡겨도 될 것 같다. 그만큼 심배가 얼마나 뛰어난 모사이자 지휘관인지 다들 알고 있다.

“그럼 심배, 자네에게 4만 군사를 주겠네. 나머지 4만은 백규가 당연히 협조를 하겠지? 아니 그런가? 현덕?”

“그렇습니다. 공손 자사께서도 두말없이 병력을 내어주실 겁니다.”

평원에 대한 논의가 끝나고 원소는 곧 두 번째 계략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왕윤에게 연락은 왔던가? 폐월을 이용한 미인계는 어찌 되어 가는가?”

이에 유비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유비가 내놓은 계략 중 지금까지 통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데, 초선을 이용한 미인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의민측에서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낙양 쪽의 계략도 지지부진하다는 얘기에 원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미인계도 통하지 않는다고.... 으음. 아무리 그래도 폐월 정도라면 유혹에 넘어가주는 것이 사내라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에 조조가 왜 그러는 지 알겠다는 입을 열었다.

“폐월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다라.... 전 알 것 같습니다.”

“맹덕? 뭔가 아는 것이 있는가? 정말 세간의 소문처럼 이의민이 남색가인가?”

“아닙니다. 폐월이 미인계를 쓰기 때문입니다. 즉, 이의민의 취향에 폐월이 맞지 않는 것이지요.”

“그럴 리가...? 낙양에 있는 사내치고 그녀에게 침 한 번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네. 그런데 어찌....?”

“꼭 그렇지는 않지요. 당장 저만해도 폐월에겐 큰 매력을 못 느꼈습니다.”

조조의 대답에 그제야 원소도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긴.... 맹덕. 자네는 특이하게 임자가 있는 여인을 좋아하니... 정말 이의민도 그런 취향인가....? 어찌 됐든 낙양의 상황을 계속 주시하게.”

**

이의민의 집에 갔었던 첫날의 굴욕이후 초선은 한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살았다. 첫날 오기로 밥까지 얻어먹고 나오긴 했지만, 막상 이의민의 집을 나서고 보니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기도 했고 비참하기도 했다.

그래서 더 이상 이의민이라면 생각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막상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머릿속이 온통 이의민에 대한 생각뿐이다.

정원에 있는 연못을 바라봐도, 맑은 하늘을 바라봐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이의민에 대한 생각이 그쳐지지 않았다.

심지어 초선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이의민의 얼굴로 보였다. 물고기나 나무, 심지어 정원석까지도.

초선은 이의민의 얼굴 같이 울퉁불퉁한 정원석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성질이 나는 걸 느꼈다. 결국 그녀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정원석을 발로 차버렸다.

“에잇! 아야야! 씨이....”

애먼 데 화풀이를 하려다가 괜히 본인 발만 아프게 됐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조금도 관심 없어 보이는 그가 너무 미운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미운 감정은 이따금 이의민을 떠올릴 때면 금세 싹 사라졌다. 오히려 이의민을 생각하니 절로 표정이 아련하게 변했다.

처음 이의민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는 그저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후 왕윤에게 미인계를 들었을 때는 자신과 기구한 인연으로 묶인 운명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무시를 당했을 때는 미운 감정이 샘솟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음흉하게 바라보지 않는, 여태까지 봐 온 남자들과는 다른 모습에 설렘도 느꼈다.

이 모든 이의민에 대한 감정들이 초선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민하던 초선은 정원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집에서만 고민해봤자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 않을 터였다.

결국 초선은 이의민을 다시 한번 더 본 후 좀 더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일단 그를 다시 만나봐야겠어.’

초선이 큰마음을 먹고 집을 나서려는데 하필이면 딱 그때 왕윤과 마주쳤다. 왕윤은 그녀의 옷차림을 보더니 다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승상에게 가려는 것이냐? 잘 생각했다. 난 또 네가 그만두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네가 유혹하면 넘어오지 않을 남자는 없을 거다. 힘 내거라. 아가.”

“아... 네... 그럼 소녀, 다녀오겠습니다.”

초선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애써 잊고 있으려고 했지만 왕윤의 계책은 언제나 그녀를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초선은 이내 힘차게 고개를 저으면서 집을 나섰다.

‘어차피 달라진 건 없어. 일단 그와 만남을 지속할 수 있어야 미인계를 쓰든, 아니면 그에 대한 내 마음을 알든 할 거 아니야.’

결론을 내린 초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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