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어딜 가나 술이 문제 (3)
“장 장군! 퇴각하셔야 합니다!”
‘빌어먹을! 누군 그러기 싫어서 이러고 있나?’
병사 한명이 소리쳤지만 장비는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시작부터 잘못된 일기토였다. 그냥 싸워도 허저, 전위와의 2대1은 이기기 힘들었었다. 그런데 술까지 취했으니 어찌 그들을 이기겠는가.
물론 땀을 흘리면서 점점 술이 깨는 듯했지만, 이미 피해가 누적된 상황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발을 빼기도 힘들었다. 혹시라도 장비가 둘을 따돌리려는 낌새가 보이면 허저와 전위는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장비 혼자만으로는 점점 중과부적이다. 그때 공손찬군 군사들이 허저와 전위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장 장군을 구하라!”
“장 장군님! 이쪽으로....!”
공손월의 명을 따른 공손찬군 군사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곽가군 사이로 뛰어들며 장비를 구하려했다.
그들은 일반 군사들도 아니다. 공손찬군에 얼마 남지 않은 정예 병력이었다. 그들과 장비의 목숨을 맞바꾸려는 중이다.
그래도 그들이 나서준 덕분에 장비는 허저와 전위를 따돌릴 수 있었다. 물론 허저나 전위, 특히 곽가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쫓아라! 절대 쉽게 도망치게 두지 마라!”
연합군은 이전처럼 후퇴하면서 함정을 팔 정신도 없다. 공손월은 연합군 군사들을 계속 미끼로 던져주면서 퇴각을 이어갔다. 결국 황하 근처까지 후퇴하고 나서야 겨우 청주군을 따돌릴 수 있게 된 연합군이다.
“병력피해는 얼마나 되는가?”
“지금 남은 군사들은 4만입니다. 추가로 합류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 수는 얼마 안 될 것으로 보입니다.”
부관의 보고에 공손월은 암울한 표정이다. 분명 기세 좋게 연승을 거두고 있었는데 단 한번의 패배로 절반이 넘는 군사를 잃었다.
문제는 이것으로 연합의 분열까지 시작되고 있었다. 원소군의 수원진이 쌍심지를 켜고 공손월에게 따졌다.
“총대장! 그대의 잘못된 판단으로 우리는 무려 3만이라는 군사를 잃었소! 어찌 책임을 질 거요?”
그에 공손월도 지지 않고 수원진에게 강하게 반박했다.
“그게 어찌 총대장인 나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소?”
“총대장이 가장 큰 권한을 가진 만큼 책임도 가장 크다는 것을 모르고 맡았소?”
이때 장비가 수원진에게 다가가더니 멱살을 잡고 으름장을 놓았다.
“지금 잘잘못을 따질 때냐? 죽고 싶다면 계속 그리 나불대거라.”
장비까지 나서자 그제야 조용해지는 수원진. 하지만 마음속에서 공손찬군에 대한 불만은 계속 커지고 있다.
‘빌어먹을 놈들! 이 수모는 언젠가 반드시 되갚으리라.’
**
“광록훈! 정말 대단하오! 하하!”
교모는 신이 난 표정으로 돌아오는 곽가에게 다가갔다. 교모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한때는 청주를 포기하는 것까지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던 적도 있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곽가의 원군이 등장하자마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물론 곽가가 데려온 병력이 무려 4만이나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연합군과 병력이 비슷해지긴 했다. 그것 때문에 쉽게 이길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기가 막힌 예측과 판단으로 원소, 공손찬 연합군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놀았다. 정공으로 붙었다면 장비까지 있는 연합군을 아마 절대 쉽게 이기지는 못했을 터였다.
‘주군의 오른쪽엔 공달이 있고, 왼쪽엔 봉효가 있다더니... 실로 대단하구나.’
교모는 곽가의 대단함에 대해 하루 종일 찬양할 기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곽가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한마디 툭 던졌다.
“아직 정리할 것이 남았소. 임치현 쪽에 적의 잔당이 있을 거요. 교 자사는 그들을 정리하시고 다시 북해성으로 돌아오면 되오. 아마 당분간은 하북의 침략은 없을 터이니 안심하고 있으시오.”
‘무슨 천리안이라도 익힌 듯 적들의 움직임이 훤히 보이나보군.’
“알겠습니다. 광록훈. 그럼 북해성 안에서 편히 쉬고 계십시오. 제가 잔당들을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이에 곽가는 고개를 저었다.
“난 북해성에 있지 않을 거요.”
“예? 그럼 다시 낙양으로 돌아가십니까?”
교모는 곽가가 떠난다는 말에 불안한 심정이었다. 곽가의 말로는 당분간 하북에서 쳐들어올 리가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하북과의 전쟁이 과연 이걸로 끝일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오. 나는 지금 황하를 건널 것이오.”
그런데 곽가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다. 낙양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인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황하를 건넌다니?
“아니? 어찌....?”
“원소와 공손찬의 생각은 주군의 군대가 낙양에서 섣불리 발을 빼지 못할 터이니, 그 틈을 타 청주와 서주를 차례로 점령하려는 것이었소. 한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었지. 우리가 그걸 막았으니 이제 그대로 되돌려줄 차례요.”
곽가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곽가의 군사들이 황하를 건너 원소의 땅인 평원을 친다. 그럼 원소나 공손찬 입장에서는 그들을 정리하려 모든 군사를 보내기가 애매해진다. 자칫 본거지인 업을 비웠다가는 이의민이 낙양에서 올라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의민이 있는 낙양을 먼저 칠 수도 없었다. 황하를 건너 먼저 공격하는 건 너무 큰 위험부담이기 때문이고, 어떻게든 낙양으로 간다고 쳐도 그 사이 황하를 건너온 곽가군이 차례대로 하북을 점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소와 공손찬은 자신들이 이의민에게 걸었던 계략을 그대로 되돌려 받는 셈이다.
물론 곽가의 계략이 온전히 실행되려면 한가지 조건이 있다. 지금 평원을 치는 곽가군의 병력이 원소와 공손찬에게 위협이 될 만큼 충분히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모도 이를 알고 곽가에게 물었다.
“허나 그리 하기에는 광록훈이 데리고 온 병력으로는 부족해보입니다.”
확실히 아무리 곽가라도 군사들을 데리고 하북으로 가서 활개를 치기에 4만이라는 숫자는 너무 적은 병력이었다.
“그 말이 맞소. 그래서 교 자사께서 군사들을 좀 빌려주시오. 아까 얘기했다시피 우리가 하북에서 시선을 끌면 원소나 공손찬은 청주 쪽으로는 전혀 신경도 쓰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안심하고 병력을 주셔도 되오.”
“예. 그럼 얼마나....?”
“2만의 군사들만 주시오. 그리고 서주와 연주에서 온 3만 원군 중에서도 2만을 징발하여 원정대에 포함시키겠소.”
그렇게 도합 8만의 군사를 끌고 황하를 넘겠다는 생각이다. 교모는 순순히 곽가의 요청을 받아주기로 했다. 교모 입장에서 갑자기 군사를 내놓아야 하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곽가가 얼마나 뛰어난 군사인지는 충분히 확인했잖은가. 게다가 곽가 덕분에 청주가 훨씬 안전해지는 셈이니 비협조적으로 나갈 이유가 없다.
“알겠습니다. 광록훈. 그럼 원정대에 포함될 군사들을 선별하겠습니다. 가능하면 경험이 많고 전투력이 뛰어난 자들로 선별할 것입니다.”
“그래 주면 고맙소. 단, 오늘 내로 해주시오.”
“예? 가능하긴 한데.... 설마 바로 떠나시려는 겁니까? 좀 쉬었다가 가시지....”
“아니오. 최대한 빨리 평원으로 가야 하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평원군을 손에 넣기가 배로 어려워지오. 우금 장군. 군사들이 준비되면 바로 출정할 준비를 해주시오.”
곽가의 명을 받은 우금은 썩 내키지 않은 표정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청주에 있던 병사들은 몰라도, 자신들은 낙양에서 쉼 없이 이 곳 까지 달려 왔고, 또 도착하자마자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그 후 또 휴식도 없이 곧바로 강을 건넌단다.
“곽 군사. 군사들의 불만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소. 내 방금 말하지 않았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고.”
곽가의 입장은 강경했다. 어쨌든 그가 이번 원군의 총지휘관이니 우금도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볼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좀 쉬는 가 했더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높으신 분들이야 말이라도 있지. 우리는 걸어서 강까지 건너야 하잖아...”
우금은 올게 왔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이미 곽가의 결정이 내려진 마당에 군사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걸 좌시할 수는 없었다.
불만을 터뜨리는 군사들 몇몇을 본보기로 혼내려는데 곽가가 갑자기 말렸다.
“우 장군. 내가 해결을 하겠소.”
곽가는 우금 대신 군사들에게 다가갔다.
자기들끼리 불만을 터뜨리던 군사들은 곽가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곽가는 그런 군사들을 보며 여기 없는 한 명이 심히 그리워진다.
‘흠. 이럴 때 그 개차반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곽가는 잠시 군사들을 바라 본 후 입을 열었다.
“그래. 너희들의 불만이 많을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러는 이유가 있음을 명심해주길 바란다. 내가 공에 미쳐서, 혹은 너희를 괴롭히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너희를 위함이다.”
곽가의 모습은 평소 같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군사들에게 윽박을 지르며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들은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소리쳤을 터였다. 그런데 조곤조곤 설명하는 곽가의 모습을 보며 다들 의아해했다.
“곽 군사께서 웬일이시지....”
“우, 우리들을 위해서라고....?”
곽가는 그런 군사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설명을 이었다.
“공손월이 방금 패퇴하여 하북으로 갔다. 놈은 계현, 혹은 업성으로 그 사실을 알리겠지. 원소와 공손찬은 지금까지 공손월을 믿고 낙양 쪽 외에는 하북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손월의 패퇴사실이 알려지면 어떡하겠나? 놈들은 우리에 대비해 경계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다들 생각해 보거라. 이미 방비가 되어 있는 성을 공략하려면 공성하는 쪽에서는 큰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고생을 좀 한다면 공손월의 패퇴사실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기 전일 것이다. 그러면 빈 거나 다름없는 성을 차지할 수 있다. 군사들이여. 그대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곽가의 쉬운 설명에 군사들도 그제야 더 옳은 것인지, 자신들에게 좋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군사들은 곽가가 가진 의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곽 군사님! 저희들은 바로 준비가 되었습니다.”
“예! 지금 바로 떠나면 됩니다.”
**
며칠 후, 계현은 난리가 났다.
“뭣이라? 지금 패퇴라 했느냐?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공손월 대장은 결국 황하를 넘어 하북까지 패퇴했습니다. 남은 군사들은 고작 4만 정도밖에 없습니다.”
전령으로부터 연합군의 패퇴 소식을 받은 유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당연히 청주 정도는 가볍게 점령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무려 10만의 병력을 보냈으니까. 게다가 장비까지 보냈다. 그의 계산으로는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이었는데, 단순히 패배를 떠나 아예 하북으로 되돌아왔다는 보고는 너무 충격적이다.
“대체 어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후 전령은 전투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거기서 패퇴에 장비가 얼마나 큰 지분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익덕이... 만취를 했다고....?”
“그렇습니다.”
쾅!
웬만한 일에는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유비가 진심어린 분노를 표출했다.
“단순히 목만 축인 게 아니라 만취라니! 전장에서 만취라니!!”
“형님. 진정하십시오. 정말 익덕이 그리 한 것인지 확실히 알아보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마침 곧 공손월의 패잔병들이 돌아올 테니 그때 확인하시지요.”
“알아 볼 것 없다! 미련한 놈. 내가 그리도 주의를 주었건만, 내 모든 계획을 망쳐버리는 구나. 당장 원소를 만나야겠다.”
유비가 원소를 만나려 하자 관우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후우! 지금쯤 그도 소식을 들었을 텐데, 그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총대장은 공손월이고 패배의 원흉은 장비다. 둘 다 공손찬의 사람들이었으니 원소가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어떻게든 달래봐야지. 그도 우리와 손을 끊을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원소를 찾지 않을 수 없는 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