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어딜 가나 술이 문제 (2)
둥둥둥둥!
땅을 진동시키는 북소리가 들렸다. 분명 크게 울리는 소리인데도 원소, 공손찬 연합군 군사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완전히 듣지 못한 건 아니다. 분명 무슨 소리를 듣긴 들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
“크으.... 취한다... 으응? 뭐지....? 이게 무슨 소리지?”
“음냐 음냐. 어이! 이게 무슨 소린지 몰라?”
“무슨 소린데?”
“내 강력한 오줌발이 땅을 적시는 소리 아냐! 크하핫!”
“크으... 미친놈. 네깟 놈이 무슨.... 이거 내 오줌발이 나가는 소리렷다.”
“응? 그런데 지금 저기서 시뻘건 게 치솟고 있는데....? 불인가....?”
“불은 무슨 불이야? 어떤 놈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토하고 있는 거겠지.”
“크흐흐!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술에 취한 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불길이 치솟는 것을 봐도 그게 불인지 모르고 있고, 적군이 코앞으로 다가와도 그게 적군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연합군 군사들. 바로 옆에 있던 동료의 목이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으음.... 그런데 자네. 왜 목이 없어...? 응?? 으허헉!!”
“사, 사람 살려! 적이다! 적의 기습이다!”
역시 생존본능은 술도 깨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이 술을 깼을 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자비를 베풀지 마라! 눈앞의 적들을 모조리 쓸어라!”
곽가의 예상은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연합군은 병사들이나 장수들이나 오늘만큼은 절대 침입은 없을 거라 믿고 안심하며 술을 마셨다.
물론 연합군의 모든 군사들이 다 술을 마신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군사를 통솔하는 장수들은 거의 다 술에 취해 있었고, 술을 마실 순번이 되지 못한 신참들이나 말짱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런 신참들이 갑작스런 기습에 제대로 대응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적군의 기습이다! 혀, 형님! 일어나쇼! 지금 적이 쳐들어왔단 말이오!”
“기습....? 귀이이습....?”
군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지휘관들이 속속 등장했지만, 태사자의 백발백중 궁술에 금방 쓰러졌다.
그래도 곽가군이 대장 막사에 도착하기 전에는 공손월을 비롯한 고위 장수들이 정신을 차리고 막사를 빠져 나왔다.
“어떻게... 어떻게 기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놈들이 수성전을 준비하던 게 아니란 말인가?”
모든 군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곽가군 군사들이 연합군 진채를 넘은 후에는 딱히 자신들의 존재감을 숨기지도 않았다. 거침없이 들어와서 연합군 군사들을 베고 막사에 불을 질렀다.
곳곳에서 연합군 군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아직까지도 술에서 깨어 나오지 못하거나 잠에 빠져 있는 군사들도 많았다.
공손월을 비롯한 연합군 고위 장수들은 어떻게든 군사들을 수습해보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공손월의 생각에 이 같은 위기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 밖에 없었다.
“익덕! 익덕은 어디 있나? 익덕을 불러라!”
황급히 장비를 찾는 공손월.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답답한 그가 장비의 막사로 직접 찾아갔다. 다행스럽게도 막사 안에는 장비가 있었다. 그런데 공손월은 장비와 막사 내부의 모습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
장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어제 얼마나 많은 술을 퍼마셨던 것인지 빈 술병도 아니고, 빈 술독이 십여 개가 넘게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골동품 가게라도 차린 줄 알겠다.
그 술을 거의 혼자서 다 마신 장비는 아직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 체 잠에 푹 빠져있다.
“이런....! 익덕을 깨워라.”
공손월의 명에도 병사들은 섣불리 장비를 깨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장비를 잘못 깨웠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어서 깨우라니까!”
공손월의 호통에 한 병사가 쭈뼛거리며 장비를 깨웠다.
“장 장군님. 일어나십시오. 적군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미동도 없는 장비. 몇 번이나 흔들어 깨운 끝에 장비는 그제야 눈을 떴다.
“크으음...! 무슨... 일이냐....? 이 자시기... 죽고 잡냐? 가미... 자는 날.... 깨워?”
“그, 그것이... 적들이 우리 진채로 쳐들어왔습니다!”
“적....? 저기 어디에....? 음냐...”
겨우 잠에서 깨긴 했지만 장비의 상태는 말도 아니다.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 발음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고, 걸을 때도 크게 비틀거렸다.
그래도 장비를 버리고 갈 수는 없기에 그를 데리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니 곽가군은 어느덧 이곳까지 도달해 있었다.
단순히 청주군의 기습이라고 생각했던 공손월이었는데, 지금 광경을 보고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뭐가 이리 많은가....? 청주군은 분명 이 정도 숫자가 아니었는데....”
옆에 있던 수원진이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젠장! 아무래도 낙양의 원군이 온 것 같소! 이제 어찌 하시겠소?”
수원진의 질문을 받은 공손월은 이를 악물었다. 장비만 제정신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할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똑바로 서지도 못하는데 어찌 그보고 싸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퇴각을.... 흐억!”
공손월이 퇴각을 결정하려던 순간 뒤에서 느껴지는 거친 숨소리와 술 냄새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비몽사몽 하던 장비가 어느새 눈을 부릅뜨고 있다.
“나는 멀쩡하다! 군사들은 날 따르라!”
공손월은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들었다. 이제 그가 발음은 제법 또렷했지만 걸음걸이는 여전히 비틀거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 공손월이 기댈 수 있는 인물은 장비밖에 없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와는 달리 장팔사모를 휘두르는 모습은 과연 술에 취한 사람이 맞는지 기세가 느껴졌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 비겁하게 기습을 하느냐?!”
장비는 사모를 휘두르며 기습해온 곽가군 군사들을 베었다. 확실히 그가 전면으로 나서자 전장의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장비의 용맹한 모습에 연합군 군사들도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공손월도 장비를 가리키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장 장군을 따르라!”
하지만 이건 장비가 있는 근처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곽가군의 칼날 아래 연합군이 일방적으로 쓰러지고 있다.
특히 우금이 지휘하고 있는 쪽은 그야말로 초토화다.
“장군! 서쪽의 병사들이 조금 비었습니다.”
“신경 쓸 것 없다. 어차피 적들도 서쪽에 많지 않으니 지금 병력으로 충분하다.”
“장군! 선두와 간격이 너무 벌어졌습니다. 선두에 대기 명령을 내릴까요?”
“아니다! 지금 적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더욱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대신 간격을 좁혀야 하니까 발걸음을 늦추되 멈추지는 말라고 전해라.”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서장군.”
“눈이 한 열 개 정도 달리신 것 같습니다.”
우금을 따라온 허저와 전위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금의 완벽한 통솔력은 일전의 자신들과 너무나 달랐다. 자신들은 그저 본신의 힘만 믿고 앞으로만 돌격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자신들은 신나게 무위를 뽐낼 수 있었지만, 군사들은 죽어나갔다.
장군이 되기 위해서 그저 넘치는 힘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던 허저와 전위는 우금을 보고 깨달았다. 군사를 이끄는 장수에게 중요한 건 본신의 무력보다는 전장을 살피고 군사들을 살필 줄 아는 능력이라는 걸 말이다.
‘이래서 우리가 샌님에게 풋내기 소리를 들었구나.’
‘그런 소리 들어도 할 말 없지.’
그 때 매의 눈으로 전장을 살피던 우금의 눈이 빛났다. 홀로 곽가군을 상대로 무쌍을 찍고 있는 장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말 엄청난 무위로군. 저자가 광록훈이 얘기했던 장비라는 자인가 보군.”
우금도 스스로 무예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장수다. 장비를 보고 호승심이 생겼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군사의 조언을 무시할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허 장군! 전 장군!”
우금의 부름에 마치 스승을 마주한 듯 공손하게 달려가는 허저와 전위. 얼마 전 세상 무서운 것 없이 건방을 떨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부르셨습니까?”
“저자가 바로 그 장비란 자인가?”
“맞습니다.”
“그럼 그대들이 장비를 맡아주게.”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허저와 전위는 드디어 자신들이 활약할 기회가 주어졌다며 신나게 장비 쪽으로 뛰쳐나갔다. 물론 이전처럼 주변 상황 완전히 무시한 채 뛰어나가지는 않고,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면서 말이다.
또 다시 장비와 허저, 전위의 2대1 일기토가 시작됐다.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장비.
이번에는 이전처럼 함정 따위를 파놓은 게 아니었다. 순수하게 허저와 전위를 감당하지 못하고 밀리는 장비다.
장비는 겉으로 멀쩡한 척했지만 만취였던 몸이 그렇게 빨리 정상으로 돌아올 리 없었다. 그러니 멀쩡한 상태에서도 쉽지 않은 허저, 전위와의 2대1 일기토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크윽! 장 장군! 돕겠소!”
보다 못한 전해가 장비를 돕기 위해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는 허저와 전위, 둘에게만 정신이 팔려 옆에 있던 우금을 보지 못했다.
“크억!!”
우금은 다른 곳을 보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전해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전해를 쓰러트린 우금은 잠시 장비와 허저, 전위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이 질 수가 없어 보이는군. 장비는 저 둘에게 안심하고 맡기면 되겠어. 그럼 나머지 군사들을 잡아야겠다.’
우금의 생각대로 장비와 허저, 전위의 대결은 한쪽으로 거의 기울고 있었다. 여태껏 단 한번도 상대에게 공격을 허용한 적이 없던 장비가 처음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직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그만큼 장비가 위태한 상황이라는 증거였다.
믿었던 장비마저 저 모양 저 꼴이니 연합군 군사들은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웃긴 점은 아직도 술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공손월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장비만 보고 있는데, 여기저기 비보가 날아왔다.
“국의 장군이 적장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서쪽 진채가 적들에게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수원진은 한숨을 내쉬며 공손월에게 제안했다.
“답이 없습니다. 퇴각하시지요. 장군.”
“후우! 그리 해야지요...”
공손월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공손월은 장비를 보며 분통이 터졌다. 간단히 목만 축이려고 했던 술자리는 장비가 분위기를 주도해 만취하는 상황까지 갔다. 총대장인 자신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듬직했던 장비가 한없이 미워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비를 포기할 순 없었다. 어찌됐든 연합군의 핵심적인 전력 아닌가.
결국 공손월은 장비를 구하려고 군사들을 미끼로 던져주었다.
“장 장군을 구하라!”
공손월의 명에 따라 연합군 군사들이 쓰러졌다. 특히 원소군 군사들은 지금 아예 공손월의 명을 들을 생각이 없다. 결국 공손찬군 군사들만 피해를 입고 있었다. 공손월은 피눈물이 흘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