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어딜 가나 술이 문제 (1)
청주 북해성 앞의 전투는 청주군의 승리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원소, 공손찬 연합군이 거기서 포기할 리는 없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전투를 더 시도했고, 허저와 전위로 재미를 본 청주군도 전투를 피하지 않았다. 허저와 전위가 장비만 막아준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주병을 앞세워 계속 연합군에게 승리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모는 이내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게 되었다.
청주군과 연합군의 또 한번의 전투가 끝나고 허저와 전위는 축 처진 표정으로 교모에게 다가왔다.
“자사 어른. 면목 없습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가 아닌가. 두 장수는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말게. 다음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 되겠지.”
말을 그리 했지만 교모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혹시 허저나 전위가 크게 다치기라도 한 것일까?
허저와 전위는 피 칠갑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피는 전부 허저나 전위의 피가 아니다. 적인 연합군 군사들의 피였다.
그렇게만 보면 허저와 전위가 용맹하게 적들을 물리친 끝에 승리를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아니었다.
허저와 전위만 멀쩡할 뿐 그가 이끌었던 군사들은 상당수가 죽거나 다쳤다. 적어도 허저와 전위가 쓰러뜨린 적군보다 쓰러진 청주군이 훨씬 더 많았다.
둘이서 장비만 막으면 분명 이길 수 있는 전투였는데 어째 결과가 이리 나온 것일까?
장비와 허저, 전위가 맞붙은 두 번째 전투부터는 양상이 조금 달라졌다.
적장인 장비는 생긴 것만 봐도 계략이나 책략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제 자존심 때문에 되지도 않는 2대1 대결을 시도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장비는 곰 같은 외모와는 달리 여우같은 계략을 구사할 줄 아는 자다. 아니. 스스로 그런 계략을 생각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군사가 모략을 내면 그걸 그대로 수행할 줄은 알았다.
전투의 시작은 비슷했다. 장비는 허저, 전위를 도발하며 2대1로 일기토를 걸었다.
“어이! 이 가소로운 놈들! 이 몸이 이번에도 2대1로 기꺼이 싸워주마! 오너라!”
“흐흐! 전에 그리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느냐? 객기 부리지 말고 1대1로 다시 붙어보자.”
“네 친구 놈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놈이... 네놈이야말로 객기 부리지 말고 같이 들어오너라.”
“오냐! 네놈이 그리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그렇게 허저와 전위는 장비를 상대하기 위해 말을 몰고 돌진했다. 그렇게 장비와 허저, 전위의 2대1 일기토가 다시 시작되는 듯했다. 그런데 웬걸? 장비는 대략 이십여 합 정도만 주고받더니 이내 도망치는 것이 아닌가.
허저와 전위는 그런 장비를 보며 신나서 추격했다.
“이 입만 산 놈아! 방금 전 객기는 어디로 갔느냐?”
“2대1도 자신이 있다면서 지금은 어울리지도 않게 쥐새끼마냥 도망치느냐?”
겉으로 보기에는 이번에도 가볍게 청주군이 승리를 쟁취하는 듯했다. 연합군을 책임져야 할 장비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고 있고, 청주군의 주력이 된 허저와 전위의 기세는 오를 대로 올랐으니 말이다. 게다가 일기토의 승리로 청주군의 기세까지 덩달아 올랐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청주군이 쉽게 승리를 따낼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장비의 후퇴는 허저와 전위를 함정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뒤늦게 길태가 그걸 눈치 채고 허저와 전위를 향해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허저 장군! 전위 장군! 더 이상 들어가지 마시오! 함정이오! 서둘러 돌아오시오!”
허저와 전위의 귀에는 길태의 외침 따윈 들리지 않았다. 이미 너무 멀리 갔기도 했고, 장비를 잡기 직전이라는 생각에 흥분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다.
그들은 연합군이 파 놓은 함정에 걸리고 나서야 자신들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전군! 사격 개시!”
전해와 수원진이 매복군사를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허저와 전위가 목표지점에 오자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웬만한 화살은 눈감고도 쳐낼 수 있는 둘이지만, 수천발의 화살이 한꺼번에 날아오는 것은 그들로서도 막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허저와 전위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겨우 막아냈다. 그런데 함정은 그게 끝이 아니다.
화살 공격이 한차례 끝나고 사방에서 매복군사들이 튀어나와 허저와 전위를 포위했다. 허저와 전위는 자신들을 둘러싼 수백의 군사들을 도륙하고 또 도륙했다. 분명 엄청난 무위이긴 하지만 그들은 이의민이 아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파상공세에 금세 지쳐버리고 만 둘은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위기를 겨우 넘기고 있다.
결국 현재 청주군의 핵심 전력인 둘을 그냥 버릴 수 없었던 교모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어서 허저 장군과 전위 장군을 구출하라! 어떻게든 그를 데리고 돌아와야 한다!”
교모의 명에 청주군이 일제히 허저와 전위를 구하러 뛰어나갔다. 죽음을 불사하는 그들이었기에 적진의 포위망에 스스로 들어가는 셈인데도 망설임이 없다. 오로지 교모의 명에 따라 허저와 전위를 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아낌없이 바쳤다.
그만큼 청주군의 피해는 점점 커졌다.
그래도 그렇게 군사들을 희생시킨 보람은 있었다. 결국 허저와 전위는 무사히 청주군 진영으로 돌아왔다. 병력 피해는 연합군에 비해 거의 두 배나 더 많지만 말이다.
이후에도 세 번째, 네 번째 전투가 이어졌다. 결과는 두 번째 전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비는 계속 여우같은 움직임을 보이면서 청주군을 효과적으로 유인했고, 허저와 전위는 적들의 함정에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가면서 군사들을 위험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허저와 전위가 오직 앞만 보고 돌진할 줄만 알고, 전체적인 진형이나 전장의 특이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결과였다. 그나마 길태가 둘을 최대한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지만, 너무 일찍 들어간 탓에 듣지 못하거나 흥분으로 인해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잦았기에 별 소용이 없었다.
아직까지 엄청난 대패는 없었지만 연합군에 비해 청주군의 피해가 더 큰, 작은 패배가 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병력이 더 적은 청주군 입장이 매우 불리해지는 셈이다.
교모도 그것을 깨닫고 허저와 전위를 앞장세우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확실히 용맹과 무위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둘이다. 허나 경험이 너무 없고 군사들을 통솔하는 능력은 처참한 수준이다. 더 이상 이 둘을 선봉 장수로 세우는 것은 아니 될 일이다.’
“허 장군, 전 장군. 자네들은 당분간 전투에 나서지 말게.”
“자사 어른! 소장이 이번에 실수를 하긴 했지만, 다음번에는 반드시 만회하겠습니다. 자사 어른께서도 소장의 용력을 충분히 보셨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너무 억울합니다.”
허저나 전위나 자신들이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항변했다. 이때 길태가 분노어린 음성으로 둘에게 일갈했다.
“그대들은 양심이 있는 것이오?! 우리 군사들이 두 장군 때문에 입은 피해가 대체 얼마인지나 아시오?”
길태는 그간 허저와 전위에게 쌓인 감정이 어지간히 많은 듯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둘이서 길태의 말을 무시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물론 둘은 길태를 고의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길태의 분노에 허저와 전위는 그 앞에서 주눅 든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군사. 내 진짜 들리지 않아서 그랬소.”
“진짜 전장에서는 군사의 목소리가 아니 들립디다. 이참에 군사도 목청을 좀 더 높이는 훈련을 하는 게....”
커다란 덩치의 두 사내가 비쩍 마른 자신에게 쩔쩔매고 있다. 분을 이기지 못해 두 사람에게 소리를 쳤음에도 뒤늦게 스스로에게 놀란 길태. 하지만 허저와 전위의 반응에 황건적 시절의 자신감이 슬슬 되살아났다.
‘훗! 그래. 내 말 한마디면 이 무시무시하게 생긴 두 장수도 꼼짝을 못한단 말이지. 길태야. 그래도 출세했구나. 하긴 내 능력이라면 진즉 이랬어야 하지.’
“아니?! 그대들이 내 지시를 듣지 못하는 것이 내 잘못이란 말이오? 군을 이끌고 나간 장수로서 항상 군사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니오!”
길태가 점점 목청을 높였다. 사람들은 길태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길태는 사람들의 반응이 자신의 기세에 눌린 줄 알고 더 신나게 떠든다.
“아무튼 다음 전투부터는 무조건 내 뜻에 따라야 할 것이오! 잘 들으시오! 우리 청주군은 지금부터 수성을 해야 하오! 낙양에 있는 순유 군사나 곽가 군사였어도 나와 똑같은 얘기를.... 크억!!”
한창 목청 높여 얘기하고 있는 길태를 누군가 뒤에서 발로 차버렸다.
“가, 감히! 어느 놈이 이 길태님을...! 응?!”
길태는 뒤를 돌아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그의 상관이었다.
“새끼야! 뭘 꾸물대고 있어? 어서 일어나! 삼척동자도 알만한 당연한 사실을 뭘 그리 장황하게 늘어놓는 거냐? 그리고 누가 내 이름 팔라고 하디? 그 입을 확 꿰매 줄까?!”
“과, 곽가님 오셨습니까?”
길태를 찬 인물은 바로 곽가다.
교모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곽가를 반겼다.
“오오! 광록훈 아니시오?! 드디어 오셨구려.”
“그래도 늦지는 않았군. 반갑소. 교 자사.”
곽가 뒤로도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북해성 안으로 4만의 원군이 입성했다. 청주군이 위기에 빠진 지금 딱 적절한 등장이다.
“크하하! 길태야! 이게 얼마 만이냐?”
곽가의 등장으로 울상을 짓고 있는 길태를 향해 호탕하게 웃는 인물. 원군에 포함된 관해다.
“두목? 정말 두목이시오? 보자.... 맞네! 맞아! 그 못생긴 얼굴은 두목밖에 없지.”
“자식. 이제 두목이 아니라 진동장군이시다.”
여기저기서 반가운 재회가 이뤄졌다. 곽가는 한시가 급한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바꿨다.
“자! 자! 다들 한가롭게 인사나 나누고 있을 상황은 아니지 않소? 듣자하니 연합군에게 계속해서 패배를 당하고 있다고 들었소.”
교모는 곽가에게 패배의 원흉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곽가는 허저와 전위를 보며 평소대로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흠! 한마디로 용맹은 있으나 통솔 능력은 없는 풋내기들이군요.”
이에 허저와 전위는 발끈했다. 이미 여러 전투를 통해 그 능력을 인정한 길태라면 몰라도, 생전 처음 보는 샌님인 곽가가 자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뭣이라?! 풋내기? 이 샌님 같은 놈이....!”
허저와 전위가 기세를 내뿜으며 곽가를 압박했다. 그런데 곽가가 굽힐 인물인가?
“닥치지 못할까! 뭘 잘 했다고 큰 소리를 치는 게냐! 네놈들 때문에 죽은 군사들을 생각해봐라!”
“.....”
허저와 전위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곽가의 말이 구구절절 옳아서 반박할 말이 없기도 했고, 눈앞의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먹물쟁이의 기세가 어마어마하기도 했다.
“우금 장군. 앞으로 전장에선 이 둘과 항상 함께 다니시오. 장비란 자가 그리 사납다고 하니 전장에 그가 보이는 순간 이 두 덩치를 데리고 그와 싸우시오. 네놈들도 무조건 우 장군의 말에 복종해라.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아, 알겠소.”
결국 둘은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곽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교통정리를 끝낸 곽가는 바로 교모에게 말했다.
“자! 이제 출진 준비를 하시지요.”
“예? 그럼 수성을 하지 않고....?”
“저기 저 멍청한 놈도 생각한 것을 저들이 모르겠소? 적들은 그간 연패를 거듭한 우리가 수성을 하리라 생각할 겁니다. 우리 원군이 온 줄 모르는 지금 순간에는 더욱 더 그렇겠죠. 지금쯤 놈들은 느긋하게 마음 놓고 있을 것이고 우린 그 틈을 노릴 겁니다.”
파격적인 곽가의 결정에 모두 입을 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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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흐! 달빛이 밝기도 하구나. 이런 날은 안주도 필요 없지.”
“장 장군. 여기 한잔 더 받으시오.”
“나를 아직도 모르겠나? 잔은 필요 없다. 동이 채 들고 오너라.”
곽가의 예상대로 연합군은 승리에 한껏 도취되어 청주군의 반격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적들을 코앞에 두고도 술을 있는 대로 마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나저나 아쉽소. 장군. 허저와 전위라고 했던가요? 그 놈들 조금만 더 앞으로 왔으면 그냥 콱 뒤졌을 텐데 말이오.”
“흐흐. 어차피 오늘 죽나 내일 죽나 차이다. 아! 내일은 아니겠군. 내일은 숙취 때문에 조금 쉬어야겠으니 모레 죽이면 되겠어.”
“그렇지요. 어차피 저들은 성 안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우리만 이리 마시면 좀 그러니 군사들에게도 아낌없이 술을 풀어.”
“아니 그래도 술과 고기를 내려주었소.”
수원진의 말대로 지금 연합군의 군사들은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마음껏 먹고 마시고 있었다. 지금 적들이 눈앞에서 그들을 삼키기 위해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체.
신나게 먹고 마시던 그들은 축시쯤 되니 완전히 골아 떨어졌다. 아무도 깨어있는 이가 없다. 진채를 지키는 경비병마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