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폐월, 움직이다 (2)
넓게 펼쳐진 장원이 딸린 이의민의 집에서는 오늘도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포도 사라진 마당에 이제 이의민을 대적할 만한 적수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이의민의 수련은 멈출 줄 몰랐다.
승상이라는 위치에 올랐음에도 달라지 않았다. 단지 이전에는 장료나 서황, 고순, 태사자 등을 데리고 수련을 했다면 이번에는 그 상대가 마초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의민과 마초가 서로 목검을 들고 대치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의민의 얼굴에는 땀방울 하나 맺히지 않은 반면 마초는 비 맞은 생쥐 꼴로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쯧쯧! 맹기. 자네는 검을 휘두를 때 너무 힘과 속도로만 승부를 보려고 해. 좀 더 기교가 필요하다는 얘기야.”
“주군께서 말씀하시는 기교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마초가 기교를 잘 모르는 건 당연했다. 무예에 있어서 기교라는 건 결국 상대방보다 힘과 속도에서 밀리거나 우위를 점하지 못하므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마초는 여태껏 힘과 속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던 상대가 없었다. 이의민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래서 기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다가 이제 처음으로 그것이 필요한 상대를 만났으니 생소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걸 단기간에 배우기는 힘들 거야. 이건 오랜 경험과 감이 쌓여야 늘 수 있는 것이지. 물론 애초에 재능이 없다면 아무리 경험을 쌓아도 늘지 않을 수도 있고. 아무튼 자네는 재능이 남다르니 조금만 더 배운다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그전까지는 직접 몸으로 느끼며 배워야겠지.”
그러면서 이의민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직접 몸으로 느끼며 배우라는 말은 결국 자신에게 쳐 맞으면서 배우라는 뜻이다.
마초도 그걸 알았지만 오히려 이의민과 같이 씩 웃을 뿐, 그의 혹독한 가르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초에게도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이의민에게 하나라도 더 배워서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기쁨이었다.
다시 자세를 잡는 이의민과 마초. 또 한번의 격돌이 이어졌지만 이번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초는 나가떨어졌다.
마초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 기교라는 것이 단번에 장착되지는 않을 것 같다.
“흐음! 역시 바로 고쳐지지는 않는군. 하긴 말 한마디에 그게 바로 될 것 같았으면, 세상에 너도나도 다 고수였겠지.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네놈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직 모르는 게 당연한 거야. 좀 더 맞으면서 경험하다보면 나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내 발끝은 따라올 수 있을 거다.”
마초는 이의민의 말을 들으면서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분명 자신이 어린 나이긴 하지만 이의민도 기껏해야 20대가 아닌가. 그런데 자신에게 충고해 주는 꼴을 보면 무슨 황충 정도 되는 사람이 하는 것 같다.
이의민은 그런 마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좀 쉬었다가 밥 먹고 황충에게 가 봐. 그에게도 배울 점이 많을 거다.”
‘헉! 무슨 귀신이야?’
그렇게 마초를 보낸 이의민은 사냥감을 물색하듯 또 다른 대련 상대를 찾아 나섰다.
“으음. 아직 아쉽구먼.... 오랜만에 장료나 서황이랑 대련을 좀 해볼까...”
다른 희생양을 찾아 집 밖을 나서려는데 하인 하나가 황급히 다가왔다.
“승상. 별채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이 시간에 딱히 누굴 만나려는 약속을 한 기억이 없었다.
“손님? 누구냐? 공달인가?”
“아닙니다. 태사의 양녀인 초선님이 승상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이자 반갑지 않은 손님의 등장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찾아오는 걸 마다할 사내는 없고 그건 이의민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초선은 예외다.
일전에 정욱과 얘기를 나눴듯이 초선 뒤에 숨어있는 왕윤의 의도가 뻔히 보이는 것 같다. 그러니 초선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이의민은 그녀를 결코 환영할 수가 없다.
“왜 막지 않은 것이냐? 내 집이, 한나라 승상의 집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더냐?”
이의민의 으름장에 하인은 살짝 땀을 흘리긴 했지만, 곧 자신이 왜 그녀를 순순히 들여보내주었는지 소신 있게 밝혔다.
“저.... 외람된 말씀이지만 작은 주인님을 원하는 것은 여러 대인들이나 저희 같은 놈들이나 한 마음입니다.”
“하! 그래서 너희 마음대로 초선을 집안으로 들였다는 거냐?”
‘내가 너무 물러진 것인가? 고려에 있을 때는 저런 하인들은 감히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는데....’
하지만 이의민은 지금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자신을 나쁜 쪽으로 끌고 가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니라 충심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걸 이의민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정욱과는 달리 왕윤과의 정치적인 얘기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이 굳이 명을 내려주지 않아도, 억지로 자신을 위하는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위하는 모습을 보며 이의민은 더 이상 하인을 나무라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초선은 아니 된다. 당장 돌려보내라.”
“초선은 아니 되신다니.... 알겠습니다.”
이의민의 명을 억지로 따르는 하인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마치 전에 같은 얘기를 나누었던 정욱의 표정 같기도 했다.
이의민은 하인의 표정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씨발! 설마 내가 남색가니 뭐니 하는 소문이 퍼지는 거 아냐?’
순간 몸서리가 쳐지는 이의민.
“됐다! 내 초선을 만나러 가겠다.”
그제야 하인들도 표정이 밝아졌다.
그대로 별채로 간 이의민은 자신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승상을 뵙습니다. 소녀, 태사 어른의 수양 딸 초선이라 합니다.”
‘확실히 예쁘긴 더럽게 예쁘군. 폐월이니 뭐니 하는 소문들이 헛소문은 아니었어.’
이의민의 눈에도 초선은 확실히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딱 그뿐이다. 이의민이 보기에는 초선은 그저 꽃이나 아름다운 장식물을 보는 것 같다. 고려시절 아름답긴 하지만 초선보다는 못한 여인을 처음 볼 때만큼의 두근거림도 없었다. 이의민의 속이 그만큼 노회해져서 그런 것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초선의 외모보다는 현재 그녀와 얽혀있는 정치적인 문제만 이의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 얘기는 많이 들었다. 헌데 여인의 몸으로 이렇게 사내의 집에 먼저 찾아와도 되는 것인가?”
“네?! 아니?! 그게....”
초선은 크게 당황했다. 보통의 사내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 넋을 잃거나 찬양을 하기 바빴다. 그런데 이의민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고, 자신이 남자에 굶주린 음탕한 여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소, 소녀는 그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래서 이곳에 온 본 목적도 잊고 횡설수설하는 초선.
“뭐? 그럼 네 의지로 여기 온 게 아니라 왕 태사가 억지로 보낸 것이냐?”
“그건....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닌데.... 또 그렇다고도 볼 수가....”
“뭐라는 거야? 자세한 사정은 관심 없고, 기왕 온 거 밥이나 먹고 가라.”
이의민은 더 이상 초선에게 신경 쓰기 싫은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초선은 멍한 얼굴로 이의민의 뒷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볼 뿐이다.
이의민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초선은 총관에게 물었다.
“아저씨.... 저 승상께 거절당한 건가요?”
옆에 있던 총관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도 초선 못지않게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멍청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던 초선은 곧 앵두 같이 고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딴 건 몰라도 사내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 건 처음이다. 스스로의 외모가 별로 대단치 않다고 늘 겸손하게 얘기했던 그녀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외모에 무척 자신감이 넘쳤었다. 그런데 이 반응은 뭔가.
물론 초선도 이의민과의 관계가 순탄하게만 진행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왕윤과 이의민의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일 거라고만 여겼다. 적어도 자신의 외모가 이의민에게 먹히지 않을 거라고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의민의 표정, 태도,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지금 이의민은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의민이 일부러 관심 없는 척을 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초선은 남자들의 반응에 누구보다 민감했다. 그녀는 여태껏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사내들을 수두룩하게 보았다. 그런 그녀는 사내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보는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혹시 정말 소문대로 남색가인가...?’
초선은 세상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보다가도 갑자기 속이 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나를 보고 그리 귀찮다는 눈빛을 보낼 수가 있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초선으로서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셈이다.
여태껏 젊은 사내들 중 그녀를 대면하고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내가 없었다. 아니. 젊은 사내뿐만 아니다. 왕윤이나 총관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부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이었다. 권세가들은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졌고, 평범한 사람들은 탐욕과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곤 했다.
그런 경험 밖에 없던 초선이 처음으로 사내에게 무시를 당했다. 그녀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자 굴욕이었다.
그렇게 혼자 생각에 빠진 초선에게 총관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녀를 위로했다.
“아가씨... 승상께서 참으로 바쁘신 모양입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아니요! 승상께서 식사를 하고 가랬으니, 그래야겠어요. 승상의 집에서는 과연 어떤 식사가 나올지 구경이나 하죠!”
어딘가 표독스러워진 초선. 애초에 온 목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그녀의 전의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매정하게 돌아섰던 이의민은 안방으로 돌아와 하인에게 물었다.
“그래. 초선은 돌아갔는가?”
“아닙니다. 승상께서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하셨다고, 지금 별채에서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뭐? 밥 먹고 가랬다고 진짜 먹나?”
그 정도 얘기했으면 알아서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진짜 밥을 먹고 가다니.
“하! 눈치가 없는 건가? 아니면 한번 해보자는 건가?”
창칼로 싸우는 건 자신이 있는 이의민이다. 게다가 최근에 말로 싸우는 것도 나름 재미를 붙였다. 하지만 여인과 이런 식의 싸움은 살짝 당황스럽다. 이걸 싸움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황스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이의민은 바로 곽봉을 찾았다. 이의민에게 뭔가 웃긴 얘기가 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은 역시 곽봉이다.
“형님. 뭐하슈?”
“오! 왔냐? 그런데 어쩐 일이야? 요즘 바쁘다면서 통 얼굴 보기 힘들더니.”
이의민은 바로 초선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러자 곽봉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크흐흐. 그래. 어찌 생각 하냐?”
“뭘 어찌 생각한단 말이오? 밥 먹고 가랬다고 진짜 먹고 갈 줄은 몰랐다는 생각밖에 없지.”
“정말 관심 있는 거 아냐? 그게 아니고서는 굳이 날 찾아와 그런 얘기를 할 필요가 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윤의 딸이오. 관심은 무슨....”
“하긴 왕 태사의 딸이니, 조금 그렇지?”
사실 곽봉에게 했던 얘기와는 달리 굳이 왕윤이 아니더라도 초선에게 관심이 그다지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후 명문가 규수 치고는 살짝 파격적인 행동에 꺼져가던 관심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이의민. 물론 이것으로 그친다면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 가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