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폐월, 움직이다 (1)
낙양의 황궁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어전회의는 황제가 가장 먼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상소를 읽으면서 시작됐다.
“이번에는 형주와 양주 등지에서 올라온 상소로구려. 형주 남부지방과 양주 일부 지역에서 홍수로 인해 피해가 막심하다는 내용이요. 경들은 어찌하면 좋을 것 같소?”
최근 고생을 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몇 살이라도 더 먹었다고 그런 것일까. 황제는 이전보다 확실히 조금 더 성숙해진 얼굴로 대신들을 바라보며 어전회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짝 바뀐 황제와는 달리 대신들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금 황제가 질문한 건 사실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모두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대답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이 자리에서 황제의 가장 가까운 왼편에 위치한 승상 이의민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괜히 이의민의 의중과 반대되는 발언을 했다가 그에게 찍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답을 피하고 있다. 이의민의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물론 순유나 정욱, 종요 등 이의민의 사람들이 이 자리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건 다른 대신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다. 그들이 이의민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라면 이의민이 오히려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걸 더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설사 모른다고 하더라도 괜히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 아무 말 못할 인물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전 안에서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모든 대신들이, 심지어 황제까지 이의민의 눈치를 봤다. 이쯤에서 그의 입이 슬슬 열린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생각할 게 무어 있겠습니까? 폐하. 어려운 백성들이 있다면 조정에서 마땅히 그들을 돕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국고의 돈과 구휼미를 풀어 그들을 구제하시지요.”
이의민의 입이 떨어지자 그제야 다른 대신들도 침까지 튀기며 떠들었다. 당연히 이의민의 의견이 옳다고 맞장구치는 의견들밖에 없다.
“오오! 승상의 말씀이 실로 옳사옵니다. 폐하.”
사마 양표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이의민을 살피다가 한숨 크게 놓았다는 표정이다. 그는 솔직히 이의민이 그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물론 이의민이 백성들의 평판을 신경 쓰는 것은 그도 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홍수가 발생한 지역은 형주남부와 양주였다. 그래서 이의민이 그들을 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걸로 봤다. 그곳들은 이의민에게 복속된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형주자사 유표는 분명 이의민의 사람이다. 하지만 형주남부에 있는 4군, 영릉, 계양, 무릉, 장사는 유표의 입김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다. 즉, 이의민의 통치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난 곳이라는 뜻이다.
뭐 형남 4군은 그렇다 치자. 그곳을 지배하는 자들 중 유명한 자들도 없고, 이의민에게 반기를 든 적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양주는 분명 다른 얘기다. 양주는 현재 손견이 혈전 끝에 손에 넣은 지역이다. 손견은 반 이의민 연합에 가담하여 이의민에게 칼을 직접적으로 들이댄 인물이 아닌가. 물론 원술에 의해 이의민과는 직접 싸워보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현재 손견이 지배하는 양주를 이의민이 구제해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회의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형주남부와 양주 백성들을 구제한다고 하니 양표는 이의민이 더 대단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허어! 승상은 참으로 대인이로다. 어찌 저리 마음이 넓을 수가 있단 말인가? 가식이 아니라 백성들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직까지 이의민을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 양표 같은 대신들도 점점 마음이 달라지고 있다.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다.
“저, 정말 승상께서는 그 지역들의 백성들을 구제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폐하. 어찌 신이 폐하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올리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짐도 승상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럼 형주남부와 양주에 구휼미와 물자를 보내는 것으로 하지요.”
이후 어전회의 역시 비슷한 형태로 진행됐다. 황제가 안건을 내면 아무도 입을 열지 않다가 이의민이 딱 한마디 던진다. 그럼 모든 대신들이 이의민의 의견이 얼마나 훌륭한지 앞 다투어 찬양하기 바쁘다. 그리고 황제는 이의민의 의견을 수락했다.
그 과정을 안건만 다르게 해서 몇 차례 반복된 후 어전회의가 끝났다.
황제를 시작으로 다들 서둘러 어전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이의민은 아직 볼일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의민은 나가려던 순유를 불러 세웠다.
“공달. 요즘 너무 나한테만 맡기는 거 아닌가? 어째서 한마디도 하지 않지? 내가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전회의 때 순유와 곽가 등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어전회의 때 이의민만 얘기하고 다른 이들은 침묵하는 경향이 늘었다. 마치 이의민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듯이 말이다.
“훗! 제가 하면 실수지만 주군께서 하면 실수가 아닙니다. 저희들은 주군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도구일 뿐이지요.”
“흠...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자네들이 평소에 하도 백성들 평판에 대해 얘기를 하니 황제에게 그렇게 답하긴 했는데 말이야.... 진짜 그리 해도 되겠나? 손견한테 재물을 갖다 바치는 꼴이 아닌가?”
“하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뭐?! 그럼 손견이 절대 구휼미나 구제 물자를 빼돌릴 리가 없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이번 주군의 구휼활동을 전국에 대대적으로 선전할 생각입니다. 전국 각지에 아마 이런 얘기가 떠돌 것입니다. 승상의 강력한 주장 하에 나라 어느 곳에서든 소외되는 이 없이 모든 백성들이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순유의 말을 이제 알아들은 이의민.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제 순유가 조금만 얘기를 해줘도 다 알아먹을 지경에 올랐다.
“아! 그렇군. 만약 그 구제 물자를 손견이 빼돌렸다면....? 전국적으로 비난을 받고 고립이 되겠군.”
“맞습니다. 어쨌든 손견은 예전의 세력을 상당수 잃고 이제 막 다시 일어서는 중입니다. 그런데 만백성들의 지지가 아니라 비난을 받는다면 기껏 다시 키운 세력을 쉽게 잃어버리고 말 겁니다.”
“반대로 손견이 물자를 빼돌리지 아니 한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이득인 셈이고.... 전국적으로 내 명성이 더 올라갈 테니....”
“맞습니다. 저와 하남윤, 대사농이 대대적인 선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순조롭게 끝나면 장강 이남의 백성들은 물론 전국의 선비나 민초들이 주군의 의기를 칭송할 것입니다. 적의 땅에 있는 백성들임에도 그들을 위해 구휼을 했다. 멋지지 않습니까?”
“흐흐. 역시 공달이야.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말이야.”
예전에는 생각도 못했지만, 지금 이의민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 자신을 더 좋게, 그리고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점점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순유도 생각지 못한 것까지 떠올렸다.
“그럼 이왕 하는 김에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나?”
“예?”
“국고에서 구제하는 물자에 내 사비까지 좀 더 보태는 거야. 그럼 그 선전의 효과가 더 좋지 않겠나?”
“오! 주군! 참으로 멋진 생각이십니다.”
이제 쿵짝이 아주 잘 맞는 이의민과 순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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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를 썼음에도 가려지지 않는 미모를 가진 여인. 초선이 편치 않은 표정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찡그린 아미마저 고와보이는 것이 뭇 남성들이 그녀의 표정을 본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그녀의 고민을 해결하고 싶으리라.
“아저씨. 저기에서 잠깐 쉬었다 가요.”
그녀가 지금 향하는 곳은 이의민의 집이다. 그의 집은 낙양의 고관대작들이나 유지들이 사는 부촌에 위치에 있었는데, 왕윤의 집과도 지척거리였다.
그래서 굳이 휴식을 취할 필요가 전혀 없는 거리다. 그럼에도 그녀는 휴식을 핑계 삼아 최대한 이의민의 집에 가는 걸 늦추고 싶었다.
그녀를 이의민의 집에 데려다 주던 총관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불쌍한 아가씨.... 얼마나 가기 싫었으면.... 하긴 가고 싶은 게 이상하지. 태사님의 원수 아닌가.’
총관은 초선이 왜 이렇게 이의민의 집에 가기 싫어하는 것인지 오해하고 있다. 그는 초선도 왕윤처럼 이의민을 원수라고 여기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선의 마음은 달랐다. 끝내 왕윤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였지만, 그녀는 이의민을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저잣거리에서 듣던 소문에 반해 그에게 호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호감을 가진 사내에게 미인계를 써야하는 가혹한 운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이의민의 집으로 향하는 초선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
차마 이의민의 집으로 가지 못하고 주변만 빙빙 돌다가 한 객잔까지 와서 쉬는 초선과 수행원들.
차를 한잔 마시며 복잡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자연스레 옆 좌석의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캬! 우리 승상. 진짜 너무 멋지지 않은가?”
“승상께서 대단하신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우리 같은 민초들을 위한 마음은 한결 같으신 분이지. 승상께 감히 대놓고 반기를 든 손견의 땅에 있는 백성들을 구휼하기로 마음먹으시고, 그것도 모자라 사비까지 터셨으니....”
“양주 놈들은 아주 복 받은 거지. 그 놈들은 알까? 위급할 때 결국 지들 챙기는 건 손견이 아니라 승상이라는 걸.”
“알아야지. 그걸 모르면 금수새끼들이지. 아주 그러기만 해봐. 그 다음부터 양주 새끼들은 사람 취급도 아니 할 거야.”
최근 머리가 복잡하여 세간의 소문을 듣지 못한 초선은 이의민에 관한 처음 듣는 얘기가 들려오자 귀를 기울였다.
“아저씨. 저게 무슨 얘기죠?”
“아... 예. 그게....”
초선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던 총관은 그녀가 최대한 이의민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최대한 소문을 포장해서 설명했다. 물론 없는 얘기를 지어낸 건 아니고 대부분 사실을 얘기한다.
“그러니까 폐하께 구휼을 강력히 주장한 것도 모자라 사비로 모금을 하신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듣자하니 구경과 그 속관들, 혹은 사정장군보다 직위가 낮다면 100냥 이상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승상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기저기서 거금을 내놓는다니까 내린 조치입니다. 젊은 분이 어쩜 그리 생각이 깊으신지 참으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아....”
집사는 초선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그리 말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아무리 봐도 이의민은 백성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영웅이자 대인이다. 그런 사람을 해하기 위해 미인계를 실행하려는 그녀는 자신이 봐도 천하의 못된 년이었다.
‘아버지는 이게 나라와 황실을 위한 일이라고 하셨지...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초선의 마음은 더 복잡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