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악래와 번쾌 (3)
끝날 것 같지 않던 두 괴수의 싸움도 시간이 지나자 한쪽으로 기울었다. 허저가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허저도 대단한 인물이긴 하지만 장비는 역시 장비였다. 그의 장팔사모는 허저의 몸에 조금씩 상처를 만들어냈다. 아직 치명상을 입은 건 아니지만 출혈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서인지 허저의 힘과 속도가 점점 떨어졌다.
“크흐흐! 허저. 어떠냐? 이래도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느냐?”
자신의 우위를 확인한 장비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허저에게 다시 물었다. 기세는 조금 꺾인 허저지만 그렇다고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허저는 장비를 비웃으며 대답했다.
“훗! 아직 승부가 끝나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질까봐 두려운 것이냐?”
“뭐라고?!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하늘이 준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는구나!”
“하늘같은 소리하네. 네놈 따위는 하늘이 아니다.”
“닥쳐라! 죽고 싶어 아주 용을 쓰는구나. 자비를 베풀어 부하로 만들어줄까 했는데 다 필요 없다. 그래! 네놈 소원대로 죽여주마!”
장비의 공세가 더 거세졌다. 수백 합이 넘도록 싸워서 제법 지칠 법도 한데 장비의 장팔사모는 처음보다 더 빠르게 허저를 향해 휘둘러졌다.
허저는 호기롭게 장비를 도발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놀라고 있다.
‘과연 하북에서 들려오던 소문들이 헛소문은 아니었군. 정말 강하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구나.’
허저의 두꺼운 팔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경련이 일어날 만큼 허저는 힘겹게 장비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지금은 겨우 막아내기라도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막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이게 끝인가?’
장비가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듯 장팔사모를 크게 뒤로 휘둘렀다.
“이제 죽어라!!”
허저도 이 공격은 막지 못할 거라고 여기며 눈을 감았다.
채챙!!
살이 썰리는 소리가 아니라 병장기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허저는 놀라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전위가 나타나 자신의 쌍극으로 장팔사모를 쳐낸 것이었다.
“흐흐! 번쾌. 꽤나 고전하는군. 내가 좀 도와줄까?”
“웃기지 마라! 네놈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
퉁명스럽게 받아치긴 했지만 허저의 표정이 밝아졌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덕분에 살아났다.
장비는 자신의 장팔사모를 쳐낸 전위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전위가 아닌 허저를 향했지만 지금 장비의 공격은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그걸 어떻게든 막아낸 전위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소리다.
“네놈도 같이 죽고 싶은 것이냐? 오냐! 다 죽여주마.”
장비는 전위까지 상대하려고 장팔사모를 휘두르고 있는데, 연합군 진영에서 한 장수가 대도를 휘두르며 튀어나오고 있다.
“이런 비겁한 놈들! 한명을 상대로 두 명이서 덤비느냐! 넌 내가 상대해주겠다.”
장비가 뒤돌아보니 공손찬 휘하 장수인 엄강이다. 장비는 귀찮다는 듯 엄강에게 외쳤다.
“아! 필요 없어! 나 혼자 이 둘을 상대할 것이다. 네놈은 그냥 뒤에서 구경이나 해라.”
하지만 엄강이 장비의 말을 듣고 말을 돌리기도 전에 전위가 그에게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비겁하다고?! 좋다! 일단 내가 너부터 처리해주마. 그럼 쪽수가 맞지 않다는 변명 따윈 못하겠지?”
말을 돌리려던 엄강은 그대로 전위와 맞설 수밖에 없다. 그냥 돌아가다가 등 뒤로 칼을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크윽! 장 장군! 이놈은 내가 상대하겠.... 커억!”
울며 겨자 먹기로 전위와 맞붙은 엄강. 단 일합이었다. 일합에 전위의 쌍극이 엄강의 가슴을 꿰뚫었다. 엄강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절명했다.
“자! 이제 이대일이라는 변명은 못하겠지? 이 싸움은 이대이로 시작한 것이다. 한놈이 너무 빨리 죽어 이대일이 된 것뿐이지.”
장비는 아군의 장수가 죽었는데도 뭐가 즐거운지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그래. 너도 쓸 만한 놈이구나.”
장비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전위와 허저에게 다가갈 때 공손월이 추가 장수를 보내려했다.
“이런.... 국 장군. 그대가 나서주시오.”
“알겠습니다.”
국의가 나서려 할 때 장비의 호통이 이어졌다.
“아무도 나서지 말라! 더 이상 내 싸움을 방해하면 그놈이 아군이라도 용서치 않겠다.”
장비는 전위의 꾀에 넘어갔다. 전위의 말대로 이대이로 시작한 싸움에 연합군 장수들이 더 끼게 된다면 자신이 비겁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장비는 아예 지금부터 이대일로 전위와 허저를 상대하려 한다. 충분히 이길 자신도 있다.
“둘 다 한꺼번에 덤벼라. 나중에 가서 딴 소리하지 말고. 흐흐.”
그리하여 장비와 허저, 전위의 이대일 일기토가 시작됐다. 확실히 전위, 허저와의 이대일 일기토는 장비로서도 쉽지 않다.
허저의 체력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전위가 끼어드는 틈을 타서 체력을 적잖이 회복했다. 그리고 전위는 상대적으로 체력이 쌩쌩한 상황이다.
그러니 아무리 날고 기는 장비라고 할지라도 어려운 싸움을 이어갔다. 특히 둘은 오늘 처음 호흡을 맞춰보는 데도 합이 제법 잘 맞았다.
“어이! 악래! 저놈의 왼쪽 옆구리를 노려!”
“좋다! 번쾌! 그럼 자네가 상대의 사모를 오른쪽으로 치우치도록 유도해!”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싸우지 못해 안달이던 둘이 한치의 빈틈도 없는 합공을 퍼붓고 있다. 마치 10년 지기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 둘을 상대하는 장비는 미칠 지경이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허저부터 처리를 하려해도 쉽지 않았다.
전위의 쌍극은 허저만 노리고 있는 장비를 아주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쌍수무기는 양손으로 휘두르는 무기에 비해 다루기 어렵고 한방 한방의 위력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대신 양손 무기에 비해 훨씬 더 빠른 연속공격이 가능하고,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 쌍극의 장점 덕분에 장비는 허저만 신경을 쓸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전위를 먼저 쓰러뜨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작정하고 전위를 상대하려고 하면 허저가 큰 한방을 준비했다. 허저는 속도나 싸움의 감각은 몰라도 힘에서 만큼은 결코 장비에게 밀리지 않았다. 그런 허저의 큰 한방은 장비에게도 매우 위협적이어서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다.
덕분에 이대일 일기토는 점점 장비에게 불리하게 진행됐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허저와 전위의 합공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장비의 손발은 어지러워졌다.
‘이 두 놈을 너무 만만히 봤구나. 이대로는 힘들다.’
그 누구에게도 절대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장비도 이쯤 되니 뒤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처럼 세력도 없이 떠돌던, 혈기왕성하기만 한 장비가 아니다.
‘이제 물러나야겠구나.’
장비는 천천히 말을 뒤로 물리며 퇴각할 준비를 했다. 그걸 눈치 채지 못할 전위와 허저가 아니다.
그들은 더욱 집요하게 합공을 펼치며 장비를 압박했다. 장비는 결국 공손월 쪽을 향해 외쳤다.
“날 도울 장수를 보내라!”
절대 자신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던 장비가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 순간 공손월은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휘하 장수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어서 가서 장 장군을 도와라! 그대들도 어서 장 장군을 도와주시오! 장 장군이 무너지면 끝이오!”
연합군 장수들이 일제히 나서서 장비를 구하러 나왔다. 당연히 전위와 허저는 그걸 두고만 보고 있지 않았다.
“적군이 나오고 있다. 두고만 볼 것이냐?!”
청주군도 달려 나오는 연합군을 상대하러 뛰어나갔다. 다시 이어지는 군사들 간의 전면전이다.
장수가 빠진 순수 군사들 간의 전투는 연합군보다는 청주군이 우위다. 장비의 등장에 의해 차곡차곡 정리 당하던 청주군이었지만, 이제 장비와 같이 그들을 쉽게 정리할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청주군이 밀어붙이는 모양새다.
게다가 이번에는 청주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서주와 연주에서 온 원군도 청주군을 돕고 있으니 훨씬 더 기세 좋게 연합군을 몰아붙일 수 있었다.
“적들을 섬멸하라!”
“남김없이 다 쓸어버려라!”
청주군과 원군은 신나게 연합군을 추격하며 도륙하고 있었다. 그때 길태가 다급히 선두를 향해 달려와서 허저와 전위를 막아섰다.
“장군들! 멈추시오! 멈추라고!!”
“네놈은 뭐냐? 죽고 싶은 것이냐?!”
무시무시한 기세의 허저가 으름장을 놓자 길태는 절로 온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썅! 나 이의민에게도 개겨 본 사람이야.’
“앞을 보시오! 저게 아니 보이시오? 저긴 적들의 함정이오!”
길태는 연합군 뒤쪽을 가리키면서 허저와 전위에게 따졌다. 둘은 그제야 길태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길태의 말대로 후방 정면 쪽에는 국의가 기다리고 있고 좌측으로는 전해, 우측으로는 수원진이 매복군사들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흥분해서 추격을 할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영락없이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갈 뻔했다.
“크으! 고맙소. 군사. 그대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미안하오. 욕심이 앞서 그대에게 되려 큰 소리를 쳤소.”
허저와 전위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군사들을 물렸다. 처음에는 길태를 무시했던 그들이지만, 상대가 자신보다 더 나은 점을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윽고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북해성으로 돌아온 허저와 전위.
교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둘을 맞이했다.
“하하하! 정말 고생이 많았네. 자네들 덕분에 이기기 힘들었던 전투에서 승리했군.”
허저와 전위에 대한 교모의 시선과 대접이 완전히 달라졌다. 장비라는, 상대하기 불가능해보였던 적을 상대한 것도 모자라 물리치기까지 했다. 교모로서는 구세주를 영접한 기분이다.
“자네들을 위해 특별히 한상 거하게 차렸네. 혹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허저와 전위는 교모와 그 수하들과 함께 잔칫상을 받고 술을 마셨다.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지만, 죽다 살아난 그들로서는 충분히 지금 이 순간을 기념할 만 했다.
서로 술잔을 교환하면서 대화를 하던 장수들. 교모는 궁금하던 것을 전위와 허저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네들 말이야. 어찌 아직까지 명성을 떨치지 못한 것인가? 자네들의 실력이라면 중원에 그 이름이 진작 퍼졌어야 할 텐데 말이야.”
교모의 질문에 전위가 먼저 답했다.
“소장은 원래 진류 태수 장막의 휘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오해가 생겨 도망자 신세가 됐습니다. 이후 왕 자사께서 부임하셔서 소장의 누명을 벗겨주셨고, 덕분에 소장은 왕 자사를 따르게 됐습니다.”
전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교모. 확실히 그의 설명대로라면 아직까지 무명인 게 이해가 됐다.
이후 허저의 대답이 이어졌다.
“나는 허저라고 하오. 이래 뵈도 여남의 여수나 회수에선 날 모르는 사람 없었소. 이곳에서는 무명이지만 고향에서는 제법 잘 나갔다는 얘기지. 원래 원술 밑에 들어가려 했으나, 그가 사도가 된 후 낙양으로 떠났소. 그 후에 나에 대한 소문을 들은 포 자사께서 나를 등용하신 것이오.”
“하하! 그랬군. 참으로 든든한 사람들일세.”
역시 들어보니 포신이나 왕광이나 자신이 보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패를 내준 것이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둘의 입에서 확답을 듣고 나니, 교모는 포신과 왕광에게 가졌던 섭섭함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