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악래와 번쾌 (2)
교모와 길태 둘 다 인상을 찌푸린 이유는 바로 포신과 왕광의 원군 때문이었다. 원군 대장으로 온 두 사내는 생전 처음 보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교모는 원군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었다. 그런데 처음 원군을 봤을 때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포신의 원군은 2만, 왕광의 원군은 1만이었다. 병력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그들이 보낼 수 있는 병력의 한계치가 그 정도일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군의 대장으로 온 장수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교모가 어이없어 하면서 묻자 왕광군의 대장으로 온 장수가 자신의 가슴을 쿵쿵 치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소장! 왕 자사의 명을 받고 청주를 구원하기 위해 온 전위라고 합니다!”
“전위라.... 자네 이름이 전위라고....?”
“그렇습니다!”
일단 자신감하나는 높이 살만해보였고, 겉으로 풍기는 기세 역시 범상치 않아 보이긴 했다.
양손에 쌍극을 쥐었으며 단단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게 한눈에 봐도 무력이 보통은 넘어보였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교모의 눈에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교모의 눈에 보이는 건 전위가 처음 보는 인물이란 것밖에 없다.
“끄응! 그래. 알겠네....”
전위에 이어 포신군의 대장으로 온 장수가 앞으로 나서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 사내는 전위랑은 많이 다른 모습을 지녔다.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 것은 같지만, 그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압도적인 덩치였다. 교모가 지금껏 봐온 어떤 상대보다 큰 덩치를 지닌 사내다.
“소장은 포 자사의 명을 받고 온 허저라고 합니다.”
“그래... 허저라고....”
허저 역시 범상치 않은 외모에 무지막지한 무력을 가졌을 걸로 보였지만, 어쨌든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었다. 교모는 이들이 지금까지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면 다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보나마나 겉모습만 그럴 듯한 자들이겠지....’
교모는 포신이나 왕광이 직접 오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서주의 미방이나 왕광 휘하의 최고 맹장인 방열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지금 보내준 이는 전위와 허저라는 무명의 장수만 보냈으니 교모로서는 답답함과 함께 포신과 왕광에게 섭섭한 마음까지 들 정도다.
‘후우! 정말 없군. 내가 그들에 대해 잘 못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 혼자만의 우정이었던가?’
교모는 사실 포신과 왕광을 믿고 10만 대군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았다. 듣기 좋은 별명은 아니었지만 세 얼간이라 불리며 항상 같이 묶였던 정이 있기에 그들이 최고의 원군을 보내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이 배신당한 것 같은 교모다.
“혹시 자네들 말고 다른 장수들은 없나? 방열 장군이나 변희 장군이라든지.... 아니면 미방 선생이라도....”
교모는 혹시나 하며 다시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의 머리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교 자사님! 소장을 믿어주십시오! 당장 원군을 끌고 나가 청주군을 돕겠습니다!”
“소장도 함께 하겠습니다. 출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교모는 섣불리 출격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이들이 연합군을 상대로 잘 싸울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전위와 허저는 젊은 호기와 공명심으로 나서려는 것일 텐데, 나서봤자 얼마 되지 않아 시체로 돌아올 것 같았다. 더군다나 이들이 데리고 온 군사들은 청주병들처럼 죽음도 두려워 않는 군사들이 아니지 않은가.
“기다리게. 때가 되면 출격 명령을 내릴 걸세.”
교모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이들을 출격시키지 않기로 했다. 만약 북해성 앞 전투가 잘못되면 그냥 수성에나 쓰려고 이들을 대기시켰다.
그래서 길태가 왜 이들을 내보내지 않느냐는 질문에 쩔쩔매고 있는 상황이다.
길태도 전위와 허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로서도 전위와 허저가 생전 처음 보는 인물이라 믿음이 가지 않는 건 교모와 마찬가지다.
그래도 길태는 성 밖의 청주군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이들이라도 투입하자는 의견이다.
“그래도 이들이라도 내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 자사님.”
“허나 괜히 내보냈다가 한꺼번에 전멸당하기라도 하면 북해성 수비는 어찌한단 말인가? 이들은 그냥 수성에 쓰는 것이 좋을 듯싶네.”
그렇게 서로 의견이 갈리는 교모와 길태. 그때 전위가 이 둘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살짝 성난 기세로 거칠게 다가왔다.
“교 자사님! 어찌 이러십니까? 소장과 왕 자사님의 원군을 고작 수성에 쓰신단 말입니까? 소장을 믿지 못하십니까? 이 자리에서 확실히 밝히겠습니다! 나는 연주 최고의 전사입니다! 왕 자사께서는 소장에게 악래의 재림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위의 기세에 교모와 길태는 절로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다. 그의 기세도 기세지만 자신감이 너무 대단했다. 악래라니, 과거 상고시대의 명장을 자신에게 빗대고 있잖은가.
그때 뒤에서 코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허저다.
“푸흐흡! 악래라니.... 뭔 개나 소나....”
“이놈! 감히 나를 비웃는 것이냐?”
“좀 정도껏 해야 할 것 아니더냐. 네가 악래면 난 번쾌다.”
허저는 한술 더 떴다. 번쾌는 한고조 유방의 오른팔이자 최고무장이라 평가받는 장수가 아닌가.
“이놈! 덩치를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내가 오늘 한수 가르쳐주겠다.”
“크흐흐! 너같이 말만 앞세우는 놈들은 많이 보았다. 곧 그 입을 다물게 해주지.”
“오냐! 이놈!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을 내보자!”
그렇게 전위와 허저가 서로 싸우기 직전이었다.
보다 못한 교모가 이들을 말렸다.
“지금 뭣들 하는 겐가? 지금 성 밖에서 적들이 아군을 쓰러뜨리고 있는 중일세. 같이 힘을 합쳐 싸워도 모자랄 판에....”
교모는 머리가 더 아파졌다. 전위와 허저가 하는 꼴을 보니 군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장수인 것 같다.
그런 와중에 길태는 계속 원군을 성 밖으로 내보내 청주병을 도우라 종용하고 있었다.
“교 자사님. 어서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지금 성 밖 전투에 지면 수성이라고 잘 되겠습니까? 어서 총력을 기울여 지금 전투에서 승부를 봐야 합니다.”
교모는 이어지는 혼란 속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게 됐다. 결국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소리쳤다.
“그만! 알겠다! 다들 내보낼 것이다. 그래. 자네가 악래라고? 자네는 번쾌고? 자네들이 정말 그 정도라면 성 밖의 저 적군들 정도는 아주 가볍게 물리칠 수 있겠지? 만약 저들을 자네들이 물리친다면 악래와 번쾌라고 인정을 해주겠네.”
이에 전위와 허저는 교모가 자포자기식으로 말을 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들끼리 신나서 먼저 나가겠다고 또 다투고 있다.
“하하! 이제야 소장의 진가를 알아주시는 군요. 교 자사님. 그럼 소장이 앞장서서 적들을 격파하겠습니다.”
“어이! 누구 마음대로 먼저 나가겠다는 거냐? 선두는 내 것이다.”
“웃기는 군! 그럼 나가기 전에 한번 붙는 것이 어떠하냐? 이기는 자가 선두로 가는 거다.”
“좋다! 그리 하는 것이 가장 깔끔....”
또 전위와 허저의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결국 교모는 그냥 허저를 지목했다.
“그만! 허저! 허저 장군이 선두로 나선다.”
“아니?! 교 자사님. 어찌 저놈에게 먼저 기회를....”
“원군으로 왔으면 제발 내 명 좀 들어라.”
“끄응! 알겠습니다.”
“크흐흐!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결국 허저가 선두로 북해성을 나가게 됐다. 허저를 먼저 내보낸 이유는 별 다른 게 없다. 단지 덩치가 전위보다 더 크니까.
의기양양한 허저가 말을 몰고 성 밖으로 나갔다. 그의 덩치가 워낙 서 말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든 듯한 모습이었다.
허저는 나오자마자 쩔쩔 매고 있는 무안국에게 다가갔다.
“어이! 내가 들어갈 전장은 어디인가?”
처음 보는데도 다짜고짜 반말을 지껄이는 허저의 무례한 모습에도 무안국은 반발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허저가 주는 위압감이 대단했다. 성안에 있던 교모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전장에 나온 허저의 모습은 확실히 듬직하다.
“저, 저기 저 괴물이 보이십니까?”
무안국이 가리킨 인물은 당연히 장비다.
“저 못생긴 놈?!”
‘지가 더 못생겼으면서....’
“아! 예. 맞습니다. 저놈이 장비라는 놈입니다. 하북에서 아주 유명세를 떨친 놈이지요. 혹시 저 장비를 상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훗! 비켜!”
허저는 가볍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제야 장비도 허저를 발견했다.
“호오! 이제야 제법 맞붙을 만한 놈이 왔군.”
장비가 청주에 와서 처음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확실히 허저는 눈에 크게 띄었다. 장비도 어디 가서 절대 덩치로 꿇리는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눈앞의 허저는 그런 장비를 샌님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로 큰 덩치를 가지고 있다.
“네놈은 누구냐?”
“나는 허중강이라고 한다! 네놈이 그 유명한 장비냐?”
“크크크! 자식! 내 이름을 듣고도 그리 자신만만하다니. 그래! 사내놈이 그 정도는 돼야지. 다만 네놈 실력이 그 덩치에 어울릴지는 두고 볼 일이군. 오너라!”
곧이어 장비와 허저가 격돌했다.
둘은 서로의 창을 교환하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서로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는 의미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단 일합만으로도 서로의 실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장비는 매우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허저에게 물었다.
“어디서 네 놈 같은 놈이 숨어있었던 것이냐? 허중강이라... 분명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네놈의 직위는 무엇이냐?”
“나는 서주자사 포신님의 좌위로 있다.”
“뭐라? 고작 좌위라고...? 너 같은 놈이 왜 그런 말단관직에 있느냐? 그러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오너라. 그리하면 네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줄 것이다.”
“흐흐! 개소리 말거라. 포 자사가 말하길, 승상께서 나를 크게 쓰실 거라 하셨다. 네놈이 승상보다 강하느냐? 그렇다면 따르겠다.”
잠깐 공세를 늦췄던 장비는 허저의 말에 분노했다.
“이 새끼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다시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고 둘은 어느새 수백 합이 넘도록 무기를 주고받았다.
성에서 허저를 지켜보던 교모는 입을 벌리고 있다. 그는 허저가 처음 장비와 맞붙을 때 열 합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단 일합 만에 끝날 수도 있다고 봤다.
장비가 어떤 장수인가? 이미 여기 오기 전에도 소문이 자자했다. 하북에서 관우, 조운과 함께 병력에서 열세인 공손찬군이 원소군과 비등비등하게 싸울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 아닌가.
게다가 이곳에서 실제로 맞붙어보니 그 위명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 않는 청주병도 장비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청주군의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다. 장비 앞에서 모두 일합 만에, 조금 잘 버티는 자들도 3합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런 장비와 무명의 허저가 수백 합이 넘도록 팽팽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저 장비를 상대로 저리 싸울 수 있다니.... 아아! 어리석구나. 교모야. 포신이 내게 어중이떠중이를 보낼 리가 없지 않은가!”
교모는 크게 깨달으며 허저를 다시 보게 됐다. 동시에 허저와 같이 온 전위도 돌아보게 됐다.
“포신이 저런 장수를 보냈으니... 왕광 역시 잡졸을 보냈을 리가 없지.”
허저와 전위를 볼 때 실망감으로 가득하던 교모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기대가 가득한 눈빛이다.
전위도 그런 교모의 시선을 느꼈는지, 서서히 몸을 풀었다. 그의 전신에서 근육이 요동치는 모습이 갑자기 믿음직스러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