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악래와 번쾌 (1)
청주 북해성 근교.
한동안 조용하던 청주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무려 10만이 훌쩍 넘는 대군이 서로 뒤엉켜 전투를 치르고 있다.
한쪽은 당연하게도 청주를 지키는 청주군들이고, 다른 한쪽은 원소, 공손찬 연합군이었다.
병력은 원소와 공손찬 연합군 쪽이 훨씬 많았다. 원소의 의도대로 연합은 각각 5만씩 군사들을 차출해 무려 10만의 병력으로 청주를 쳤다. 그에 반해 청주를 지키는 군사들은 3만이었다.
그간 청주도 제법 많은 징병을 했지만, 그때마다 낙양으로 간 이의민을 지원하기 위해 꾸준히 병력을 보낸 탓에 3만의 군사밖에 없다.
두 군대의 전력은 명백히 한쪽이 우세해보였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 겉에서 보이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듯했다.
연합군의 가장 선두에 있는 장수가 다른 장수를 향해 외쳤다.
“젠장! 엄 장군! 국 장군! 저 괴물 같은 놈들을 좀 어찌 해보시오!”
그는 현재 연합군 청주원정대 총대장을 맡고 있는 공손월이다. 명령인지 부탁인지 모를 공손월의 외침에 두 장수가 동시에 대답했다.
“살다 살다 저런 놈들은 처음 봤소이다! 군사들을 좀 물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소장도 딱히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유우나 원소를 상대할 때가 나았습니다.”
살짝 먼저 대답한 이는 원소의 장수인 국의였고, 그 다음 대답한 자는 공손찬의 장수 엄강이었다.
그런데 엄강의 말에 국의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불같이 화를 냈다.
“뭣이?! 원소?! 감히 주군의 함자를 함부로 입에 담는다는 말이냐?!”
“거 되게 민감하게 구네! 말실수 한번 한 거 가지고 말이야! 이럴 거면 동맹은 왜 했나?”
“뭐?! 오냐! 동맹이고 나발이고 너부터 죽여주마!”
그 둘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공손찬군의 장수인 전해와 원소군 장수인 수원진 등도 서로를 노려보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공손월은 그 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눈앞의 청주군도 골치인데 동맹을 맺고 있는 공손찬군과 원소군이 서로 싸우려 드니, 현재 총대장인 공손월로서는 두통이 올 지경이다.
“제발 좀 그만들 하시오! 지금 우리끼리 이리 싸울 때요? 전장을 보시오! 우리는 10만이고 저들은 고작 3만인데 오히려 우리가 밀리고 있소. 일단 눈앞의 적부터 쓰러뜨리고 우리끼리 시시비비는 나중에 가리면 되잖소.”
공손월의 말대로 지금 전투에서는 3만의 청주군이 오히려 연합군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원소군과 공손찬군이 연합을 했다지만, 두 군대의 협력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게 당연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군대는 서로 죽자고 싸웠던 적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 연합을 맺었다고 한들 두 군대의 합이 맞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군사회의를 할 때 누가 좋은 의견을 낸다고 해도 그 의견이 제대로 실행될 수가 없다. 공손찬군 장수가 의견을 내면 원소군 장수가 반대했고, 원소군 장수가 의견을 내면 공손찬군 장수가 반대했다.
반대를 하는 이유도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 그러니 좋은 계책이나 전술이 나올 리 만무하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총대장을 두 명 두지 않고 원소 쪽에서 총대장을 양보하는 결단을 내렸지만 소용없었다. 공손월이 뜻을 밀어붙이려 해도 절반의 원소군이 협조를 해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결국 양 군의 장수들은 말이 연합이지 그냥 각자의 군사를 이끌고 따로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청주군이 연합군을 상대로 이리 잘 싸우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얘기다. 무려 3만 대 10만의 전투인데, 아무리 대군 쪽의 합이 맞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양상이었다.
청주군이 이리 강한 전투력을 보이는 건 역시 그들이 과거 청주 황건적으로 있던 청주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투력을 떠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군사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한번씩 지껄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은 연합군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창천이사 황천당립!”
“창천이사 황천당립!”
“뭐, 뭐라고 하는 거야?!”
바로 옆의 동료가 죽어도 아무런 공포심 없이 같은 말만 반복하며 외치는 청주군. 연합군 입장에서는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귀신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연합군은 아무리 병력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밀릴 수밖에 없다. 결국 공손월도 일단 군사를 물리기로 했다.
“아니 되겠다! 전군 후퇴!”
“적들이 후퇴한다! 무리하게 추격하지 마라! 진영을 유지한다!”
청주군을 이끌고 있던 무안국도 무리한 추격을 명하지 않았다. 청주군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도 진짜 죽지 않는 건 아니었다. 병력도 엄연히 열세인 상황에서 굳이 무리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 나름 현명한 판단이었다.
북해성에서 물러난 공손월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군사들과 장수들을 쳐다보았다. 물론 적들이 상식 밖이었다는 건 그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장수들이 너무 무능해보였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적들은 고작 3만, 우리는 무려 10만이나 된다. 어찌 이리 밀릴 수가 있단 말인가? 쓸 만한 장수가 단 하나도 없구나.’
“장군들 이제 어찌할 거요? 형님과 원 자사께서 우리에게 준 시간은 달포뿐이오. 달포 안으로 청주를 접수하라고 하셨는데, 이런 식이면 달포 내로는커녕 일년이 지난다 해도 점령하지 못할 것이오. 아니. 오히려 다시 하북으로 후퇴를 해야 될지도 모르오. 누구 좋은 생각 없소?”
공손월의 질문에 공손찬군 장수들도 그렇고, 원소군 장수들도 그렇고 누구하나 입을 여는 인물이 없었다. 서로 싸울 때는 그리 떠들던 인간들이 말이다.
그때 누군가가 연합군 장수들이 모여 있는 총대장 막사 문을 뜯어 버릴 듯 열어 재꼈다. 아무리 급한 보고를 한다고 해도 용서받기 힘든 무례한 행위다. 더군다나 방금 들어온 사내의 손에는 술병까지 들려 있었다.
전시, 그것도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은 상태인 만큼 그 자리에서 목을 벨 수도 있었다.
공손월은 들어온 자를 향해 호통을 치려다가 크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자, 장 장군?!”
술을 마시며 들어온 사내는 공손월도 익히 아는 인물이다.
“크큭! 애송아. 네놈도 잘한 거 하나 없으면서 뭘 그리 남 탓만 하고 있느냐? 총대장을 맡을 때만해도 자신만만하더니.”
다른 때였으면 상대에게 어린놈이 애송이니 뭐니 한다고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공손월은 눈앞의 사내가 너무 반가웠다. 성격도 자기 멋 대로고 술만 마시면 난폭한 폭군이 되지만 능력하나는 확실한 장수가 아닌가.
“익덕. 여기까지 어쩐 일인가?”
사내의 정체는 바로 장비였다.
“여태 무얼 하느라 10만이나 되는 대군을 가지고 이리 미적거린단 말인가? 형님께서 답답해하시면서 나를 보내셨다.”
“호, 혼자 말이냐?”
“그래. 나 혼자.”
달랑 장비 혼자만 보냈다는 말에 모두 막사 안에 모인 모두가 벙 찐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곧 청주를 점령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한 1만 정도의 원군이 온 것도 아니고 장비 하나 왔는데 어떻게 이 정도로 분위기가 바뀔까?
장비와 한편이었던 공손찬군은 물론 적이었던 원소군도 그간 장비의 위력을 몸소 체험했다. 그러니 다들 알고 있다. 장비라는 인물 하나가 전쟁의 판도를 어떻게 뒤바꾸는지 말이다.
“하하! 장 장군이 왔으니, 이제 저놈들도 추풍낙엽일 것이오.”
“한시름 놓았구려. 그럼 달포 안에 충분히 청주를 점령할 수 있겠소.”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추앙하고 있었지만, 장비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적들은 고작 3만에 불과하다고 들었다. 적장이 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10만으로도 3만을 이기지 못하는 거냐?”
공손월에게 질문하는 장비는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지금 연합군이 청주군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적장 중에 감당하지 못할 이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장 중에 특별히 강한 자가 있는 건 아니다.”
“뭣이? 그럼 대체 10만으로 3만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공손월이 지금까지의 전황을 자세히 설명하자 장비는 김이 샜다는 표정이다.
“쯧쯧! 에이! 간만에 상대할 만한 적이 나온 줄 알았잖아. 고작 그깟 일로 이 몸을 오게 만들다니...”
“익덕! 적들을 우습게보지 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적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자네는 모를 거야.”
“훗! 웃기는군. 그래봤자 칼을 맞으면 죽는 인간들이 아닌가? 내일 이 몸이 싸우는 걸 지켜보도록.”
장비는 끝까지 공손월과 장수들을 무시했다. 공손월은 불쾌했지만 장비에게 따지지 않았다. 왠지 그라면 지금의 난관을 해결해 줄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해결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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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북해성 앞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창천이사! 황천....! 크악!”
장비의 호언장담은 단순히 말뿐이 아니었다. 그는 압도적인 위력으로 청주병들을 쓸기 시작했다.
물론 이의민이 했던 것처럼, 칼 대신 주먹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주병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진 못했다. 대신 장비는 청주병들의 목을 하나하나 따면서 전장을 지배했다.
이의민이 상대할 때처럼 청주병들이 상대보다 더 많다면 모를까, 안 그래도 적은 청주병 입장에선 하나하나 수가 줄어드는 게 치명적이었다.
사이비 신자이자 졸지에 군사 역을 하고 있는 길태는 장비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사들은 동요하지 않았지만, 제정신인 길태 입장에서 장비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다.
“무안국 장군! 어찌 좀 해보시오! 일기로라도 좀 신청해보시오.”
무안국 역시 황당한 눈으로 길태를 노려보며 따졌다.
“뭐요? 그럼 지금 나보고 그냥 죽으라는 거요? 저 괴물을 무슨 수로 막으란 말이오! 저 괴물 놈과 일기토를 했다가는 삼초도 지나지 않고 목이 떨어질 거요.”
“끄응! 아니 되겠군.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보시오. 잠깐 성에 다녀와야겠소.”
“뭐요? 그럼 나보고 저 괴물을 혼자 막으란 말이오?”
“조금만 버텨 보시오!”
그렇게 혼자 북해성으로 돌아가는 길태. 도망치는 건 아니다. 무안국으로는 답이 안 나오니 교모와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길 군사! 전장에 있어야 할 이가 왜 여기 있는가?”
“자사님! 저기 저놈 아니 보이십니까? 이대로 가면 방법이 없습니다. 무슨 좋은 수가 없겠습니까?”
하지만 교모라고 딱히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어떻게든 해보게. 자네들의 신에게 기도라도 올리던가!”
“신은 무슨....! 이대로 가면 다 죽습니다. 북해성을 포기하실 겁니까?”
길태의 간곡한 외침에 교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한쪽을 쳐다봤다.
“끙! 방금 전에 서주자사 포신과 연주자사 왕광이 원군을 보내 왔네.”
“그럼 진작 투입하셨어야죠!”
“그것이 말일세....”
교모는 말을 흐렸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원군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대략 3만의 군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선두에 두 사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을 보는 교모의 표정은 영 마땅찮다. 길태 역시 둘을 보며 표정이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