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대적을 위한 준비 (5)
왕윤의 뜻밖의 등장으로 승상부가 시끄러운 가운데 삼공부에서도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바로 사도 원술이 있는 곳이었다. 원소는 왕윤에게만 서신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원술에게도 서신을 보내놓았다.
원소도 원술이 이의민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원소는 원술의 욕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욕심을 이용해 이의민의 뒤통수를 쳐볼 생각이었다.
“하! 그 종놈이 내게 서신을....? 뭐라고 적혀 있는 지나 한번 보지.”
서신의 첫 문장은 ‘친애하는 가주에게....’ 라고 적혀 있었다. 이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내용이었다. 원소가 원술을 가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니 말이다.
예전의 원술이라면 원소의 감언이설이 적힌 서신에 넘어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원술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원술은 이의민의 옆에서 갖은 경험을 하면서 제법 노련해졌다. 게다가 지금 원술의 곁에는 노숙도 있었다.
“후훗! 종놈이 급하긴 급한가 보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이리 줄줄이 늘어놓다니 말이야.”
“원소가 설마 이런 미사여구 몇 마디에 주군께서 자신에게 넘어올 줄로 알았을까요? 주군을 너무 우습게 본 것 같습니다.”
서신은 온갖 미사여구로 원술을 칭찬하고 있었는데, 요약해보면 결국 이의민을 배신하고 자신과 손을 잡자는 내용이다.
“하! 뭐? 원가의 세상을 만들고 나보고 초대 황제로 오르라고?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군. 한복 따위도 겨우 쓰러뜨려 놓고 중원을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너무 지나치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닌가? 게다가 동맹을 맺은 공손찬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겠나? 하나부터 열까지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는 헛소리들뿐이군. 이깟 서신은 지금 당장....”
원술은 그 자리에서 서신을 찢어버리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서신을 찢어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음... 그래도 이의민 그 놈에게 이걸 보여주는 게 낫겠지?”
원술의 질문에 노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게 좋을 듯합니다. 서신을 승상께 보여드리지 아니 하고 보고만으로 그친다면 괜한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깔끔하게 이 서신을 그대로 승상께 전달을 하시지요.”
“좋은 생각이군. 그런데 지금 당장 이의민이 낙양에 없으니... 대사농이나 하남윤에게 전달하면 되겠군.”
“그럼 제가 이 서신을 하남윤에게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노숙이 서신을 들고 정욱에게 가려할 때, 갑자기 원술이 말렸다.
“자경. 잠깐 멈추게.”
원술의 말에 노숙은 살짝 놀랐다.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뀐다는 말인가?
‘설마... 잊고 있던 야망이 다시 살아난 것인가....?’
노숙은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그간 원술은 이의민 아래에서 욕심을 버린듯했지만, 본디 욕심과 자부심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방금 전에는 분명 원소의 서신을 무시하겠다고 했지만, 숨어 있던 그의 야망이 다시 깨어났을 수도 있었다. 노숙은 그래서 원술이 자신을 제지한 거라 생각했다.
‘정녕 주군은 승상과 척을 지려고 하는가? 아니 된다.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절대 아니 돼.... 정말 주군이 그러려고 한다면 차라리....’
노숙은 원술이 정말 이의민과 척을 지려한다면 자신이 대신 이의민에게 서신을 알릴 생각이다. 얼떨결에 원술을 따르게 됐지만, 사실 이전부터 원술보다는 이의민을 주군으로 삼고 싶었던 노숙이다.
“주군. 왜 그러십니까?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뭐가 아니 된다는 거야? 나 사도야! 사도! 승상에게 보고하는 거면 몰라도 삼공이 어디 아랫것들한테 보고 따위 한단 말이더냐. 여봐라! 당장 하남윤한테 가서 전해라. 지금 당장 튀어오라고 말이다.”
‘응? 이게 아니잖아?’
알고 보니 노숙이 생각하던 게 아니다.
**
낙양 성 밖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쪽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승상 이의민의 군대다.
저 멀리서 대군이 보였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이의민이 있었다.
이의민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백성들은 그가 보이자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어갔다.
보통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사들을 향해 백성들이 환호하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환호하고 기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데 지금 낙양 앞에 모인 백성들은 모두 이의민의 금의환향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다.
“와아아아!”
“승상 천세!”
이의민은 그들 앞에서 대부를 힘차게 들어 화답을 해주었다. 확실히 고려 시절의 삶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고려 시절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넣었지만, 백성들의 마음까지 사지는 못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고려 백성들에게는 이의민과 같은 위치의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 얘기였다.
이의민 역시 그런 백성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만 신경 썼다. 그리고 이의민은 그런 삶의 결말을 제대로 경험했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이런 기분이군.... 흠. 확실히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수많은 환영인파의 인사를 받으며 이의민은 낙양에 황궁으로 들어왔다. 황궁에서도 역시 이의민을 반기는 이들뿐이다.
“주군. 오셨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오랜만... 은 아니군. 그래. 다들 잘 있었나? 별 일은 없었고?”
다시 돌아온 승상부에서는 정욱과 종요가 기다리고 있다. 이의민의 질문에 정욱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별일이 있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원소가 본격적으로 수작을 부리려는 것 같습니다. 이걸 보시지요.”
정욱은 원술에게서 받은 서신을 건넸다.
“호오! 원소 그놈이 원술에게 이렇게까지 얘기했다고? 그놈도 지금 똥줄이 제대로 타고 있나보군.”
“그렇습니다. 그만큼 원소가 급해서 이러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원소는 만만찮은 인물입니다. 그가 하북에 구축한 세력도 절대 가볍게 보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그놈들... 원소랑 공손찬, 그 두 놈은 아직 결판을 내지 못했다며? 그럼 서로 손잡고 날 상대하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사례교위 만총이 조사를 위해 하북으로 갔으니, 조만간 하북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보고할 건 이게 끝인가?”
“사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정욱 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사실 태사가 승상부를 찾았습니다.”
“태사? 왕윤이....?”
정욱은 왕윤이 초선을 이의민에게 소개시키려 승상부를 찾은 사실에 대해 전부 얘기했다. 정욱의 얘기를 들은 이의민은 피식 웃었다.
정욱은 모르겠지만 고려시대부터 비슷한 계략에 수없이 당해온 이의민이다. 고금을 통틀어 사내에게 미인계만큼 효과적인 전략이 있던가.
이의민 역시 정말로 혈기왕성한 20대라면 혹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다. 고려시대와 현 시대의 나이를 합하면 예순에 가까울 정도니.
빤히 보이는 미인계를 자신에게 사용한다는 것이 뻔히 보이니 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크핫! 뭐? 초선? 크하하하! 웃기는 군.”
“예? 주군? 뭐가 그리 웃기신다는....”
“그냥 웃겨서 말이야. 아무튼 왕윤의 딸이 나를 사모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참고로 초선은 폐월이라고 불리는 경국지색...”
“거절해. 딱 봐도 이상하지 않나? 왕윤, 그 인간이 갑자기 아끼는 딸을 내게 준다고? 진심이었다면 아무리 딸이 사정을 한다고 해도 절대 허락할 인간이 아니지.”
이의민의 단호한 얘기에 정욱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귓속말로 이의민에게 물었다.
“저.... 주군. 외람된 질문이오나, 혹시 정말 세간의 소문처럼 남색을 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뭐? 어떤 개새끼가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당장 내 앞으로 데려와! 아주 사지를 찢어 개먹이로 줄 테니.”
“좀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도 사내라면 초선에게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을 터인데, 어찌 그리 딱 잘라 말하십니까?”
“중덕. 자네야 말로 왜 이러는 거야? 이건 왕윤이 수작을 부리는 거 아냐. 나도 알아챈 걸 모르는 건가?”
“저도 왕윤의 속셈을 눈치 채고 있습니다. 허나 그건 저 같이 제 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볼 수 있으니 그런 것이고, 당사자인 주군께선 다르지 않습니까? 어찌 제 3자처럼, 아니면 여인에 조금도 관심 없는 사람마냥 결정을 내리십니까?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초선은 당연히 걸러야겠지만, 차후 주군께서도 얼른 후세를 남기셔야....”
정욱의 잔소리에 이의민은 머리가 아파졌다. 물론 이의민도 여자를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지금 당장은 남은 적들을 정리하는 게 더 우선이다.
“끄응! 알겠다고.”
이의민이 곤란해 하고 있을 때 그를 구원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상! 승상! 급보입니다! 청주에서 온 급보입니다!”
“청주에서....? 갑자기 무슨 일이냐?”
청주에서 교모가 보낸 전령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옷이 다 찢어져있다.
“하북에서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의 대군이 황하를 건너 청주 땅을 침입하고 있습니다. 청주자사께서는 급히 낙양에 원군을 요청하셨습니다.”
“하여간 쉴 틈을 아니 주는군. 우금! 이번엔 자네와 함께 가지. 중덕. 적군의 수가 파악이 아니 될 정도라는데 얼마 정도의 군사를 끌고 가면 되겠나?”
순유가 이의민을 만류했다.
“가시면 아니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벌써 저리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원소와 공손찬이 동맹을 맺었을 수도 있습니다. 최근 첩보에 의해 계산해보면 적들의 총 병력은 대략 25만이나 될 것입니다.”
“그리 많나?”
“나이가 되는 남자는 닥치는 대로 징병하고 이민족까지 부대에 끌어들였다고 합니다. 그 규모는 이곳 낙양의 병력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럼 더더욱 청주를 지원해야하지 않겠는가?”
“아니지요. 적들은 전력을 청주에 투입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건 그들에게도 큰 모험이기 때문이지요. 아마 대략 10만 정도를 투입하고 나머지는 하북에 두었을 겁니다. 주군께서 하북 땅을 노릴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고, 또 만약 주군께서 청주를 도우러 가셨을 때 낙양을 노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4만 병력과 함께 우금 장군과 곽가, 태사자, 관해까지만 보내시고 주군은 낙양을 방어하십시오. 게다가 주군께서는 전쟁 말고도 할 일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흐음.... 그래도 되겠나? 그렇게만 보내도 청주를 방어할 수 있겠냐는 말이야.”
청주에 대한 걱정도 되고, 결정적으로 전쟁을 자신이 직접 치르지 못한다는 것도 아쉬운 이의민이다.
“수하들을 믿으시지요. 주군.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닌 청주라면 절대로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잊으셨습니까? 거기 군사들이 어떤 놈들인지....”
순유의 말에 그제야 이의민은 수긍했다.
예전에 청주 황건적이었던 이들이다. 누구보다 이의민은 그들을 잘 알고 있다.
“그래. 그놈들이라면 믿을 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