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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17화 (117/175)

117. 대적을 위한 준비 (4)

왕윤의 집에 한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있다. 그런 그녀에게 하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왔다.

하인은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만큼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그 유명한 초선이다.

“아씨. 태사 어른께서 부르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예.”

“어서 가자!”

초선은 들뜬 마음으로 왕윤에게 달려갔다. 왕윤의 양녀인 초선은 그간 노심초사하면서 지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왕윤의 얼굴은 말도 못 꺼낼 정도로 안색이 어두웠다.

왕윤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생각하는 초선 입장에서는 그런 왕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고통이었다. 왕윤에게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무척 서글프기도 했다.

그랬는데 어제 왕윤이 조금 달라졌다. 이전까지 왕윤은 삶에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갔다면 이제는 무언가 목표가 생긴 것 같았다. 왕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티내지 않으려는 것 같았지만, 오랫동안 그를 아버지로 모셨던 초선은 모를 리가 없었다.

어쨌든 양부인 왕윤에게 삶의 목표가 생긴 것만으로도 덩달아 기쁜 초선이었다. 그랬는데 오랜만에 자신을 불렀으니 더 들뜨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께서 내게 무슨 부탁이라도 하시려는 것일까? 그게 무엇이든 들어드려야지....’

초선은 단단히 각오를 한 채 왕윤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소녀 왔습니다.”

“그래. 초선. 들어오너라.”

그런데 막상 왕윤의 얼굴을 보니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파인 그의 주름이 오늘 따라 더 깊게 파여 보였다.

왕윤은 초선이 들어왔는데도 그녀를 처다 보지도 않고 한동안 말없이 술만 홀짝홀짝 들이켰다. 초선은 근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술병을 들었다.

“아버지... 소녀가 따라 드릴 게요.”

초선은 왕윤의 잔에 술을 따르려 하다가 깜짝 놀라 술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왕윤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왕윤이 지금까지 초선 앞에서 한숨을 쉬거나 한탄을 한 적은 많아도 눈물까지 보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 놀라는 초선이다.

“아, 아버지...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어찌 우십니까?”

“초선아... 크흑!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라.”

“대체 무슨 일이신데요?”

“나는 이 나라와 황실을 위해 너를 희생시키고자 한다.”

충격적인 왕윤의 말에 초선은 결국 술병을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그, 그게 무슨....?”

초선은 너무 당황스러워 입이 열리지 않을 정도다. 밖에서는 온갖 꼰대 질을 해대는 왕윤이었지만, 초선에게는 자신의 근심 걱정을 얘기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왕윤은 초선을 양녀가 아니라 친딸처럼 여겼다. 그래서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이지 않고 키우려고 나랏일에 대한 얘기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랬던 왕윤이 지금 초선에게 나라와 황실을 위해 한 몸을 바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선은 오히려 기쁜 마음이 들었다. 늘 왕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소녀를 어찌 희생시킨다는 말씀이세요?”

“너를 이용해 승상 이의민을 제거하고자 한다...”

초선은 더욱 놀랐다. 나라와 황실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놀랐지만, 지금은 그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놀람이다.

“예? 승상 말씀이세요? 소녀는 힘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천한 아녀자일 뿐입니다. 그런 소녀가 어찌 승상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천하에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말을 꺼내기가 어렵지 한 번 꺼내니 왕윤의 입이 술술 열렸다.

“이의민에게는 아직 여인이 없다. 그런 그의 앞에 네가 나타난다면 그도 사내인 이상 넘어오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를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왕윤의 말에 초선의 가슴이 뛰었다. 사실 그녀 역시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이의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었다. 왕윤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는 가슴 뛰는 영웅담을 들을 때면 남몰래 그를 자신의 품에 품곤 했다. 그런 이의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에 초선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곧 초선은 왕윤이 앞서 말한 얘기를 떠올렸다. 이의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는 이유는 결국 미인계를 통해 그를 제거하기 위함이 아닌가.

“아, 아버지. 그럼 설마 승상이 소녀에게 빠진다면 그걸 이용해 그를 제거할....”

“그렇다.”

초선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의민을 몰래 흠모하기도 했던 그녀는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에 동참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 소녀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승상에 오른 지금까지도 여인이 없었는데, 소녀가 유혹한다고 해서 과연 넘어올까요?”

초선은 일부러 자신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왕윤의 의지는 확고했다.

“아니다. 초선아.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가 다른 취미가 있어서 여인을 멀리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까지 너무 바쁘게 살아왔기에 여인을 취하지 못한 것이지. 그러니 네가 그의 곁에 간다면 틀림없이 넘어올 거다. 설사 그가 소문의 남색가라 하더라도 네겐 넘어갈 수밖에 없다. 폐월(閉月)이라는 별명을 가진 네가 아니더냐. 세상에 초선 너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그 어떤 남정네가 마다할 것이냐?”

초선의 미모는 달이 부끄러워 숨을 정도라고 소문이 파다했다.

“아아.... 그래도 못하겠어요. 소녀, 사실 그 분을....”

초선은 결국 속에 있는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으려 했다. 그때 왕윤이 돌연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아가. 너에게 차마 못할 짓을 시키고 있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이 방법 말고는 역적 이의민을 제거할 방법이 없다. 죽어서든, 혹은 다음 세상에서든, 그때는 내가 너의 종이 되어 평생을 모시겠다. 그러니 제발... 제발....”

왕윤은 거의 애원하듯이 초선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에 초선의 마음도 크게 흔들렸다.

이의민에 대한 흠모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직접 만나보지도 못한 이의민보다는 왕윤이 그녀에게 훨씬 더 소중한 존재였다.

“알겠어요. 아버지. 그러니 그만 하세요.”

“정말이냐? 정말 내 부탁을 들어줄 테냐?”

“아직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에요.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알겠다. 고맙다. 초선아....”

초선이 나가고 왕윤은 눈물을 뿌리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초선이 왕윤을 잘 알 듯, 왕윤 역시 초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초선이 이 정도로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으면 이미 수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

다음 날, 왕윤은 또 다시 집을 나섰다. 몇 달 동안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던 그가 사흘 사이에 두 번이나 집을 나왔다.

집 앞에는 역시 마선식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는 엊그제의 숙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지 두통을 느끼며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이고! 머리야.... 응? 태사 어른?”

“허허! 자네. 생각보다 술이 약하구먼. 쯧쯧! 고작 그걸 먹고 뻗는다니....”

“태사 어른. 그런데 엊그제 계산이.... 그런데 또 나가십니까? 이번에는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해장국이라도 드시려고....?”

“승상부로 갈 것이다.”

느닷없이 승상부로 간다는 왕윤의 말에 마선식은 긴장했다. 혹시 엊그제 낙수객잔에서 술에 취해서 왕윤이나 아니면 다른 고관에게 큰 실수라도 했나 싶다.

“승상부에는 어쩐 일로 가시는 겁니까? 혹시 소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별 거 아니야. 그냥 엊그제 술을 마시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네. 계속 이리 승상과 척을 지고 남은 생을 살 것인가 말이야. 어찌 보면 승상도 나를 엄청 배려해주는 셈이 아닌가. 마음만 먹었으면 나 정도는 최열처럼 제거할 수도 있었으니 말일세. 허나 그러지 않으면서 나를 계속 낙양에 살 수 있게 두는 것을 보니 나도 마음을 고쳐먹어야겠다고 생각했네.”

마선식은 미심쩍었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가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승상부로 들어서는 왕윤. 때마침 하남윤 정욱이 업무를 보고 나오고 있었다.

아직 이의민이 낙양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조정의 업무 대부분을 관장하고 있는 정욱은 늘 승상부에서 살다시피 머물고 있다.

“음? 태사 어른 아니십니까?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허허!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는가? 겸사겸사 인사라도 하려고....”

왕윤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지만 거기에 넘어갈 정욱이 아니다.

“솔직히 우리가 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어떤 꿍꿍이로 오셨는지 솔직히 말씀하시지요.”

하지만 왕윤은 전혀 무안해하지 않고 필살의 연기를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이렇게 불편한 관계로 지낼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찾아 왔다네.”

“정말 그 이유 때문에 이리 발걸음을 하셨단 말입니까?”

정욱은 계속 칼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후우! 그리 노려보지 말게. 자네가 노려보면 내가 오금이 떨려. 솔직히 말하겠네. 딸 아이 때문에 왔네.”

“딸이라면... 폐월 초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자네도 아는 군. 초선 때문에 왔다네.”

“아니? 태사께서 여기 오는 거랑 영애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여전히 날카로운 정욱의 질문에 왕윤은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딸아이가 승상을 사모하고 있는 것 같다네.”

“예?”

“승상이 나와 정적이었기에 초선이 그간 티도 못 내고 지냈던 모양이야. 그러다 보니 상사병이 날 정도로 심각한 상태더군. 당연히 나는 펄쩍 뛰며 집에서 쫒아내려 했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쉽게 되겠나?”

“하! 그래서 그것 때문에 오셨다...?”

“그렇다네. 옛말에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딸아이가 저런데 난들 어쩌겠나? 나와 자네들은 지금까지 원수지간이었지만, 초선 때문에라도 그 관계를 개선하고 싶네. 그렇다고 내가 승상을 이겨먹을 수도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정욱은 여전히 왕윤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의심만 가지고 왕윤을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태사라는 직책은 엄연히 이곳에 드나들 수는 있는 직책이니 말이다.

물론 정욱이 마음만 먹으면 태사라는 직책과 관계없이 그를 내쫓을 수도 있었다. 왕윤이 태사라고는 해도 아무런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일 뿐이고, 낙양에서의 영향력 역시 다 사라졌다.

그에 반해 정욱은 낙양의 대소사를 모두 관장하는 자리에 있고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인 이의민의 최측근 중 한명이었다. 이 자리에서 당장 왕윤을 내쫓는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욱이 왕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주군인 이의민도 철저히 명분에 따른 행동을 하는데, 정욱이라고 해서 자신의 힘을 믿고 태사인 왕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왕윤을 승상부 안으로 안내한 정욱은 같이 들어가기 전에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마선식을 불렀다.

“그래. 그간 태사를 잘 감시하였겠지? 태사께서 갑자기 저러는 이유가 뭐냐?”

“그, 그건 소인도 잘....”

“쯧쯧! 도움이 아니 되는군. 그럼 혹시 태사의 최근 동태에 이상한 건 없었느냐?”

마선식은 최근 낙수객잔에 다녀온 것에 대해 보고를 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마선식은 술에 취했으니 감시업무를 소홀히 한 셈이다.

‘젠장! 하필 엊그제 객잔에... 에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겠어? 술에 취해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래도 다른 누군가를 만난 적도 없었던 것 같고...’

제 발 저린 마선식은 대충 둘러댔다.

“최근 계속 집에만 계시다가 엊그제 갑자기 객잔에 가셨습니다만.... 거기서 그냥 술만 드시고 오셨을 뿐 누군가를 만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나갔지만 누군가 만나지는 아니 했다. 정말 확실한 것이냐?”

“예! 사실입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마선식의 확답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찜찜한 정욱.

‘저런 모자란 놈의 말을 믿고 맡길 수는 없겠지. 앞으로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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