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16화 (116/175)

116. 대적을 위한 준비 (3)

낙양의 한 저택. 적당한 크기의 너무 화려하지 않은,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저택이었다. 그곳은 이제 삼사가 된 태사 왕윤의 집이다.

직위의 고하로 따지면 승상 바로 아래가 삼사다. 하지만 삼사의 일원인 왕윤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태사의 집치고는 너무도 작고 평범한 그의 저택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집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식솔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원래 태사라면 적어도 수백의 가병들은 데리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현재 왕윤의 집에는 수백의 가병은커녕 흔한 호위무사 하나 없었다. 그저 십여 명의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들만 있을 뿐이다.

왕윤은 그런 자신의 집을 둘러보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나라가 어찌 되려고....”

왕윤이 자신에게 사람이 없고 재물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사리사욕을 탐하고 위세를 과시하려는 사람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태사로 있지도 못했을 거다.

왕윤이 지금 한숨을 내쉬는 까닭은 역시 이의민 때문이었다. 그는 이의민이 결국 한나라 황실을 무너뜨릴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한 황실에 누구보다 충심이 깊은 왕윤으로서는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자신은 아무런 힘도 없고 주변에 자신의 사람들도 없었다. 예전에는 낙양의 수많은 선비들을 모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조차 할 수 없었다.

낙양의 부패한 선비들은 일전에 최열을 처단하면서 같이 축출 당했다. 그리고 나머지 선량한 선비들은 이의민의 추종자가 되었다.

이제는 왕윤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저택 안에 있는 십여 명의 하인들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한숨만 내쉴 수밖에.

왕윤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오래간만에 술을 찾았다. 원래 평소에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는 그였지만, 오늘 만큼은 혼자서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맨 정신으로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여봐라! 거기 술 없느냐? 적당히 한상 차려서 오거라.”

“저.... 태사 어른. 집에 술이 없습니다.”

“뭐? 술이 없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평소에 술을 드시지도 아니 하시고, 집에 손님이 오신지도 오래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술이 몇 달 지나면 못 먹는 것도 아니고.... 분명 있었잖느냐?”

“그것이.... 저희들이 조금만 맛만 본다는 것이....”

하인들의 자백에 왕윤은 기가 막힘을 느꼈다. 이젠 자신의 하인들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 다른 이였다면 당장 경을 쳤을 테지만, 마음 약한 왕윤은 그러지도 못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이들을 물러가게 했다.

“그래. 알겠다. 어쩔 수 없구나. 물러가거라....”

“죄송합니다.... 태사 어른. 소인들은 그럼 이만....”

“하아! 정말 뒷방 늙은이만도 못한 신세구나. 하아! 술이 더 당기는 구나.”

그렇게 거의 몇 달 만에 집밖을 나서는 왕윤. 그런데 집 입구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예전에는 우도위였고, 이의민이 낙양에 들어온 이후 보사로서 새 인생을 시작하는 마선식이다.

“태사 어른?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마선식은 현재 왕윤의 집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태사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집에 경비병을 붙여준 셈인데, 고작해야 보사인 마선식 하나만 달랑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순수하게 경비의 목적은 아니다. 마선식은 이의민의 특명을 받고 왕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선식은 몇 달간 집 안에서 나오지 않던 왕윤이 집 밖으로 나가려 하니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왕윤도 마선식이 자신의 집 앞을 이리 지키는 이유가 단순 경비 때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빌어먹을... 내 마음대로 술 하나 사 먹으러 가기도 힘들군.’

“자네? 얼마 전까지 우도위였던 마선식 아닌가? 허허! 수고가 많으이.”

“얼렁뚱땅 넘어 갈 생각 마시고 어딜 가시냐고요.”

왕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우도위였던 시절만 해도 감히 자신에게 말도 못 붙였었다. 그런데 지금 보사가 된 그가 왕윤을 추궁하듯 몰아붙이고 있다.

왕윤은 그간의 설움을 한꺼번에 풀기라도 하듯 마선식에게 외쳤다.

“마음이 하도 답답해서 술 한잔 하러 가네! 술 한잔! 왜? 그런 것까지 승상께 일일이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인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왕윤이 호통을 치자 그제야 마선식은 꼬리를 말았다. 아무리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됐다고는 해도 그래도 태사라는 관직과 왕윤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마선식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하긴 내가 태사를 막을 권한은 없지. 승상께서도 왕윤을 감시하라고 했지, 어디 가는 걸 막으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헤헤! 소인은 그저 태사 어른께서 혹시 위험한 데 가지 않으시는지 호위로서 걱정이 되어서 여쭤본 것뿐입니다. 그럼 술을 드시러 객잔으로 가십니까? 그럼 소인이 호위하겠습니다.”

“그냥 나 혼자 갈 것일세.”

“아니 됩니다. 승상께서 절대 태사 어른의 호위를 소홀히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소인이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호위는 무슨! 자네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다 아는데....”

투덜거리는 왕윤도 곧 포기한 듯 그냥 걸어갔다. 어차피 혼자 마시려는 것도 울적했는데, 이렇게라도 술친구가 있는 것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흐흐! 이 일을 하면서 대낮에 이리 꽁술을 마실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오늘 같은 기회가 흔치 않을 테니 좋은 거 실컷 먹어놔야 되겠군.’

마선식은 잔뜩 기대하며 신이 난 표정이다. 그래도 태사와 동석하는 술자리다. 평소에는 구경도 해보지 못한 산해진미를 실컷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래서 평소에 낙양을 돌아다니며 눈 여겨 보았던 고급 객잔 쪽으로 왕윤을 유도했다.

“태사 어른. 소인이 낙양 객잔들을 좀 다녀봐서 잘 압니다. 동석객잔으로 가시죠. 거기 생선 요리가 아주 끝내줍니다. 황하에서 갓 잡은 생선이 어찌나 신선하던지....”

‘내가 실제로 먹어본 적은 없지만 말이지. 크흐흐.’

“됐네. 생선은 비린내가 나서 싫네.”

“아.... 그러십니까?”

‘노친네. 더럽게 까다롭네.’

“그럼 이수객잔이 어떠십니까? 양고기를 전문으로 하는데....”

하지만 왕윤은 이미 자신이 갈 곳을 정해놓고 있었다.

“낙수객잔으로 가지.”

“예? 나, 낙수객잔 말입니까?”

모처럼 고급객잔으로 가려던 마선식은 크게 당황했다. 왕윤이 평범한 객잔을 선택한 것도 모자라 하필이면 주인장과 껄끄러운 낙수객잔이라니.

하지만 왕윤이 가겠다는데 마선식은 어찌 할 도리가 없다. 결국 낙수객잔으로 온 둘이다.

낙수객잔에는 앞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낙수객잔이 입구에 거대한 나무판에 커다랗게 써진 글씨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거기에는 이리 적혀 있다.

[대사농이 일부러 찾을 정도의 환상적인 맛. 낙수네 양념 닭구이.]

[민초들의 대부 승상께서 출정 나가는 길에 포장해 가시는 장작 소금구이.]

대사농과 승상이 찾았다는 문구가 커다랗게 박혀 있으니, 그걸 보고 오는 손님들로 인해 인산인해였다. 물론 허위광고가 아닌 엄연한 사실이니 광고 효과는 더 좋을 수밖에.

마선식은 구름처럼 몰려있는 인파를 보며 잘됐다는 표정으로 왕윤에게 말했다.

“태사 어른.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 민초들인 듯한데, 이런 자들과 태사 어른께서 어찌 같이 술을 드시겠습니까?”

하지만 왕윤은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객잔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왕윤이 객잔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점소이 하나가 막아섰다. 마선식이 예전에 낙수객잔에 자주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요놈은 처음 보는 놈인데? 하긴... 장사가 이리 잘 되니 점소이를 새로 뽑아도 여럿 뽑았겠군.’

“손님. 죄송합니다. 지금 객잔이 만석입니다. 다음에 다시 오시지요.”

왕윤은 점소이의 말을 듣고 호통을 쳤다.

“자리가 없다니?! 네놈 눈에 저기 빈자리가 아니 보이느냐?!”

왕윤은 낙수객잔의 3층을 가리켰다. 확실히 거기에는 사람이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점소이는 오히려 뻔뻔한 태도로 왕윤과 마선식에게 얘기했다.

“아! 저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뭐? 아무나?”

“그렇습죠. 최근 고관대작 분들도 우리 객잔을 찾는 일이 많아져서, 그분들을 위해 최근 특별히 새로 증축하여 마련한 곳입니다. 그러니 손님들 같은 분들은 절대 3층에 가실 수가....”

왕윤은 얼굴이 시뻘개 졌다. 오늘 하루 동안 받은 무시에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결국 평소에는 내세우지 않던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며 점소이에게 고함을 쳤다.

“나는 이 나라의 태사 왕윤이다! 나보다 고관대작이 어디 있느냐?!”

이때 점소이의 눈이 번쩍했다. 그런데 눈빛이 자신의 실수 때문에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점소이는 왕윤의 신분을 알고서는 태도를 바꿔 그들을 3층으로 안내했다.

“아이고! 태사 어른이셨군요. 몰랐습니다. 달랑 호위 한 명만 데리고 다니는 분이 태사이실 줄은....”

결국 고관대작들만 오는 3층에 올라왔지만, 왕윤은 울적한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젠장! 속으로 그 놈 욕이라도 실컷 하며 술 한잔 하면 기분이 풀릴 줄 알았건만....’

왕윤이 굳이 낙수객잔을 찾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이의민과 특별한 연이 있는 객잔이다 보니, 객잔 곳곳엔 그의 채취가 묻어 있는 듯했고, 그걸 속으로 욕하며 분을 삼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받은 무시로 인한 울적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1층, 2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왕윤의 기분을 더 울적하게 했다.

“아! 글쎄! 승상께서 낙양에 오신 뒤부터 정말 살맛난다는 말이지.”

“그래. 난 하루 두 끼 먹는 게 당연한 일인지 이제 알았네. 얼마 전까진 이틀에 한 끼를 먹을까 말까 했었는데....”

“그뿐인가? 흑사회, 그 양아치 놈들을 정리하셨으니, 밤에 돌아다닐 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여기저기서 이의민에 대한 찬양이 들려왔다. 그것이 왕윤의 심기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 와중에 마선식은 모처럼 공짜 술이라며 신나게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어차피 비싼 건 못 먹게 됐으니 양이라도 채우자는 심산이다. 그렇게 마선식은 자신의 본분도 잊고 인사불성이 됐다.

“아! 뒈인.... 안주 하나 더.... 끄윽!”

왕윤은 씁쓸한 기분으로 술을 몇 잔 마시지도 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점소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태사 어른. 계산해드리겠습니다. 전부 12냥입니다.”

원래 왕윤 정도 되는 이가 직접 계산을 할 일은 없다. 집사나 하인, 수하들이 알아서 처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본인 말고 계산할 사람이 없다.

“아! 저 새끼 술값은 빼주게. 저 새끼가 알아서 내겠지. 그럼 5냥만 내면 되겠나?”

“예.”

왕윤이 스스로에 대한 처지에 한탄을 하면서 엽전을 내밀 때 점소이의 손에 작게 접힌 서신 하나가 들려 있었다. 왕윤이 놀라 점소이를 보는데, 그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능청을 떠는 모습이다.

왕윤은 재빨리 점소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태연하게 서신을 받았다.

“흠흠! 잘 먹었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태사 어른. 다음에도 찾아주십시오.”

“알겠네. 다음에도 다시 오지.”

집으로 돌아 온 왕윤은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펼쳐 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 서신을 보다가 탄식을 내뱉었다.

“허어! 본초가 이걸 기어이 생각해냈구나....”

그 서신은 바로 원소가 보낸 서신이었다. 거기에는 이의민을 잡기 위한 계책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계책은 왕윤도 이미 한 번 생각해 본 적 있는 계책이다. 하지만 딸아이의 인생이 걸린 문제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기도 했던 계책이기도 하다.

고민을 거듭하던 왕윤의 입이 열린다.

“초선을 불러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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