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115화 (115/175)

115. 대적을 위한 준비 (2)

막사로 들어온 사내는 원소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오오! 현덕! 어서 오게!”

들어온 자는 바로 공손찬의 사자로 온 유비다. 그가 들어오면서 했던 말, 아직 돌이킬 수 있다는 얘기는 허언이 아니라 사실이다.

공손찬이 유비를 이곳에 사자로 보낸 이유는 다름 아닌 동맹을 위해서다.

일전에도 유비가 공손찬의 사자로 원소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 원소는 유비에게 갖은 모욕을 주며 푸대접을 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원소는 공손찬과 손을 잡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원소는 유비를 보고 마치 지옥에서 부처님이라도 만난 표정이다.

“하하. 원 자사님. 이리 환대를 해주시니, 이제라도 이 비의 진심을 알아주신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하하! 자네의 진심은 언제나 알고 있었다네. 자자! 이리 앉게.”

“감사합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이미 원 자사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공손 자사께서는 더 이상 하북에서 피를 흘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유비는 원소가 안내해준 자리에 앉고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용건을 꺼냈다.

“역시 그렇군....”

원소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유비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유비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얘기를 이어나가지 않으며 차만 홀짝홀짝 마실 뿐이었다.

“음.... 단지 그 얘기를 전하러 왔는가? 백규의 말을 더 전할 것이 없나?”

답답한 원소가 먼저 물었다. 유비는 그런 원소의 질문에 태연하게 웃으며 오히려 되물었다.

“예. 원 자사님. 저는 공손 자사의 뜻을 다 전했습니다. 혹시 공손 자사께 더 전하실 말씀이라도....?”

유비가 얘기한 것은 휴전이다. 그런데 이의민을 상대하려면 휴전만으로 끝낼 것이 아니다. 본격적으로 동맹을 맺고 함께 이의민과 싸울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 그런데 유비는 휴전만 얘기하고 그 이후의 일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니 먼저 사자를 보낸 공손찬보다 원소가 더 답답한 상황이다.

물론 유비가 몰라서 얘기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알면서도 원소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원래 동맹이란 것도 아쉬운 사람이 먼저 요청하는 게 당연했다. 원소는 유비가 먼저 자신을 찾아온 것을 보며 기뻐했지만, 오히려 동맹 얘기는 자신이 꺼내야 될 상황이 됐다.

원소는 이 판국에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끝까지 동맹에 동자도 꺼내지 않고 먼저 유비의 입에서 그 얘기가 나오도록 유도했다.

“현덕. 자네도 서량 쪽의 소식을 듣고 온 거 아닌가? 이의민이 동탁까지 무너뜨렸다는 사실 말일세. 그걸 알고 자네가 내 쪽으로 온 게 아닌가?”

“예. 저도 공손 자사도 서량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손 자사께서도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준비? 어떤 걸 말하는 건가?”

“당연히 전쟁 준비를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의민이 서량까지 점령했으니 다음 차례는 원 자사나 공손 자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공손 자사께서도 대비를 하시는 것이지요.”

끝까지 유비의 입에서 원소가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답답한 원소가 먼저 동맹에 대한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다.

“이의민은 이미 황제를 손에 쥐고 낙양, 사례, 청주, 연주, 서주, 형주, 서량까지 장악했네. 그 거대한 세력을 손에 넣은 이의민을 대체 어찌 혼자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나와 백규가 손을 잡아야 막을 수 있네.”

원소가 먼저 얘기를 꺼냈지만 유비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결국 동맹을 맺자는 얘기군요. 허나 그건 제가 한참 전부터 원 자사께 말씀드렸던 얘기입니다. 그때는 그리 반대하시더니 전쟁에서 조금 불리해질 것 같으니 이리 나오시는 겁니까?”

“무슨 전쟁이 불리해진다는 말인가? 설마 내가 백규를 이기지 못할 것 같은가?!”

원소는 유비에게 완전히 말렸다. 주도권을 빼앗긴 채 얘기가 이어질 것 같으니 보다 못한 전풍이 나섰다.

“현덕. 서운한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오. 허나 지금 상황은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오. 이의민이라는 거대한 적을 앞두고 공손 자사는 주군의 힘이 필요하오. 반대로 주군 역시 공손 자사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오. 그러니 케케묵은 감정은 털어버리고 미래를 봐야하지 않겠소?”

전풍이 달래듯 말했지만, 유비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 자리에는 원소와 조조, 전풍, 저수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유비는 그들을 압도하며 분위기를 완전히 틀어쥐고 있었다.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이오. 허나 우리가 원 자사님을 어찌 믿겠습니다. 일전에도 동맹에 거의 동의를 하시고서는 갑자기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대체 어찌하면 내 말을 믿겠나?”

“동맹이 깨어진 원인을 아예 제거하신다면 혹시 모르지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봉기를 바라보는 유비. 이미 다 알고 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원소는 그런 유비를 보며 고심했다. 그러다가 과감하게 칼을 뽑았다. 그리고 혼비백산 하고 있는 봉기에게 다가갔다.

“주, 주군?! 어찌....?!”

“이 모든 것이 원도 자네 때문일세.”

슈걱!

“크아악!”

원소가 칼을 휘둘렀고 땅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봉기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목은 아니었다. 오른팔이었다.

원소는 봉기의 잘린 오른팔을 유비에게 내밀었다.

“분명히 말해두겠네. 봉기를 제외하고, 나를 포함한 여기 모든 이들이 동맹을 원했다네. 하지만 봉기가 너무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 붙여 어쩔 수 없이 백규와 전쟁을 치른 것이야. 자! 여기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봉기의 오른 팔일세. 원래라면 목을 쳐야 하지만 옛정을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 없었네. 봉기는 앞으로 내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고 근신하고 있으라!”

결정은 결국 자신이 한 것이면서 봉기에게 모든 화살을 돌리고 자신은 뒤로 쏙 빠지는 원소. 봉기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런 원소를 원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비도 원소가 원흉이라는 걸 잘 알지만 살짝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원소를 벌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원소는 유비의 눈치를 살피면서 추가적으로 조건을 더 내걸었다.

“물론 이걸로 그칠 생각은 아닐세. 우리가 잡고 있는 백규의 포로들을 모두 돌려주겠네. 그리고 이의민과 전쟁이 시작된 후 반년 간 들어가는 물자들, 군량과 병장기를 전부 지원해주겠네.”

그제야 유비는 완전히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좋습니다. 그 정도면 자사님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쓸모없는 팔은 그냥 개 먹이로 주시지요. 어디에 쓰겠습니까?”

유비는 징그러운 걸 본다는 듯 봉기의 잘린 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봉기가 망연자실하게 자신의 팔을 보고 있다는 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렇게 원소와 공손찬의 하북 동맹이 결성되었다.

목적을 이룬 원소는 유비를 성대하게 대접했다. 전쟁 중인 막사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상상이 안 될 만큼 산해진미가 식탁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자자. 방금 전까지 적이었지만 이제 우린 한 배를 탔네. 이제 한편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들게. 그런데 현덕. 설마 호위 군사 하나 없이 이리 왔는가?”

원소의 질문에 유비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호위 하나 없이 저 혼자 온 것입니다.”

“허허! 대단하군. 방금 전까진 우린 적이었지 않은가? 자넨 참으로 대단한 구석이 있군. 그러나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자넨 이제 우리 동맹의 큰 전력이니 무모한 짓하지 아니 했으면 좋겠네.”

“하하! 저는 이미 원 자사님과의 이리 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같은 편의 진영에 가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유비의 말에 원소는 절로 미소가 나왔다. 원소는 스스로 미소를 지으면서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서울 정도로 자신의 기분을 쉽게 바꾸는 인물인 것 같다. 더불어 유비에 대한 욕심이 났지만, 당장 드러내지는 않았다. 조조도 수차례 자신에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욕심을 가능한 숨기는 게 좋다고.

“그것도 그렇군! 자! 전쟁 이야기나 해보세. 놈이 서량까지 접수하고 지금쯤 방심하고 있을 테니 낙양을 치는 것은 어떻겠나?”

“아닙니다. 방심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불확실한 감정추측으로 대군을 움직이시면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낙양까지 대군을 이끌고 가는 동안 들키지 않을 리도 없고요.”

“음... 동맹까지 맺었는데 뭐라도 해야 되지 않겠나?”

“이의민의 약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세력이 커진 만큼 지켜야 할 땅도 많습니다. 우리는 힘을 한 점에 집중시켜 외곽부터 차근차근 갉아먹어야 합니다. 즉, 현재 이의민이 있는 낙양에서 가장 멀리 있고 우리와는 가장 가까운 청주가 첫 번째 목표입니다.”

유비의 말에 원소는 물론 그의 휘하 모사들까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따져 봐도 유비의 생각이 가장 현명해보였다.

지금 이의민의 본대와 정면으로 맞붙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그럼 이의민이 본대를 끌고 바로 우리 땅을 노리면 어찌 할 텐가?”

“원래 적의 땅을 치는 것이 자신의 땅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가 청주를 칠 때 전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남은 군사들로 이곳을 수비하면 됩니다. 더군다나 이의민이 우리를 치려면 황하를 넘어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청주 공략을 위한 회의가 이어졌다. 오랜 회의 끝에 원소와 공손찬은 각각 5만의 군사를 청주로 보낼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원소는 현재 15만, 공손찬은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의민에 비해 굉장히 무리한 징병이라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원소나 공손찬이나 그런 걸 신경 쓰는 인물은 아니다.

어쨌든 각각 5만씩 차출한다고 해도 둘이 합쳐 15만의 군사로 본거지를 수비할 수 있으니, 이의민을 상대로 병력이 크게 모자랄 일은 없을 터였다.

“흐흐! 그럼 이의민으로서는 청주를 지키기 위해 낙양의 본대를 보내기도 부담스럽겠군.”

“그렇습니다. 어쨌든 하북에 15만이라는 대군이 남아 있으니 낙양을 비우기도 힘들 겁니다. 자연스럽게 청주가 우리 손에 떨어진다는 얘기지요. 허나 비는 그것으로 그칠 생각은 없습니다. 이의민을 쓰러뜨리기 위해 계획하고 있는 함정이 하나 더 있지요.”

“그게 무엇인가?”

“이의민의 개인적인 약점을 공략할 것입니다.”

“뭐? 그런 게 있는가?”

“흐흐. 원 자사께서 보셔도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이 비는 오히려 왜 다들 그걸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대체 뭔가? 빨리 말해 보게.”

“이의민은 젊고 혈기 왕성한 사내입니다. 그런 그가 부와 명예를 얻은 지 오랜 기간이 지났습니다. 누가 뭐래도 중원의 일등신랑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아직 그는 짝이 없습니다.”

유비의 말에 모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영웅이면 호색이라 했는데, 그 누구보다 영웅다운 행보를 걷고 있는 이의민은 아직 아무런 염문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 첩을 들였다는 소식은커녕 혼사를 치렀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그래서 이 비가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곽봉이라는 사내와 남색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했습니다만....”

이 자리에 이의민이 있었다면, 유비의 머리통을 그대로 대부로 으깨버린 후 한 달에 한번 씩 무덤을 파헤쳐 해골을 잘근잘근 가루로 만들어 버렸으리라.

“여러 모로 알아본 결과 그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단지 원체 바쁘게 산 사람이다 보니 여인을 만날 틈이 아니 났던 것입니다.”

이쯤 되니 원소도 유비의 뜻을 알아챘다.

“미인계를 쓰자는 소리군.”

“후훗! 이미 눈여겨 봐 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 자사의 서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혹시 원술과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으십니까?”

원술의 이야기가 나오자 원소의 표정이 굳었다. 그도 하북에서 전쟁을 하지만 귀는 언제나 낙양 쪽을 향해 열어두고 있었다. 원술이 삼공이 되고 자신이 원가의 진정한 후계임을 증명했다고 떠벌리는 걸 모르지 않았다.

“설마 공로의 힘을 빌리자는 말인가? 그건 불가하네. 나 역시 탐탁지 않고 그 역시 내 말을 듣지 아니할 것이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죠.”

“그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야지....”

유비의 설득에 원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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