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대적을 위한 준비 (1)
전장을 빼곡히 매운 군사들과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로 천지가 울리고 있었다.
적을 죽고 죽이는 이곳은 하북이었다. 원소는 한복을 무찌르고 기주를 접수했고, 공손찬은 유우를 잡고 유주를 접수했다.
그리고는 원소는 스스로 기주 자사를 자처하고 공손찬 역시 스스로 유주 자사를 자처했다. 원래라면 자사 역시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지만 이들에게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한 지역의 패자가 된 원소와 공손찬이지만 둘 다 거기서 만족할 리 없다. 이제 하북 전체를 놓고 서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 둘이다.
높은 곳에서 전장을 바라보던 원소는 굉장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있던 한 인물을 채근하고 있었다.
“봉기. 자네가 했던 말과는 전쟁의 양상이 너무 달라지고 있네. 자네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원소의 채근을 받는 사내는 봉기였다. 그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간신히 답했다.
“그, 그것이.... 이것은 말도 아니 되는 일입니다. 지금 적군의 규모로 보면 주군께서 진작 승리하셨어야 합니다. 이건 주군께서도 인정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순전히 적군의 저 세 장수들 때문에 전쟁이 이리 지지부진하게....”
이리저리 변명을 늘어놓는 봉기. 간신히 화를 눌러 참고 있던 원소는 참지 못하고 크게 호통을 쳤다.
“갈! 지금 그것이 군사로서 할 말인가?! 적 전력을 가늠할 때 장수의 강함을 빼고 논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인가? 말을 해보게. 봉기. 자네가 생각해도 자네의 변명은 참으로 어처구니없지 않나?”
결국 봉기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순순히 원소의 말을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주군.”
그러면서도 봉기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전장 한 쪽을 바라보았다. 봉기의 시선은 적군인 공손찬 쪽 진영의 선두에 머물러 있었는데, 세 명의 장수가 아주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원소군을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말이 아니 되지 않은가. 공손찬 밑에서 저런 괴물들이 갑자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자그마치 셋이나 튀어나올 줄 그 누가 알 수 있었을까.... 셋 모두 마치 여포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그 중 하나는 시뻘건 얼굴에 허리까지 늘어지는 긴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우락부락한 얼굴에 고래수염을 가진 사내가 있었다. 외모만 보고도 알 수 있듯 두 사내는 바로 유비의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다.
그럼 그들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는 나머지 한 명은 대체 누굴까? 그는 바로 공손찬 휘하에서 중용 받지 못하고 있다가 유비 밑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중용되기 시작한 조운이었다.
이 셋의 존재로 인해 진작 끝났어야 할 전쟁이 팽팽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병력은 공손찬에 비해 원소 쪽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 관우와 장비, 조운은 그 차이를 셋이서 다 메워버리고 있었다.
원소가 그리도 자랑하던 상장 안량과 문추는 관우나 장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원 삼국지처럼 관우에게 끔살 당한 건 아니었지만, 몇 합 싸워보지도 못하고 굴욕적으로 달아나야 했다. 이후 고람이나 한복 밑에 있었던 장합 등이 다시 나섰지만, 이번에는 조운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장수전에서 그리 차이가 나니 그 휘하 군사들의 전투에도 고스란히 영향이 갔다. 원소의 병력은 더 많았지만 압도적으로 밀리는 일기토를 보며 다들 사기가 떨어졌다. 그러니 병력의 우위를 거의 살리지 못하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그래도 원소 측의 모사들, 전풍, 저수, 심배와 조조 휘하에 있는 순욱 등이 어느 정도 만회를 한 덕분에 이후부터는 제법 팽팽한 전투가 이어졌지만, 전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원소의 속은 쓰릴 수밖에 없다.
원소가 봉기를 나무라고 있을 때, 휘하 모사 중 하나인 저수가 슬쩍 다가왔다.
“주군. 일단 오늘은 군사를 물리시지요.”
원소는 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그럴 수밖에 없겠군. 군사들을 물려라!”
그렇게 오늘도 별다른 소득을 보지 못하고 퇴각하는 원소군. 상대인 공손찬군 역시 최근 팽팽한 분위기에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인지 그들 역시 군사를 물렸다.
원소는 씁쓸하게 퇴각하는 군사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저수에게 사과를 했다.
“저수. 자네에게 참으로 미안하네. 자네뿐만 아니지. 전풍과 심배에게도 미안할 따름이네.”
같은 모사인 봉기에게는 호통을 치며 나무랐던 원소가 저수, 전풍, 심배에게는 왜 사과를 한단 말인가?
저수는 주군인 원소의 사과에도 별 놀라움 없이 당연하다는 듯 사과를 받아들였다.
“후우!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막사로 돌아가 대책을 논하시지요.”
“그러세. 후우! 맹덕이 또 단단히 화가 나 있겠군. 그를 어찌 볼까....”
이번에는 또 조조에게 미안하다는 듯 얘기하는 원소다.
일전에 유비와 만났던 조조, 도대체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기에 현재 그가 원소 밑에 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됐든 현재 원소의 막사에 조조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원소가 막사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던 조조가 세상 냉랭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심지어는 원소가 왔는데도 인사조차 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원소는 그런 조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으음.... 회의를 시작하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원소가 어렵사리 말을 꺼내는데 갑자기 전령이 급보를 가지고 왔다.
“주군! 급보입니다! 이의민이... 이의민이....!”
“무엇이냐? 이의민이 또 뭐 어쨌다는 말이냐? 벼락 맞고 급사라도 했단 말이냐?”
“아, 아닙니다. 이의민은 동탁의 세력을 멸하고 장안과 서량까지 완전히 복속시켰다고 합니다. 원래 동탁과 동맹이었던 마등은 동탁을 배신하고 이의민 휘하로 들어가고, 강족 역시 이의민에게 복속되었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전령의 보고에 원소가 눈을 부릅떴다. 물론 이의민이 동탁에게 쉽게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이의민이 동탁을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무슨 말도 아니 되는 소리를....! 이의민이 진정 전장의 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전쟁을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동탁의 10만 병력이.... 그 악명 높은 서량 기병들이 이리 빨리 정리가 되었다는 말이냐?”
“트,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전령의 보고에 원소보다 더 기겁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원소 바로 옆에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는 봉기였다.
‘이게 정녕 꿈인가 생시인가....’
다른 이들도 전령의 보고를 듣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특히 봉기의 표정은 심각했다.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처럼 보였다.
아까 유독 봉기만 원소에게 질책을 받은 것도 그렇고, 지금도 왜 이런 것일까?
이유는 이의민이 장안으로 출정을 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때는 이의민이 아직 낙양에서 동탁과 결전을 준비할 때였다. 곧 이의민과 동탁이 본격적인 전쟁을 치를 것이라는 소식이 하북에도 전해졌다.
그전까지 원소와 공손찬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둘 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서로를 쳐서 하북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거대한 적인 이의민이 문제였다. 만약 둘이 싸우는 도중 이의민이 둘의 뒤를 친다면, 둘 다 속절없이 당할 터였다. 그만큼 이의민의 세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소나 공손찬이나 섣불리 서로를 치지 못하고 이의민이 있는 낙양 쪽을 주시하며 눈치만 보았다. 그때 동탁과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둘에게 기회였다. 이의민이 동탁과의 전쟁으로 당분간 하북을 신경 쓰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둘 다 하북을 완전히 차지할 야욕을 드러내려 하는데, 원소 휘하의 전풍과 저수, 심배 등은 공손찬을 공격하는 데 반대했다.
“주군. 지금 공손찬과 싸우시면 아니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의민의 세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동탁의 서량까지 흡수한다면 정말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공손찬과 힘을 합치고, 이의민이 동탁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낙양으로 진격함이 옳습니다.”
이들만 이런 얘기를 한 게 아니다. 현재 원소의 휘하로 들어온 조조, 그리고 순욱도 전풍, 저수, 심배와 한 목소리를 내며 공손찬과의 동맹을 강력히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 공손찬의 사자로 온 유비를 통해 공손찬 역시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음을 확인했다.
결국 원소도 당장의 욕심을 접고, 공손찬과 동맹을 맺으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하북의 두 거인이 서로 손을 잡기 직전이었다.
그때 원소의 꺼져가는 욕심에 불을 붙인 인물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봉기였다.
봉기는 원소와 가장 오래 붙어있던 오른팔이자 지기였다. 하지만 원소의 휘하에 전풍과 저수, 심배 등 뛰어난 인물들이 점점 늘어나며 봉기의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여기에 조조와 순욱까지 점점 원소의 눈에 들며 봉기는 설 자리를 잃었다. 이대로라면 원소 휘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도 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에 크게 위기의식을 느낀 봉기는 다른 이들과는 정반대로 공손찬과의 동맹대신 그와 전쟁을 주장했다.
시기심 때문에 시작한 주장이지만 그의 의견이 터무니없진 않았다.
“공손찬은 원래 유우보다 세력이 작았습니다. 덩치 작은 짐승이 큰 짐승을 상처 없이 사냥하는 것은 불가능한 법입니다. 즉 공손찬은 지금 만신창이일 것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공손찬을 더 쉽게 잡을 때는 영영 오지 아니 할 것입니다.”
“허나 이의민을 이대로 두는 것이 옳은 것인가?”
“걱정 마십시오. 이의민과 동탁의 전쟁은 절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동탁의 세력 역시 적지 않은데다가 여포까지 있습니다. 이의민의 세력이 크다고 해도 동탁이라는 거물을 잡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주군께서는 그 틈에 공손찬을 복속시키고 거대한 하북을 주군 휘하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후 동탁과의 전쟁으로 약해진 이의민을 친다면 천하가 주군의 손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당연히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조조에게 정저지와라는 모욕을 받으면서도 봉기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수의 이들이 봉기의 의견에 반대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군주인 원소의 결정이었다.
원소는 봉기의 달콤한 얘기에 다시 억눌렀던 욕심이 샘솟았다. 결국 욕심을 이기지 못한 원소는 봉기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양 측의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를 가장 오래 따른 봉기의 말을 듣도록 하겠다.”
그렇게 공손찬과의 동맹이 코앞에서 엎어지고, 하북 전쟁이 시작됐다. 하지만 봉기의 생각처럼 관우, 장비, 조운을 앞세운 공손찬은 만만찮은 적수가 아니었다.
결국 원소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봉기의 말을 들은 것이면서 결과가 지지부진하자 봉기 탓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들어온 보고로 인해 봉기의 판단이 완전히 틀린 것으로 확정됐다.
그러니 봉기는 얼굴을 들 수가 없는 상태다.
“하아! 내가 그때 자네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괜히 봉기의 말을 듣고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군.”
원소가 그리 한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아직 돌이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