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서량 접수 (3)
이의민과 그 군사들은 장안성 안에서 강족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축제를 즐기고 있다.
강족은 이의민에게 복속을 했지만, 이의민은 그들에게 강압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군사들도 강족들을 오랑캐로 대하는 것이 아닌 친구로 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친구처럼 여기며 같이 술판을 벌이고 있다.
이의민과 철리길은 그런 군사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둘 다 군사들의 모습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이다.
“승상. 나 철리길은 강족을 대표하여 한나라 승상께 맹세할 것이오. 앞으로 한나라가 우리 강족에게 지원을 요청한다면, 힘이 닿는 한 그것이 무엇이든 수용할 것이오. 군사든 물자든 그 어떤 것이든 말이오. 그리고 앞으로 절대 한나라의 땅을 무단으로 침범하지 아니 하겠소.”
“좋소. 우리 한나라 역시 마찬가지요. 강족이 요청을 한다면 언제든지 가능한 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이의민의 얘기에 철리길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승상에게 복종한다고 얘기한 건 자신이지만 어째 돌아오는 보상은 더 큰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족은 흉노와의 전쟁이 잦았다. 그런데 흉노와의 전쟁에서 한나라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큰 힘이 될 터였다. 물론 강족 역시 한나라에게 지원을 해주어야 된다는 사실은 같았지만, 서로 똑같이 지원을 한다면 대국에서 소국에게 지원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렇게 본다면 강족이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가 아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청할 것이 있소. 앞으로 서역에서 들어오는 모든 물품들의 거래를 우리 한나라 하고만 하는 거요.”
이의민의 조건은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철리길은 앞선 조건에서 너무 만족을 했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역과 교역을 하고 싶은 거요? 좋소. 그리 하겠소.”
하지만 이것 역시 한나라만 일방적으로 좋은 조건은 아니다.
“대신 우리는 동이에서 수입한 물건들을 강족과 독점적으로 거래하겠소.”
그런데 어째 철리길은 두 번째 조건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오오! 정말이오? 그렇다면 백제의 인삼도 당연히 포함하는 것이겠지? 흐흐! 앞으로 우리 강족 전사들이 잔병치레할 일은 없겠소.”
철리길도 백제 인삼의 효능을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철리길도 만족한 협상이 마무리됐다.
철리길과 얘기를 마치고 이의민은 바로 순유를 찾았다. 지금 이의민이 철리길과 나눈 얘기는 사실 순유로부터 조언 받은 것이었다.
처음 조언을 들을 때는 설명 듣기 귀찮아서 넘기긴 했지만, 막상 철리길과 협상을 하고 보니 궁금했다.
“공달. 자네 벌써 취하지는 않았겠지?”
“걱정 마십시오. 주군. 저는 항상 주군을 보필할 생각에 술을 마셔도 늘 조금만 마시지 않습니까? 제 정신은 항상 멀쩡합니다.”
“잘 됐군. 내 궁금한 것이 있는데.... 자네가 말한 대로 강족과의 협상을 마무리 했어. 자네 말대로 철리길은 아주 흔쾌히 모든 조건을 수락하더군.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아니해서 말이야. 어차피 강족은 내게 굴복했지 않나? 굳이 저들과 대등한 관계처럼 서로 지원을 약속하고, 교역을 약속할 필요가 있나?”
“강족들은 그들 특성상 왕이 언제 바뀔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은 철리길을 굴복시켰다고 해도 차후 다른 왕이 나온다면 바로 반기를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적당히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척하는 것이 더 오랫동안 강족들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건 대등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대등한 것이지 않나?”
이의민의 질문에 순유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이의민은 순유의 뜻을 눈치 챘다.
“설마 강족과 흉노를 사이에 두고 적당히 줄다리기를 하겠다는 건가?”
“맞습니다. 이제는 딱히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바로 아시는 군요. 강족이나 흉노족이나 이제 한나라를 침략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 겁니다. 최소 몇 년... 아니. 몇 십 년간 말입니다. 그러면 강족이든 흉노족이든 둘 다 한나라에 대한 의존도 역시 높아질 것입니다.”
이제야 이의민은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어쨌든 철리길과는 서로 우정을 다졌다. 하지만 순유의 생각대로라면 실질적으로는 철리길만 우정을 다진 셈이고, 이의민은 철리길을 이용해먹으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쳇! 마음에 아니 드는군. 철리길은 내게 진심을 다했는데 말이야....”
“철리길이 개인적으로는 멋진 사람이고 왕으로서도 자질이 충분한 인물이라는 것을 저도 압니다. 허나 지금 주군께서 하신 일은 개인 간 친분을 다지는 일이 아니라 국가 간의 손익을 따지는 일입니다. 호의로 모든 일을 처리하셔서는 아니 되는 법입니다.”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씁쓸하구먼....”
이의민도 순유의 말이 맞는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다른 이도 아니고 순수하기 그지없는 철리길이라 유난히 씁쓸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두 번째 조건은 왜 건 거지? 번거롭게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서역과 동이,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다른 민족들까지 직접적으로 거래를 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서로 거래를 하고 싶으면 반드시 우리를 거쳐야하게끔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 중계무역을 말하는 거군.”
이번에도 단번에 알아들었다. 특히 고려인이었던 이의민은 중계무역에 대한 것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도 고려 시절 서역에서 넘어오는 수많은 물건들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 당시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송나라가 중계무역으로 중간에서 막대한 이득을 남겨먹는 걸 보고 상당히 배가 아팠던 이의민이었다.
“잘 알았어. 궁금증이 풀렸으니 이제 나도 제대로 먹고 마셔야 되겠군.”
이제 모든 궁금증이 풀린 이의민이 마음껏 술을 마시고 놀려는데, 이번에는 순유가 이의민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이다.
“주군.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 에잉! 또 술 마시기는 글렀나? 자네가 이리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부르는 건 분명 간단히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소린데.... 일단 말해봐.”
“송구합니다. 주군 허나 느긋하게 처리할 일들이 아니라, 어서 결정을 내리셔야 될 일들입니다. 아직 원소와 공손찬, 손견, 그리고 익주의 유언에 대한 공식적인 처분이 신속히 내려져야 합니다. 어쨌든 원소와 공손찬, 손견은 표면적으로는 역적 하진과 동맹을 했던 제후들입니다. 그들 역시 역적으로 천명하고 토벌대를 보낼 것이라 만천하에 공표하셔야 합니다.”
“그래. 그럼 낙양으로 돌아가는 즉시 또 그놈들을 정벌할 준비를 하면 되겠군. 한데 그럼 익주는?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놈들부터 정리하는 게 좋지 않나?”
“아니 그래도 익주 때문에 지금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도 역적 하진과 동맹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허나 지금 주군의 부름에도 전혀 응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유언은 다른 제후들은 물론이고 황실에도 간섭받지 않는, 완전히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려는 모양새입니다. 결국 주군께서는 그들도 치셔야 합니다.”
“그래. 그러니까 지금 당장 쳐들어가면 되지 않느냐고.”
“허나 딱히 명분이 없습니다. 하진과 손잡지도 않았으니 역적으로 몰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승상의 부름에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거 가지고 역적 취급을 할 수도 없습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서량과 장안 쪽에서부터 서서히 익주 지역을 압박해 들어가면서 그들의 영토를 잠식하는 것입니다.”
“흠! 그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나?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닌데....”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주군께서 굳이 이곳에 계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고순 장군을 이곳에 남기시어 마등과 함께 익주 정벌을 명하십시오. 그리고 어제 보니 가후라는 자의 재주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를 중용하시고 고순을 돕게 하시면 쉽게 익주를 평정하실 수 있습니다.”
“좋군. 그럼 난 여긴 신경을 쓰지 아니 해도 된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지루한 전쟁에는 없어도 된다는 말에 이의민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고순을 부르는 이의민.
“주군. 부르셨습니까?”
“그래. 고순. 홍농에서의 활약상은 들었어. 그 공을 높이 사서 자네에게 중한 일을 좀 맡겨볼까 하는데 할 수 있겠나?”
그 자리에서 철퍼덕 주저앉으며 무릎을 꿇는 고순.
“하찮은 공을 크게 인정해주시니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주군. 불 속이라도 뛰어 들어가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듣지도 않고 무조건 명을 수행하려는 고순. 확실히 듬직한 모습이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악진을 불러 줄 테니 여기 남아서 마등이랑 같이 익주를 한번 점령해 봐. 자세한 건 공달에게 듣고.”
“헉! 소, 소장을 익주점령 사령관으로 임명하신다는....?”
“왜? 마음에 아니 드나? 낙양에 가고 싶어? 그러면 다른 놈을....”
“아, 아닙니다! 소장! 감격스러워 그럽니다. 주군의 은혜가 실로 각골난망하여....”
“아! 됐어! 무슨 미사여구는 집어치우고.... 어쨌든 자네가 좋다니 이대로 가면 되겠군. 어쨌든 자네도 이제부터 한 지역을 맡게 되고, 더군다나 마등도 우장군이니 관직은 맞춰줘야겠지? 이제 자네가 좌장군 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사방장군 중 하나인 좌장군의 임명이 이뤄졌다. 그래도 고순은 여전히 감격스럽다.
“소장! 반드시 익주를 점령해서 주군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이어 또 한명의 사내가 이의민과 고순 앞으로 불려왔다. 가후였다.
“아! 그리고 인사해. 자네가 가후라고 했지?”
“예. 승상. 아니. 주군.”
이미 이의민은 처음 볼 때부터 주인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은 가후다.
“흐흐. 서량 쪽 인물들은 다 이런가? 대체적으로 시원시원해서 좋군. 아무튼 고순. 지모가 필요할 때는 여기 가후의 도움을 받아. 공달의 말로는 자신과 비교해도 절대 모자란 인물이 아니라더군. 아마 큰 도움이 될 거야.”
“감사합니다. 반갑소. 가후 군사.”
“잘 부탁드립니다. 고순 장군.”
그렇게 고순과 가후가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또 이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에는 이의민이 부르지도 않은 인물들이다. 황보숭과 사마방이었다.
“사마 가주? 어쩐 일이시오?”
이의민의 질문에 사마방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
“장안을 찾아주겠단 약속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승상.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 저도 승상을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
천하이대세가인 사마가까지 이의민의 휘하가 됐다.
“고맙군. 아! 이제 편하게 말해도 되지?”
“하하! 물론입니다. 주군.”
다음은 황보숭 차례였다. 황보숭도 역시 이의민 앞에 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말투도 달라졌다. 이것만으로 일전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됐다.
“결정을 내리셨소? 황보 장군?”
“보잘 것 없는 이 몸을 그리 높게 쳐주어 감사합니다. 승상. 이제부턴 한나라가 아닌 이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살고자 합니다. 이 늙은이를 받아주시오. 승상.”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감사합니다. 주군.”
황군의 오랜 터줏대감이었던 황보숭까지 이의민의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