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마중적토 (2)
호진은 자신들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 나오는 이의민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동탁 앞에서는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막상 이의민을 눈앞에서 보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놈이 바로 그 소문의 이의민인가.... 과연 듣던 대로 무식하게도 생겼군. 여포 놈이 패했다는 게 이해가 되는군.”
호진은 이의민을 보며 살짝 겁을 먹었지만, 이내 곧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그는 이의민과 일기토를 하러 나온 건 아니지 않은가. 뒤에서 서량 기병들을 통솔하며 이의민을 상대하는 것이다. 아무리 이의민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4만의 서량 기병을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네 이놈! 이의민! 고작 여포 하나 이겼다고 이리 기고만장하는 것이냐?! 이쪽에 여포 말고 진정 사람이 없는 줄 알았더냐? 그렇다면 네놈은 큰 착각을 한 것이다! 우리 군의 진정한 힘을 이제 보여주도록 하겠다!”
호진은 자신의 두려움을 모두 날려버리겠다는 듯 일부러 더 크게 호통을 쳤다.
그때 호진의 눈으로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당장이라도 서량 기병들 사이로 뛰어들 것 같던 이의민이 갑자기 멈춘 것이었다.
호진은 그런 이의민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의민 역시 서량 기병을 보고 겁을 먹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저리 말을 멈출 이유가 없다.
“흐흐흐! 역시 네놈도 사람이었구나. 아무리 너라도 혼자서 우리 서량 기병들 사이로 뛰어드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겠지. 그렇다고 군사들과 함께 싸운다면 서량 기병들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천만에!”
호진의 외침에 이의민은 귀찮다는 듯 심드렁히 대꾸했다.
“아! 거참 더럽게 시끄럽네. 하여간 이 새끼들은 예의란 게 없어. 이 몸은 조금 바쁘니 이따 말을 걸든가 말든가 하도록....”
“뭐, 뭐....?”
그런데 이의민이 서량 기병 때문에 위축됐다고 하기에는 뭔가 반응이 이상했다. 서량 기병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갑자기 적토마를 향해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호진이 보기에는 영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저, 저거.... 그냥 미친놈 아닌가?”
호진은 더 이상 이의민에게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서량 기병들에게 명을 내렸다.
“크흐흐! 미쳤던 말든 사정 봐줄 필요는 없겠지. 전군! 돌격하라! 서량 기병의 무서움을 제대로 보여줘라!”
“와아아아!!”
환호성을 지르며 돌격하려는 서량 기병. 그런데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전장을 울리는 환호를 지르면서 기세를 올린 서량 기병들은 정작 돌격하지는 않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뭐, 뭐하는 거냐?! 돌격하라니까!”
당황해서 그들을 다그치는 호진. 군사들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자, 장군! 이상합니다.”
“마, 말들이....”
가만히 보니 군사들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군사들은 돌격하려고 고삐를 당기는데 말들이 거부하고 있었다.
“히히히힝!”
“히히힝!”
군사들의 명령을 거부하는 듯한 말들의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퍼졌다.
여태껏 서량 기병들이 명성이 자자했던 건 말에 탄 군사들의 전투력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들이 대부분 다른 말보다 훨씬 뛰어난 서량 명마에 타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그런 명마들을 마치 자신의 몸의 일부처럼 다룰 수 있었으니, 다른 기병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자신의 몸이 아니라 처음 말을 다루는 기병 훈련병 같은 모습이다. 아니. 그것보다 못하다. 그 어떤 명을 내려도 말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군사들 입장에서는 황당할 노릇이다. 여태껏 고삐 하나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던 말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고삐에 갈기를 아무리 잡아 당겨도 말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말들을 다뤄왔던 그들이 단 한번도 겪지도 듣지도 못한 일이다.
“이, 이놈아! 왜 이러는....?”
“자네 말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가? 여태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전혀 움직이지 않는 서량 기병들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는 그림자가 하나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두 그림자다. 바로 적토마와 그 위에 탄 이의민의 그림자였다.
적토마는 천천히 걸어오면서 서량 기병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의민이 군대를 향해 돌진할 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사실 이의민도 영문을 몰라 하고 있다. 이렇게 천천히 서량 기병들 사이로 들어가는 건 그의 의지가 아니라 오직 적토마의 의지였다. 물론 이의민도 적토마가 뭘 하려는 것 같으니 일부러 다른 명을 내리지 않았기도 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 거냐? 그래. 적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적토마는 움직이지 않는 서량 기병들 사이로 들어가서 크게 포효했다.
“히히히히힝!!”
말이 아닌 범의 울음소리 같다.
적토마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진 직후 고삐를 아무리 잡아당겨도 움직이지 않던 서량마들이 일제히 울었다.
“히히히힝!”
“히히힝!”
그냥 우는 것도 아니고 앞발을 크게 들면서 자신들의 등에 타고 있는 서량 군사들을 떨어뜨렸다.
“으아악!!”
“이 미친 말이....?! 갑자기 왜 이래?!”
그제야 이의민도 적토마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적토마와 서량마들은 마치 장군과 군사들의 모습 같다. 적토마의 명을 서량마들이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말 중의 왕이 적토마라는 얘기가 그냥 비유가 아니라 정말 그 뜻 그대로였다. 서량마들의 왕으로 군림해온 적토마는 지금 자신이 다스려왔던 말들에게 마음껏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감히 네놈들 따위가 내 앞길을 막는 것이냐?!’
이의민은 크게 웃었다.
“크하핫! 적토. 이 말들이 전부 네 졸들이라는 거지? 그래. 내 말이라면 과연 이래야지.”
악명 높은 서량 기병들을 직접 상대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대신 적토마가 어떤 말인지 제대로 확인했으니 만족스럽기 그지없다.
서량 군사들은 어떻게든 다시 말 등에 올라타려 안간힘을 썼지만, 오히려 뒷발에 채여 나가떨어지는 경우만 늘었다.
이의민은 굳이 자신이 직접 싸울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이의민의 군사들은 말도 타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서량 기병들, 아니. 서량 오합지졸들을 덮쳤다.
그동안 자신들의 다리가 되어주었던 말들에게 거부당하는 그들은 더 이상 서량 기병이 아니다. 말이 없는 보병 전투는 경험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 그들은 갓 들어온 신병이나 다름없는 허접한 병사일 뿐이다.
당연히 일방적인 전투, 아니. 학살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서량 기병들은 어떻게든 말을 타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번번이 거부당하다가 이의민군에게 쓰러졌다.
순유는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서량 기병들을 상대로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피해를 각오했다. 그만큼 서량 기병들은 만만찮은 군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투가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진행되고 나니 그간 했었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허! 내가 지금까지 주군을 따라다니면서 별에 별 광경을 다 봤지만, 설마하니 말들이 싸움을 거부하는 꼴을 볼 줄은 몰랐군. 주군께서는 하도 기상천외한 광경을 많이 보여주셔서 그러려니 하지만, 주군의 말도 그럴 줄은....”
순유는 이제 자신이 도울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말이 없는 상대는 싸울 의지도 거의 보이지 못하고 있다.
서량 기병만 믿고 있던 호진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심지어는 퇴각 명령을 내리지도 않고 말이다.
“으헉! 어찌 이런 일이....!”
이대로 돌아가 봐야 동탁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호진은 그런 것도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눈앞의 적 이의민에게 극한의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호진이 탄 말 역시 적토마의 명에 따르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꼴사납게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 동관으로 도망치는 호진.
그렇게 도망치는 호진 앞을 누군가가 막았다. 호진은 순간 자신 앞에 타오르는 불덩이가 나타났다고 착각하고 앞을 보았다.
“뭐, 뭐야?!”
바로 불덩이처럼 시뻘건 적토마였다.
적토마에 탄 이의민이 호진을 비웃었다.
“군사들을 이끌어 피해를 최소화해도 모자랄 판에 혼자 살겠다고 군사를 미끼로 쓰느냐? 한심한 놈. 여포도 한심하기 그지없었지만, 네놈 역시 그리 다를 바는 없구나.”
“스, 승상. 제발 살려주시오.”
호진의 다급한 외침에도 이의민은 망설임 없이 대부를 휘둘렀다. 단번에 호진의 머리가 으깨졌다.
그런 이의민 옆으로 서황이 다가와 보고했다.
“주군. 대승입니다.”
하지만 이의민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쉴 틈이 없다. 바로 동관을 함락시켜라. 그리고 곽 형은 버려진 말들을 수습하시오.”
“알겠다. 맡겨만 주라고.”
**
동탁 역시 동관 위에서 이 어이없는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말들이 움직이지 않아서 그대로 학살당하는 꼴을 보며 기가 막힌 동탁.
“이,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4만의 군사들이 단번에 증발을 한 셈이다. 이제 동탁에게 남은 군사들은 기껏해야 1만 정도밖에 안 됐다. 동관에서 수성을 한다고 해도 결코 버틸 수 없는 병력이었다.
이유는 그걸 알고 재빨리 동탁에게 조언했다.
“주군. 여기서는 더 싸울 수 없습니다. 동관을 버리고 장안으로 후퇴해야 합니다.”
동탁의 분노는 극에 달했지만, 그렇다고 1만 군사를 가지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동탁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크으윽! 장안으로 후퇴한다!”
동탁이 믿고 있던 여포가 죽었고, 서량 기병들도 무참히 박살났다. 이제 그가 믿을 거라고는 마등이 데려온다는 강족 뿐이었다.
1만이 채 안 되는 병력을 끌고 초라하게 장안으로 복귀한 동탁. 그런데 장안성 내부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뭔가 평소와는 다르게 북적북적한 느낌이 있다. 물론 장안의 인구가 많긴 했지만 최근 전쟁 분위기로 밖을 돌아다니는 백성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지났다고 성 내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 평범한 백성들 같지 않았다. 복장들이나 생김새가 아무리 봐도 한족이 아니었다.
“설마 강족들인가? 마등! 마등!”
급히 마등을 부른 동탁.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강족들이 벌써 장안에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동 장군께서 분부하신 직후 최대한 빨리 오라 일렀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시간상 벌써 이리 도착할 수가....”
동탁은 여러모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 오래 생각하지 못했다.
강족의 수장인 철리길과 인사를 나누는 동탁.
“오! 철리길. 이리 와주어 고맙소.”
“후후! 어서 오시오. 동 장군. 그간 고초가 얼마나 많았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그대들 밖에 없소. 그대들이 이의민을 잡아준다면 내 그대들이 다시는 오랑캐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해주겠소.”
동탁은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철리길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철리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제안을 거절했다.
“흐흐흐. 아무래도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소.”
“뭐? 어째서....?”
이때 아까부터 불안한 표정을 짓던 이유가 외쳤다.
“주군 피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함정....! 크악!!”
철리길 옆에 있는 아단의 창이 이유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제야 함정임을 깨달은 동탁.
“이, 이놈들...!”
하지만 동탁이라고 지치고 넝마덩이가 된 군사 1만으로 강족을 상대할 방법이 있을 리 없다. 결국 동탁 역시 월길의 대도에 관통당하고 쓰러졌다.
공포의 군주로 서량을 양분했던, 원 삼국지에서는 한나라 최고 권력을 차지했던 동탁은 그리 허무한 최후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