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이제 이 말은 제겁니다 (1)
서신을 쓴 자가 마등이라는 이의민이 말에 서황은 영문을 몰라 하며 물었다. 마등이 지금 동탁과 같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여태껏 그 어떤 전투에서도 전면에 등장한 적이 없다가 갑자기 이의민에게 서신을 보내니 너무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군. 마등이 갑자기 왜 서신을 보낸 것입니까?”
“공명. 자네가 한번 봐.”
이의민은 서황에게 서신을 넘겨주었다. 읽어 내려가던 서황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명예를 찾아주면 목숨을 바치겠다라.... 대체 무슨 명예를 말하는 걸까요?”
“자네도 모르겠나? 나도 마등이 뭔 말을 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군. 제 놈의 명예를 내가 대체 어찌 찾아준다는 말인지....”
서신의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라서 그런지 이의민과 서황은 둘 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다. 때마침 곽가가 둘을 찾았다.
“헉! 헉! 아이고! 주군! 서 장군! 이쪽 성벽에 무슨 변고가 있습니까?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헉! 헉! 달려왔습니다.”
숨이 거의 넘어가기 직전까지 헐떡이는 걸 보니 급하게 뛰어왔나 보다. 그래도 한창 몸이 좋지 않을 때에 비하면 곽가의 건강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 그때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었는데 말이다.
“봉효? 그거 뛰고 그리 숨 차 하나? 그러게 평소에 단련을 좀 하지. 아무튼 별 일은 없고, 마등이 내게 서신 하나를 보내왔어. 그런데 내용이 좀 이상해.”
이의민은 곽가에게도 서신을 보여주었다. 곽가는 이의민이나 서황과 달리 서신의 숨은 뜻을 대번에 알아챘다.
“아! 이건 마등이 반란군 신분에서 사면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같습니다. 동탁과 손을 잡은 이유도 아마 이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곽가의 명쾌한 설명에 이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새끼들이 그냥 쉽게 말하면 되지. 대가리에 먹물 좀 먹었다 하면 그놈의 비유인지 나발인지를 써 대서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아무튼 마등은 처음에 동탁에게 붙어 사면을 받으려 했다가 내가 이길 것 같으니 내 쪽에 붙겠다는 것 아닌가? 박쥐같은 놈일세.”
“그래도 거짓말을 하거나 우릴 속일 속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곽가의 말대로 서신의 내용 중 동탁의 계획을 밝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민가에 화계를 시도하려는 내용 말이다. 첩자들에게 들었던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어쨌든 나한테 붙으려는 마음은 확실하다는 거지? 그렇다면 그리 빡빡하게 굴 필요는 없지.”
이의민은 마등이 진심이라면 너그럽게 그의 요청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사실 마등보다는 그의 아들인 마초 때문이었다.
이의민은 서신을 쓴 자는 마등이지만 화살을 쏜 자는 마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의 얘기라면 홍농성 근처에 와서 화살을 쏜 자가 없다고 한다. 그럼 엄청 멀리서 쐈다는 얘기인데, 그런 게 가능한 능력자는 여포 정도는 돼야 했다. 그런데 여포가 이 화살을 쏠리는 없으니 당연히 소문의 마초 밖에 없었다.
‘성벽위의 군사들의 시야에도 아니 보일 거리에서 쐈다라.... 일반적인 화살 사정거리에 거의 세 배에 달하는 거리일 텐데.... 재미있군. 마초 그놈을 실제로 보고 싶어 미치겠군.’
마초 역시 여포 수준의 인물이라면,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이의민의 흥미를 끌 수 있었다.
이의민이 마초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북소리와 함께 진동이 들려오고 있었다. 대군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이의민은 익히 예상했다는 듯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흐흐. 그래. 연기를 봤으니 이제 슬슬 들어와야겠지? 전군에 명을 하달해라.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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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은 홍농성 위로 솟구치는 연기를 봤다. 동탁은 이유의 계책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때가 되었다. 문우. 끌끌. 역시 이의민 그놈, 꼴에 자기가 한 말은 지킨답시고 첩자들은 건드리지도 못한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흐흐. 아마 지금쯤 민가에 난 불을 끈다고 난리도 아닐 겁니다.”
이래도 이득, 저래도 이득인 계획을 세웠지만 동탁은 내심 이의민이 화계에 걸리길 바랐다. 화계에 걸리지 않는다면 이의민의 평판이 떨어질 테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군사적으로는 피해가 없기 때문이다.
동탁은 얼른 이의민을 박살내고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자신의 손아귀 안에 넣고 싶었다.
“자! 전군 출격 준비를 하라 일러라. 봉선. 너도 준비가 됐느냐?”
여포 역시 출격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됐습니다. 아버지. 오늘이야말로 이의민 그놈의 목을 반드시 베어 올 것입니다.”
“믿는다. 아들아.”
여포는 방천화극을 든 채 붉은 적토마를 타고 전장으로 나아갔다. 홍농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마치 불꽃이 튀는 듯 이글이글 거렸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그는 군사들보다 선두에 서지 않았다. 항상 그 누구보다 먼저 선두에 섰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인 모습이다.
다름 아닌 동탁의 명 때문이었다. 동탁은 여포에게 이의민과는 최고의 상태로 붙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여포도 평소라면 그런 부탁을 무시하고 무조건 선두에 섰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의민을 상대로는 조금의 허점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여포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다른 때와는 달리 순순히 명을 들었다.
동탁은 모처럼 여포가 자신의 명을 잘 들어주는 것에 만족한 미소를 짓고 나머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이번 전투에 나설 동탁의 상장은 그간 전투에 참여한 적이 없던 화웅이었다. 화웅은 현재 동탁군 내에서 무력으로 여포 다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화웅! 지금부터 반 시진을 주겠다. 그 안에 반드시 저 홍농성의 성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리하지 못하면 네놈의 목부터 베겠다.”
“옛! 주군! 맡겨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성문을 열어 여 공자를 안으로 들여보내겠습니다.”
여포 대신 화웅이 선두에 선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여포는 성벽을 넘고 성문을 여는데 힘을 소모하지 않는다. 그 일은 화웅과 나머지 군사들이 전담한다. 여포는 오로지 이의민을 상대하는 데만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전군! 돌격하라!”
9척이 넘는 훤칠한 신장을 가진 화웅이 군사들을 호령하며 나섰다. 정말 호랑이 몸통에 이리의 허리, 머리는 표범에 원숭이 팔을 가진 괴물 같은 장수다. 거기에 웬만한 장정의 키보다 더 큰 장창을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겉모습만 보자면 여포와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 맹장 중의 맹장이다.
그런 화웅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포권을 하고는 홍농성을 향해 달려갔다.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무위에 대한 자신감도 있지만, 그도 현재 홍농성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웅은 직접 사다리를 성벽에 댔다. 성벽에 도달하기 전 제법 화살이 날아왔지만 화웅에게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흐흐! 화살의 수를 보니 아무래도 성벽 위의 군사를 많이 뺐나보군.”
웬만한 화살 정도는 눈 감고도 창으로 튕겨낼 수 있는 실력을 지녔거니와, 계획대로 적들의 수가 많이 줄어서인지 날아오는 화살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성벽 가까이 가서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장수들은 다 어디 갔는지 웬 새파란 젊은 문사 하나만이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흐흐! 반시진도 아니고, 한식경이면 끝나겠군.”
화웅은 자신이 걸친 사다리에 그대로 올라탔다. 원숭이처럼 빠르게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바로 옆의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뭐, 뭐야?!”
성문을 열기 위해 성벽을 타고 있는데, 성문이 열리고 있다. 한마디로 화웅은 지금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화웅은 순간 이대로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가야 하나 아니면 내려와서 그냥 성문으로 들어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사다리에 걸쳐있을 무렵 열린 성문으로 군사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화웅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빌어먹을! 이 무슨 뻘짓을 한 것인지.... 성내에 있던 첩자들이 성문까지 열었나보군.”
화웅은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때 성문을 나온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바로 이의민이었다.
이의민도 화웅도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화웅은 이의민을 알아보고 사다리에서 멋지게 뛰어내리려 자세를 잡았다. 이의민을 만나면 해보고 싶었던 멋들어진 대사도 내뱉으며 말이다.
“이의민! 네놈이 아직 하늘 위에 하늘이....”
이의민은 그런 화웅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더니 대부를 휘둘렀다.
“뭐야? 이 새끼는?”
그리고 아직 사다리에 붙어 있는 화웅을 사다리 채로 두 동강 내버렸다. 그리고는 덤덤한 표정으로 뒤에 있는 군사들에게 외쳤다.
“자 벽에 붙은 놈들은 신경 쓸 거 없다. 앞만 보고 모두 돌격한다!”
홍농성 성문을 통해 우르르 빠져나오는 이의민군.
갑자기 성문이 열리고, 화웅은 순식간에 죽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화웅을 따라왔던 동탁군은 우왕좌왕했다.
성문을 열고 나온 이의민군에게 동탁군의 선두는 별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동탁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홍농성 성문을 쳐다보며 외쳤다.
“문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그것이....”
평소라면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이유도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예상 밖의 일이다. 이유가 보기에는 이의민이 성내에 난 불을 무시한 채 성문을 열고 나오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인 병법으로 보자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뒤에는 불타는 성을 두고, 앞쪽에 있는 자신들보다 더 많은 대군을 향해 돌진한다. 이건 그냥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는 자포자기의 군 운용이다.
‘이의민이 이런 말도 아니 되는 짓을 벌인단 말인가? 이의민 혼자라면 이해하겠지만, 순유나 곽가가 있는데도 이런다고....?’
이유는 당황했지만 곧 이의민을 비웃었다.
“주군. 걱정 마십시오. 저건 바둑에서 돌을 던지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어쨌든 상대는 자포자기 하며 죽으러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초반에는 워낙 예상치 못한 공격에 피해를 입었지만, 곧 이의민군을 무찌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이유의 표정도 굳었다.
홍농성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이란 것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다 태우기 전까지는 계속 주변으로 번지며 커져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이미 불길은 잡혀가고 있는 것 같았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이의민의 자포자기 공격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셈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상대가 돌을 던지고 있다면서?!”
“그, 그것이....”
또 말을 더듬는 이유. 동탁과 이유가 당황하는 중에도 이의민의 대부는 멈추지 않았다.
“마, 막아라! 크악!!”
“장군!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서영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의민만 문제가 아니다.
이의민은커녕 그를 따라 나온 장수들도 막기 버거웠다. 이제는 익숙한 서황, 장료, 고순과 태사자, 황충, 여기에 처음 보는 장수들까지 하나하나가 일당백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허허! 장군. 지금 다른 쪽을 신경 쓰실 여유가 없으실 텐데....?”
황충은 서영을 발견하고 곧장 말을 몰아 그 앞에 섰다.
서영은 잔뜩 긴장하고 황충과 무기를 교환했다. 일전에 황충이 여포의 방천화극을 막는 걸 본 서영은 상대가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다.
황충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시종일관 밀렸다.
“서 장군! 내가 돕겠소!”
곽사가 그런 서영을 돕기 위해 움직였지만 곧 멈춰야만 했다.
“어딜 가느냐? 이 믿음이 부족한 놈아.”
어느새 관해가 그를 막았다.
결국 도움을 받지 못한 서영은 황충의 대도에 목이 달아났다.
서영뿐만이 아니다. 많은 동탁군 장수들이 이의민군 장수들을 상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동탁군에게도 희망이 없지 않았다. 어쩌면 누구보다 이 순간을 기다렸을 인물의 사자후가 퍼졌다.
“이의민!!”
주변에 이의민군이 있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이의민만을 보고 적토마를 몰고 달려오는 여포.
“뭐냐? 또 네놈이냐? 이제는 좀 지겹군.”
말과는 달리 여포를 보는 이의민의 눈빛이 빛났다. 정확하게는 여포보다 그가 탄 적토마를 보고 눈을 빛내는 중이다.
‘오호라! 저것이 그 유명한 적토마인가? 이름답게 시뻘건 것이 참 마음에 드는 군.’
“이번에야 말로 네놈을 짓이겨놓겠다.”
“쯧쯧! 도대체 그 소리만 몇 번짼지. 이제 귀찮아서 세지도 못하겠다. 하긴 이제 셀 필요도 없지. 곧 뒤질 테니까.”
이의민의 대부와 여포의 방천화극이 부딪혔다.
콰쾅!!
이제는 정말 핑계 댈 것도 없는, 둘 다 최상의 상태에서의 일대일 일기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