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이유의 계략 (4)
모두가 자고 있을 어두운 밤, 홍농성 안에서는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최대한 소리를 죽여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바퀴벌레와도 같아 보이는 그들의 움직임이다. 그들은 다수가 움직이는데도 철저히 소수로 접선을 하며 은밀히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마치 약을 먹은 바퀴벌레가 다른 바퀴벌레에게 약 기운을 퍼뜨리듯 한가지 얘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그 시작은 역시 곽봉이 머문 집에서 나온 집주인 명재로부터 퍼진 얘기였다.
“형님! 석재 형님! 큰일 났소.”
“명재? 갑자기 무슨 일인데, 날 이리 찾아왔느냐? 우리가 서로 만나는 걸 사람들 눈에 띄어 좋을 거 없다 하지 않았더냐. 잘못해서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미 들킨 것 같으니 상관없소.”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명재의 말에 충격을 받은 석재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미 들켰다면 자신들이 어찌 이리 멀쩡하게 홍농성 안에서 돌아다닐 수 있단 말인가?
이어서 명재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석재는 그걸 듣고 더 경악했다.
“뭣이?! 우리 진에도 적들의 첩자가 있다고? 그게 정녕 사실이냐?”
“틀림없는 사실이오. 적들의 말대로라면 다음 전투에서 우리 군이 이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마 죽은 목숨일거요.”
인재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홍농성에 잠입할 때부터 어느 정도는 각오를 했었지만, 막상 자신들의 존재가 들켰다는 얘기를 들으니 심장이 벌렁벌렁해지면서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명재의 말을 듣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석재. 임무를 완수해도 죽음이 거의 확실하다는 얘기에 고민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오랜 고민 끝에 석재의 입이 열렸다.
“명재.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자. 난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동 장군이 명하신 임무를 완수할 것이야.”
석재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단순 첩자에 불과한 그가 이렇게까지 충성심 높은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이유가 뭘까?
보통 말단 병사들도 자신이 속한 군대의 승리를 바라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군대를 이끄는 자들보다는 동기가 약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인 말단 병사들과 주도적으로 군사들을 움직여서 전쟁의 큰 그림을 그리는 지휘자, 둘이 가진 마음가짐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홍농성에 들어와 있는 석재는 마치 자신이 곧 동탁인 것처럼 진심으로 동탁군의 승리를 바라고 있었다. 이건 석재뿐만 아니다. 석재를 따르고 있는 대다수의 첩자들이 다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동탁이 이의민 못지않게 말단 군사들까지 잘 이끌어줘서일까?
‘동 장군께서는 이번 일이 성공하면 막대한 금은보화를 약속했다. 설사 우리 중 잘못 된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가족에게 그 몫이 온전히 돌아 갈 거라 했지...’
동탁은 홍농으로 침투한 첩자들에게 평범한 백성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보상을 약속했다. 만약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간다면 평생 놀고먹을 돈을 받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모든 이들이 바라는 삶이다.
물론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설사 자신이 잘못되더라도 남은 처자식들이 그리 살 수 있다고 하니, 그것이 석재를 비롯한 첩자들을 이끈 동기부여였다. 석재뿐만 아니라 명재, 그리고 나머지 첩자들도 동탁에게 다 같은 제안을 받고 첩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명재는 석재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퉤! 죽으려면 혼자 죽으쇼. 형님. 난 살 거니까.”
“어허! 이 사람 명재. 왜 혼자만 생각하나. 남아 있는 가족을 생각해야지.”
“가족이라고 했소? 보상금 때문에 그런 가 본데 형님도 뭔가 느껴지는 게 없으시오? 동탁이 진짜 승상을 이길 수 있겠소?”
명재의 말은 단순히 홧김에 나온 말은 아니었다. 홍농성 안에서 전황을 살펴봐도 돌아가는 꼴이 심상찮았다. 처음 홍농에 투입될 때만 해도 그들은 동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이의민을 본적도 없고 평생 공포의 군주 동탁만을 주인으로 섬기고 살아왔던 이들이다. 동탁이 다른 누군가에 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단순히 동탁이 무시무시한 군주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 어떤 이도 굴복시키는 모습 이면에는 이유와 같은 자들의 조언을 적극 받아들여 효율적으로 세력을 운용할 줄 알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포의 합류로 안 그래도 강한 동탁군이 더 강해졌다. 여포는 기존에 있던 동탁의 상장들도 완전히 어린아이 수준으로 만들만큼 강했다. 상대에게 그 어떤 강한 장수가 있다고 해도 여포에게는 안 된다는 믿음이 강하게 들었다.
거기다가 이의민군보다 더 많은 군사들을 운용한다고 하니 그들의 눈에도 승리는 떼놓은 당상인 것처럼 보였다.
그랬는데 막상 전쟁이 시작되니 결과가 어떠했나? 어떤 장수와 붙어도 반드시 이길 거라 믿었던 여포는 이의민과의 일기토에서 사실상 패배나 다름없는 후퇴를 했다. 게다가 이의민 역시 동탁에 맞먹는 군사들을 데려왔다고 하니 동탁군이 수적 우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머리를 굴려 봐도 동탁군이 승리할 확률은 높지 않아보였다.
“아우. 자네 말대로 동탁이 지면 모든 게 물거품인 것은 맞네. 그러니 이럴수록 우리가 더 목숨을 바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하지 않겠는가.”
명재는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아오! 답답해! 형님.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소. 절대 흥분하지 말고 잘 들으쇼. 동탁은 사실 우리를 버린 것이오.”
“뭐? 그게 무슨 말이냐?”
“동탁도 우리 존재가 첩자들에 의해 다 드러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오. 그런데도 우릴 이리 방치하고 있소. 우리에게 준다던 보상 역시 거짓이겠지. 이게 우릴 버린 게 아니면 무엇이오?”
“동 장군.... 아니. 동탁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석재는 진실을 마주하고 동탁에게 가지고 있던 강력한 충심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 그런.... 크윽! 그럼 우리는 이제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괴로워하는 석재를 보며 명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 기왕 이리 된 김에 아예 이의민 밑으로 갑시다.”
“뭐? 어찌 그런....?”
갑작스런 제안에 망설이는 석재.
“지금 우리가 살 방법은 그것밖에 없소. 동탁 그놈에게 충성을 바쳐봤자 이리 버림받을 뿐인데 뭘 망설이는 거요? 형님이 아니 가시겠다면 나 혼자라도 가겠소.”
명재는 이미 마음을 굳힌듯했다. 석재도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서량에 두고 온 가족만 아니라면 석재도 진작 명재의 말대로 했을 터였다.
석재가 고민하고 있는 데 저 멀리서 봉화가 피어올랐다. 즉, 이제 고민할 시간도 없어졌다. 당장 결정을 내려야했다.
석재의 머릿속엔 여포를 몰아세우던 이의민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
명재의 집에서 곽봉과 군사들이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모두 마당에서 짚더미를 이불삼아 자서 그런지 입이 약간 돌아가 있는듯하다.
“으으. 확실히 노숙 한번 하면 죽을 맛이군. 역시 사람에게는 집이 있어야해.”
그런 곽봉 앞으로 명재가 다가왔다.
“응? 주인장. 잘 잤소?”
명재는 곽봉의 눈치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예... 소인은 잘 잤습니다. 그, 그러는 교위께서는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크크크. 누구와는 다르게 길바닥에서 잤는데 잘 잤을 리가 있겠소? 지금도 온몸이 삐걱거리는 것이 당장 사지가 분리될 것 같소만...”
“죄, 죄송합니다....”
“사정이 그랬으니 어쩌겠소? 그나저나 나한테 뭔 할 말 있소? 그러고 보니 어제 나갈 때보다 사람이 좀.... 아니. 많이 늘었는데?”
곽봉의 말대로 어제 명재의 집에서 나간 가족인지 패거리인지는 4명이었는데, 지금은 무려 9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갑자기 일제히 곽봉 앞에 엎드렸다.
“대인!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사실 대인이 말씀하시던 첩자들입니다.”
곽봉은 짐짓 놀란척하며 이들을 다그쳤다.
“뭣이?! 네놈들이 간자란 말인가?!”
곽봉의 호통을 듣고 첩자들은 겁에 질렸지만 이 때가 아니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항변하기 시작했다.
“대인!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동탁으로부터 홍농에 화계를 수행하라는 명을 받고 첩자로 잠입했습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하는 거냐?”
생각보다 냉담한 반응에 첩자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석재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대인! 저희의 행동이 염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데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저희가 이리 나선 것은 저희의 목은 거두시되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사하고 이리 온 것입니다.”
곽봉은 한동안 말없이 석재의 눈을 쳐다봤다. 두려움이 배어있었지만 결코 흔들리지는 않았다. 가족에 대한 걱정이 진심이란 것을 깨달은 곽봉.
‘흠. 이 정도면 이 놈들을 어느 정도 믿어도 되겠군.’
곽봉은 첩자들을 이의민에게 데려갔다.
이의민은 이미 석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석재는 이의민을 눈앞에서 보며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거대한 풍채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풍겨져 나오고 있다.
“네놈들이 불을 지를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민가라는 얘기지?”
“그, 그렇습니다. 승상.”
끔찍한 얘기에 오히려 미소를 짓는 이의민.
“그래. 어쨌든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꾼 것 참작해주겠다. 이들을 전향자로 대우하라.”
‘다, 다행이다. 역시 승상은 동탁과는 다르다.’
죽음까지 각오했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가족은 물론 자신들 역시 항병으로 대우하겠다고 했다. 역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느꼈다.
첩자들을 통해 확인을 마쳤으니 이제 동탁의 화계를 역으로 이용할 때다.
군사들 몇몇이 홍농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있다. 동탁의 첩자들이 위장하여 본격적인 화계를 펼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이의민군이 민가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물론 사람은 없다. 지금 이의민군이 불을 지르는 민가들은 모두 동탁의 첩자들이 사들인 곳이었다. 안전을 위해 인근 주민들도 모두 대피시켰다.
민가가 타오르는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 그걸 보던 이의민은 갑자기 귀를 쫑긋 거리더니 뜬금없는 명을 내렸다.
“동쪽 성벽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 봐라.”
서황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이의민의 명대로 일단 동쪽 성벽으로 갔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 있다.
“장군! 적들이 화살 하나를 이쪽으로 날렸습니다.”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불 같이 화를 내는 서황.
“지금 뭣들 하느냐? 적들이 근처에 와서 화살을 날릴 때까지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냐?!”
이에 군사들은 억울하다는 듯 답했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철저하게 감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근처에는 동탁군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화살이 날아왔다는 말인가?!”
이때 이의민도 도착했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나보다.
“화살 끝에 달린 게 뭔가? 그것부터 확인하지.”
서황이 확인해보니 일반적인 화살이 아니었다. 이의민의 말대로 화살 끝에는 서신 하나가 달려 있었다.
서황은 즉시 서신을 들고 이의민에게 건넸다.
“주군. 화살에 편지가 묶여 왔습니다.”
서신을 펼쳐보는 이의민.
“흠. 마등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