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이유의 계략 (2)
황보숭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그가 동탁의 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황보숭은 동탁을 더 이상 추궁하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명성이나 관직 등 모든 것이 동탁보다 위에 있지만 정작 여기서는 힘이 없었다.
지금 이곳에는 동탁의 군사들만 있을 뿐 황보숭의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막사에서 황보숭의 수발을 드는 병사들도 전부 동탁의 명을 받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뿐이다.
결국 황보숭은 편히 쉬지도 못하고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다른 막사를 찾아갔다.
그 막사는 크고 화려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소외받는 듯한 막사였다. 마치 황보숭의 막사와도 처지가 비슷한 듯하다.
황보숭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세 명의 사내가 그를 반겼다.
“좌장군. 이 밤중에 어인일이십니까?”
세 명의 사내 중 가장 상석에 앉은 인물은 8척의 훤칠한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외모도 전형적인 한족과는 살짝 달라보였는데, 상당히 강인한 인상을 가진 것이 보통내기 같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다른 두 명의 중년 사내가 있었지만, 황보숭은 바로 상석에 앉은 사내에게 용건을 꺼냈다.
“후우! 아무래도 동탁이 엄청난 짓을 저지를 것 같네. 그걸 막고 싶은데 지금 내게 군사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막을 방법이 없어 답답하여 마등, 자네를 찾아왔네.”
황보숭이 마등이라고 부른 중년 사내. 그가 바로 동탁과 함께 서량을 양분하고 있는 마등이었다. 현재 동탁과는 명목상 반 이의민 연합으로 동맹을 하여 같이 있는 중이다.
“동탁이 무슨 짓을 저지른다는 말씀이십니까?”
“홍농에 불을 지를 속셈이야. 내가 추궁했을 때는 극구 부인했지만 확실하네.”
황보숭의 대답에 마등은 의아해했다. 전장에서 불을 질러 적을 격퇴하거나 어려움에 빠뜨리는 계략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전쟁에서 화계는 흔한 일이 아닙니까? 그걸 한다고 해서 동탁을 말릴 이유가 있습니까?”
바로 곁에 있던 중년인 역시 마등의 말을 거들었다.
“이의민을 격퇴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화계보다 더한 계략을 내세워도 부족할 판에 왜 동탁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는 마등과 의형제를 맺은 한수다. 그 역시 황보숭의 얘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둘을 제외한 남은 중년인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숭이 전후 사정을 완전히 얘기해주지 않고 급하게 얘기하여 마등과 한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황보숭의 말만 듣고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했다.
“동탁이 홍농의 민가들을 다 불태울 셈인가 보군요.”
이에 마등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요? 문화. 여태 민가들까지 홀랑 태워먹고 좋은 말을 들은 사람이 없소.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전쟁에서 이겨도 손해일 정도요. 아무리 동탁이 미친 짓을 많이 한다지만 그 정도로 미친 짓을 과연 할 것 같소?”
마등으로부터 문화라 불린 자. 그는 바로 가후였다.
삼국지 최고의 두뇌 중 한명이자 순욱, 순유와 더불어 원 삼국지에서 조조 최고의 모사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원 삼국지에서는 가후는 지금 시기 즈음 동탁 밑에서 있다가 그가 패망하고 이각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의민에 의해 역사가 크게 달라진 만큼 가후의 행보도 원 삼국지와는 많이 달라졌다.
동탁 휘하에서 관직을 지내고 있는 건 달라지지 않았지만, 동탁 세력의 중심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동탁에게는 이유라는 두뇌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후는 이유가 동탁과 얼마나 끈끈한 사이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가급적이면 동탁 앞에 나서지 않았다. 괜히 이유에게 밉보였다간 목이 달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후는 동탁의 눈에 들지 않고 조용히 주변을 배회하다가 이번 전쟁에서 비슷한 처지의 마등을 만났다. 그러면서 마등의 막사에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가후다.
확실히 가후의 통찰력은 남달랐다. 황보숭이 고민하면서 꺼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 동탁과 이유가 준비하고 있는 계획을 대번에 파악했다.
“생각을 해보시오. 마등 장군. 지금 홍농성에 대놓고 화계를 쓸 만한 다른 빈틈이 없소. 고작 불화살 몇 대 날린다고 불이 붙기나 할 것 같소? 그렇다면 홍농에 화계를 쓸 수 있는 방법은 동탁이 최근에 심어놓은 첩자들을 이용하는 방법 밖에 없소. 그런데 그들을 통해 내부에서 불을 지르는 것도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게 문제요. 이의민 밑에 있는 순유나 곽가 같은 자들은 군략에 빈틈이 없는 자들이오. 아무리 첩자가 많다 한들 그들이 꼼꼼히 살피고 있는 무기창고나 군량창고에 불을 지른다는 건 힘든,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오. 그럼 결국 그들이 불을 지를 수 있는 곳은 단 한곳밖에 없소.”
“그 한곳이 바로 민가라.... 문화.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그렇소. 허나 동탁이 과연 그 선택을 내릴 수 있다고 보오? 성공한다고 해도 온 나라가 그를 지탄할 것이 뻔하오.”
“그래서 좌장군께서 아직 살아계시는 겁니다.”
황보숭은 가후가 갑자기 자신을 지칭하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동탁이 저지르려는 끔찍한 짓과 자신이 살아있는 게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뒤이어 이어지는 가후의 설명에 황보숭의 표정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마등과 한수의 표정도 마찬가지다.
“외람된 얘기지만 저는 동탁이 왜 좌장군을 살려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동탁은 민가에 불을 지르고, 그것을 좌장군에게 모두 다 뒤집어씌울 생각입니다.”
“뭣이?! 내가 민가에 불을 질렀다고 퍼뜨린단 말인가....? 나는 그럴 생각도 없고 힘도 없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런 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겉에서 보면 여기서 좌장군께서 가장 명망이 높고 직위도 높지 않습니까? 여기 있는 군사들의 입단속만 잘하면 세상을 속이기에는 충분하지요.”
“이런 간악한....!”
황보숭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만큼 동탁과 이유가 세운 계획은 악랄했다.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숨을 몰아쉬던 황보숭. 어차피 이리 화를 내봤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런 힘이 없으니까.
그래도 황보숭은 가후에게 한가지 희망을 봤다. 상황을 이리 단번에 파악하는 가후의 능력이라면 혹시 무슨 수가 있을 지도 모른다.
“이걸 막을 방법이 없겠나? 내가 민가를 불태운 악적으로 기록되는 것이 싫기도 하지만, 난 그 무엇보다 홍농의 민가가 불타는 걸 막고 싶네.”
놀랍게도 가후는 답을 이미 가지고 있는 듯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있긴 한데 장군께서 하실 수 없는 방법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그 어떤 것이라도 하겠네.”
“이의민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고 장군께서 그의 밑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의민도 장군의 말을 믿고 대비를 할 겁니다.”
“그게 왜 내가 할 수 없는 일인가? 과거 내가 그의 상관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날 너무 우습게 본 것일세.”
황보숭은 당장이라도 이의민 밑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내비쳤다. 하지만 가후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과연 그러하십니까? 장군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의민, 그는 언젠가는 황제 폐하를 밀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는 인물입니다. 장군께서는 어떻게든 그걸 막으려 하시지 않습니까? 그자가 황상의 자리를 대놓고 취하려 할 때도 그의 밑에서 모든 것을 감당해내실 수 있으십니까?”
“....!”
황보숭의 입이 닫혔다. 애써 모른 척 하고 있지만 가후의 말대로 그도 이의민이 결국 지존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탁의 진영을 못 떠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동탁의 힘이든 마등의 힘이든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서 막고 싶었다.
결국 황보숭은 한나라에 대한 충심 때문에 이의민 밑으로 들어갈 수 없는 셈이다.
‘맞는 말이다. 이의민은 나라를 뺏으려 한다. 난 그 밑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럼 나라를 위해 홍농 백성들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황보숭의 고민이 길어졌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옳은 일일까? 아무 죄 없는 백성들을 태워죽이면서까지 황실을 지켜야 하는가.... 또 지금 황실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단 말인가....’
고민을 하면 할수록 황실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황보숭은 그간 조정에서 별의 별 꼴을 다 봐왔었다. 신물 나는 환관들과 황건적, 가는 곳마다 끊이지 않는 백성들의 울음소리, 그런 상황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만 빠진 황제까지.
생각하면 할수록 황실에 충성을 바쳤던 지난 세월이 덧없게 느껴졌다. 게다가 동탁이 만약 이의민에게 승리한다고 해서 황보숭이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황실이 지켜진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동탁이 반 이의민 연합에 속해있긴 하지만 황실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움직이는 동탁이었다. 애초에 반 이의민 연합 자체도 그 속을 뜯어보면 충심으로 만들어진 연합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다. 동탁으로 이의민을 몰아낸다고 해도 호랑이를 물리치겠다고 독사를 풀어놓는 꼴이다.
황보숭이 계속 고민하느라 답을 내놓지 못하자 가후는 마등과 한수에게 물었다.
“두 분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두 분께서는 사면을 조건으로 동탁에게 가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소. 내가 동탁과의 전쟁을 멈추고 그와 손을 잡은 것은 반란군이라는 오명을 떨치기 위해서였소. 상황이 어쩔 수 없었지만 나는 북파장군의 후손이오. 후대에 반란군으로 불리길 원치는 않소.”
“그럼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시오. 동탁이 과연 이의민을 이기기 쉽겠소? 이미 연합도 흐지부지 된 마당에 이의민은 현재 황제까지 등에 업고 있소. 여러모로 동탁이 이의민을 상대로 어려워 보이오. 만약 동탁이 지면 두 분은 어찌 되겠소? 사면도 물거품이오.”
가후의 말에 마등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사면 하나만을 바라보고 동탁과의 불합리한 동맹을 받아들였다. 마등은 지금 동탁과 함께 있으면서도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군사들만 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동탁에게 제공한 마등의 군사들은 이의민과의 전투 가장 앞 선에서 희생당했다. 그렇게 희생만 당했는데 만약 사면마저 물거품이 된다면 마등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리라.
“제가 장군의 입장이었다면, 차라리 이의민을 돕고 그에게 사면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마등과 한수는 차라리 가후의 제안대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의민이 받아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날 받아주겠소? 그들이 보기에는 난 반란군에 불과하오. 게다가 여태껏 연합까지 가담을 했는데....”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되지 않겠소이까?”
결국 마등과 한수도 황보숭처럼 조용해졌다. 셋 모두 깊은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