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이유의 계략 (1)
이의민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군사들을 점검했다. 이의민이 홍농에 왔을 때부터 이미 홍농 수비군의 피해는 상당했다. 3만이었던 군사들은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그나마 여포가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며 혼자 서황, 장료, 고순에 묶여 있었으니 이 정도 피해로 그쳤지, 사실 진작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투였다.
“피해가 컸군....”
이의민은 안타까운 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제야 자신이 뭔가 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음? 사마방은 어디 갔나? 그리고 내가 데려온 기병 천기는....?”
그러고 보니 데리고 온 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홍농성 성벽 위로 올라가기 전에만 해도 이의민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이나 황충, 태사자라서 그 성벽 위를 그리 뛰어오를 수 있었지, 평범한 군사들은 그리 쉽게 오를 수 없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아직 홍농성 밖에서....? 성문을 열어줘야 되겠군.”
아니나 다를까, 사마방과 천기의 기병들은 홍농성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자신들보다 수십 배가 더 많은 동탁군을 감히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미안하오. 사마 가주. 워낙 상황이 급박하여 내 잠시 그대와 그대에게 맡긴 내 군사들을 잊고 있었소.”
“이해합니다. 승상. 저도 승상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그리 했을 것입니다.”
“고맙소.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오. 저들이 왜 이리 쉽게 포기하고 퇴각을 한 것인지....”
이의민의 의문에 사마방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저들은 아마 본대가 도착한 것으로 착각했을 겁니다.”
“그런 착각을....? 내가 온 것을 보고 지레짐작을 한 것인가?”
“제가 승상의 기병들을 이용하여 적에게 혼란을 좀 줬습니다.”
사마방은 이의민이 성벽 위로 올라간 이후의 상황을 설명했다. 사마방도 당연히 이의민을 끝까지 따르고 싶었으나 사다리도 없이 성벽 위로 올라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동탁군과 전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문을 열도록 종용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성 밖 반대편에 있는 동탁군 궁병들을 기습할지 고민도 해보았지만, 사마방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기병이고 상대가 궁병이라 해도 무려 열 배가 넘는 병력 차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격을 감행하는 건 무리한 도박이었다. 자신의 군사들이라면 모를까 다른 이, 그것도 승상의 군사를 가지고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어쩐다.... 가만히 성 밑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홍농성의 상황이 너무 급박해보이고....’
고민하던 사마방에게 한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적들은 이의민이 왔으니 본대가 어디 있는지 의심을 할 터였다. 그런 상대의 의심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사마방은 기병들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부터 이곳 성문 앞에서 계속 움직여야 한다! 그냥 움직이는 것보다 가능한 말발굽을 크게 굴려서 먼지가 많이 일게 만들어라! 그리고 움직이면서 가능한 함성을 크게 내라! 마치 수만의 군사들이 이곳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후 벌어진 일은 사마방의 생각대로였다. 동탁과 이유는 반대편 성문 쪽에서 피어나는 먼지와 함성소리를 듣고 이의민의 본대가 도착했다고 믿었다. 그들이 고작 천기의 군사들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이의민은 흡족한 표정으로 사마방을 칭찬했다.
“아주 잘 하셨소. 마음에 드는 군.”
사마방과의 첫 만남 때 받은 별로 대단한 인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고쳤다. 괜히 사마의라는 자식을 낳은 아비가 아니다.
이의민이 그렇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데, 그 앞으로 서황, 장료, 고순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다가왔다.
“주군....”
“주군. 송구합니다. 소장들이 주군의 명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마 주군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홍농을 빼앗겼을 것입니다.”
이의민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들을 맞았다.
“되었다. 너희들은 할 만큼 했어. 그리고 이유가 어찌 됐든 홍농을 지켰지 않나? 그럼 된 것이지.”
이의민도 여포를 조롱했었지만, 그가 얼마나 대단한 무장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여포를 상대로 어떻게든 버텨준 서황, 장료, 고순이 고맙기까지 했다.
반대로 서황, 장료, 고순은 이의민에게 더 깊은 존경심이 들었다. 이전에도 이의민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누구보다 자신들이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포와 삼대일로 상대해보니 오히려 이의민을 얕게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시 주군이십니다. 여포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군밖에 없으십니다.”
“소장들이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자책할 필요 없다. 사실 내가... 그리고 그 여포 놈이 좀 이상한 것이긴 해. 어쨌든 여포 놈은 내가 반드시 죽이다. 이번 전쟁에서 말이지....”
이전까지 누가 여포를 죽일 수 있다고 하면 코웃음이 나왔을 거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이 들렸다. 하지만 이의민이 여포를 죽일 거라고 하니 그 어떤 말보다 믿음이 갔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런데 본대는 언제 옵니까?”
“훗! 사람들이 말이야. 내 곁에 순유나 곽가가 없으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 보듯이 나를 보던데 자네도 그런가 보군.”
“소장이 어찌 그런 불경한....”
“됐다. 농이니. 본대는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 푹 쉬고 있어. 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힘들어지니까.”
서황, 장료, 고순을 격려한 이의민은 홍농성 군사들에게도 외쳤다.
“다들 들어라! 그간 홍농을 막느라 정말 수고했다. 그리고 명을 달리한 군사들을 추모할 것이다. 그들 덕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살아 있을 수 있다. 적은 우리의 본대가 왔다고 생각할 것이니 적어도 오늘은 공격이 없을 것이다. 오늘 만은 경계 없이 푹 쉬어라!”
이의민의 얘기에 모두 놀라 소리쳤다.
“그, 그렇다고 해도 어찌 경계를 서지 아니하겠습니까?”
“오늘은 내가 데려온 별동대와 함께 내가 직접 성 벽을 돌면서 경계를 설 것이다.”
이의민의 선언에 홍농성 군사들은 모두 뜨거운 눈빛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 목숨 바쳐 홍농성을 지킨 보람이 느껴졌다.
거기서 그친 게 아니다.
이의민은 약속대로 자신이 직접 순찰을 돌다가 길바닥에 퍼질러서 자고 있는 보사들을 발견했다.
“스, 승상?!”
“쉬라니까 여기서 왜 자고 있느냐? 막사나 집을 배정받지 못했느냐?”
“저 그게.... 이번 전투에서 병사들 거주지가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흠! 그러면 내일 임시막사를 지어야겠군. 이럴 줄 알았으면 곽봉형을 데리고 오는 건데.... 오늘 밤이 문제로군. 그럼 민가에 양해를 구해 며칠만 좀 묵게 부탁하는 건 어떤가?”
보사들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이의민의 말대로 해본 모양이다.
“저희들도 민가에 가서 그런 부탁을 해보았습니다. 한데 이미 다 찼다고 합니다.”
“민가가 다 찼다니.... 지금 남은 군사들이 2만이 채 아니 되지 않은가? 이번 전투에서 민가도 피해를 입은 건가? 아니면 홍농의 인구가 그리 적은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최근 원래 홍농에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즉, 홍농성의 집 수에 비해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졌습니다.”
이의민은 예전에 정욱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때 중덕도 이런 얘기를 했었지. 흠!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이 정도라니.... 아무래도 공달이 오면 상의를 해봐야겠군.’
“그나저나 오늘 밤을 어찌 한다. 지금 밤새워 막사를 세울 수도 없고....”
“승상. 어찌 이리 저희 같은 아랫것들까지 신경을 써 주십니까? 승상께서 아니 오셨으면 이미 죽었을 몸입니다. 하루쯤 길바닥에서 자는 것이 뭐가 대수겠습니까?”
“하긴 그래.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좋아. 마침 내 경계 순번도 끝났으니, 오늘은 나도 자네들과 함께 하지.”
“예?!”
이의민의 말에 보사들은 깜짝 놀랐다. 승상이란 인물이 자신들과 같이 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 머물 막사나 집이 없어서 노숙을 하는 처지 아닌가.
“스, 승상! 어찌....?”
이의민은 놀라는 보사들을 무시하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물론 이의민도 좋아서 이리 하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 그만의 방식으로 목숨 걸고 홍농을 지킨 병사들을 위로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노숙을 해보니 고려시절 천민이었을 때도 생각이 나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병사들은 저마다 속으로 승상을 위해 목숨을 바치리라 다짐했다.
한편 동탁군의 분위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다. 장제가 태사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공성과정에서 1만의 군사를 잃었다. 그래도 이의민군보다는 더 적은 피해였다. 홍농을 결국 함락하지는 못했지만 이의민의 본대가 온 것치고는 제법 잘 싸운 셈이다. 그런데도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다. 그건 바로 한 사내가 난폭한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술 가져와! 술!”
여포는 또 다시 이의민에게 밀렸다는 것 때문에 화를 내며 동탁군의 분위기를 흐렸다.
“봉선. 쯧쯧. 왜 그리 속상해하느냐? 너는 정상적인 상태도 아니었고 적토마도 없었다. 다음에는 분명 이의민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동탁의 위로에 그제야 미소를 짓는 여포.
“그렇겠지요? 아버지. 흐흐. 역시 내 마음을 아는 건 아버지밖에 없소.”
하지만 동탁의 속내는 달랐다.
‘썅! 자식 놈이 아니라 웬수라니까....’
처음 여포를 양자로 들였을 때만 해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여포가 이의민에게 형편없이 밀리는 꼴을 보니 여러모로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의민이 내 양자가 돼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그러기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여포를 달랜 동탁은 바로 이유를 찾았다.
“문우. 첩자들에게 연락은 왔느냐?”
“힘들 겁니다.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성 자체를 꽁꽁 걸어 잠그고 있어서 첩자들과의 연락이 어렵습니다.”
“뭐? 그럼 첩자들에게 어찌 명을 내리겠나? 그들에게 명을 내리지 못하면 화계를 시작할 수도 없다는 뜻 아닌가?”
동탁과 이유는 애초에 홍농성 점령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예측했다. 그래서 미리 첩자들을 잠입시켜놓고 화계를 준비했는데, 연락이 안 되면 말짱 도루묵이다. 하지만 이유는 이런 돌발 상황을 예상하고 대책을 세워두었다.
“설마 제가 이런 상황도 예상 못했겠습니까? 우리가 봉화를 피우면 그것이 신호입니다. 신호를 받은 다음 날 그들이 움직일 겁니다.”
“흐흐! 역시 문우로군. 그럼 화계를 확실히 성공시킬 수 있겠나?”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주군. 이의민 그놈이 백성들을 위한답시고 여태껏 해오던 짓거리를 계속한다면 틀림없이 화계를 성공시킬 겁니다. 설사 그놈들이 우리 첩자들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이의민은 백성들을 무고하게 괴롭히는 탐관오리가 되는 겁니다.”
화계가 통하든 안 통하든 무조건 이의민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아까부터 누군가 옆에 와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장군.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리긴 다 태워 죽... 헉!”
적어도 자신의 진영에서는 왕처럼 행동하는 동탁도 껄끄러운 사람이 딱 한명 있었다.
“험험! 황보 장군. 오셨소?”
바로 황보숭이다.
“딴청 말고 방금 무슨 얘기를 한 거요? 화계? 백성들? 다 태워 죽인다고 하셨소? 설마 홍농의 민가에 불을 지르겠단 말이오?”
“그냥 답답해서 해 본 소리요. 설마 하니 내가 그런 짓을 하겠소이까?”
동탁은 모른다는 표정으로 딱 잡아뗐다. 황보숭은 분명 화계니 뭐니 하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더 이상 동탁을 추궁할 수도 없었다.
황보숭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동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큰일 날 뻔했네. 하여간 의심만 많아서.... 물론 사실이긴 하지만. 크흐흐.”
“흐흐! 주군. 조금만 참으시죠. 황보 장군은 아주 중요하게 쓰일 겁니다. 괜히 그를 서량까지 불러온 게 아닙니다.”
동탁과 이유는 황보숭의 뒷모습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