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불구대천의 원수 (3)
너무 비현실적인 등장이어서 그랬을까?
“누, 누구....?”
“저, 저자가 이의민.....?”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의민이 여포와의 싸움에 끼어든 순간부터 홍농성의 전투가 멈췄다. 모두 전투를 멈추고 이의민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 고요 속에서 들리는 것은 이의민의 발걸음소리뿐이다.
뚜벅뚜벅.
아무도 이의민의 앞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여포조차 말이다. 그저 멍하니 꿈을 꾸듯 다가오는 이의민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의민은 그런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성벽 위를 꽉 채운 동탁군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고 여포까지 지나쳤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서황, 장료, 고순에게 말을 걸었다.
“쯧쯧! 내 상장들이 꼴이 그게 뭔가?”
서황, 장료, 고순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주, 주군?! 언제 오셨습니까?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한승. 저들을 옮겨 쉬게 하라. 자의는 남은 병력들을 지휘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이의민의 명에 따라 황충은 서황, 장료, 고순을 부축하러 갔다. 그리고 태사자는 홍농 수비군을 통솔했다.
그제야 여포는 제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임을 깨닫고 소리쳤다.
“이놈! 이의민! 드디어 나타났구나.”
여포는 오직 이의민만 생각했다.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준 이의민을 다시 만나 목을 딸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의민을 다시 보니 이상하게 몸이 떨렸다.
여포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이의민을 향해 방천화극을 휘두르고 싶지만 이상하게 팔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여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미 체력이 떨어진 자신이 이의민을 상대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여포는 애꿎은 황충을 먼저 목표로 삼았다.
“감히 누구를 데려가려는 것이냐?!”
만만해 보이는 황충을 먼저 베어 인정하기 싫은 두려움을 날려버리려 했던 여포. 하지만 그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캉!!
이의민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단번에 썰어버릴 수 있다고 자신했던 여포다. 그런데 눈앞의 중년 장수는 쉽지 않았다. 아무리 가볍게 휘두른 공격이지만 상대는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공격을 막아냈다.
‘이, 이놈은 대체 뭐야?’
체력이 줄지 않은 쌩쌩한 상태라고 해도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절대 가볍게 상대할 적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황충은 서황, 장료, 고순과는 달리 이름을 날린 장수가 아니었다. 여포는 이런 실력자를 수하로 데려온 이의민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어디서 이런 놈을 또 데려왔단 말인가?’
여포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을 때, 황충 역시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이미 이의민을 주군으로 모시며 놀랄 일이 없을 거라 여겼지만, 그런 그가 봐도 여포는 보통 상대가 아니다.
‘이런 힘을 가진 이가 주군 외에 또 있었다니....’
“훗! 마음 같아서는 상대해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내 차례는 아니 올 것 같군.”
여포가 아무리 바보라도 그 말 뜻 모를 리 없다. 황충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의민을 바라봤다.
이제 이의민을 피하려야 피할 수도 없다. 난생처음 여포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을 알게 해준 사내였다.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아왔던 여포에게는 그것 자체가 치욕이었다. 그래서 여포에게 이의민은 반드시 없애야할 대상이다.
여포는 애써 두려움을 떨쳐내고 방천화극을 들어 이의민을 가리켰다.
“이의민.... 이제 결판을 내야할.... 헉!!”
여포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서황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힘과 속도로 대부가 휘둘러졌기 때문이었다.
“이 쌍놈의 새끼가 감히 이 나라의 승상에게 말이야. 어디서 건방지게 무기를 함부로 들어재끼고, 함부로 함자를 부르느냐? 뒤질라고. 너 같이 제대로 된 관직도 없는 잡졸 따위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이 애비도 없는 호로쌍놈아!”
“이이익....!”
이의민의 무차별적인 욕설에 여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살아생전 욕설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여포. 다른 이들은 그에게 하늘이 내린 재주라느니, 항우의 재림이라느니 듣기 좋은 말만 앞에서 했었다. 오직 이의민만이 여포에게 이런 쌍욕을 퍼부었다.
단순무식한 그답게 욕설에 금방 흥분하여 눈앞에 보이는 게 없다. 이의민에 대한 두려움도 순간 잊어버렸다.
“반드시 죽인다!!”
여포는 방천화극을 크게 휘두르며 반격했다. 하지만 이의민은 너무도 쉽게 대부로 그 공격을 막아냈다. 황충도 여포의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그때와는 위력이 다른 전력을 다한 공격이다. 게다가 황충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자세로 가볍게 막았다.
여포는 아랑곳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지만, 이의민은 마치 무예 연습을 하듯 여포의 모든 공격을 받아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반격.
“크으윽!!”
여포의 공격을 가볍게 받아낸 이의민과는 달리 여포는 이의민의 대부를 간신히 막았다. 단 한번의 공격에 여포는 무려 세 걸음이나 물러나야했다.
그 모습에 주변의 군사들은 눈을 크게 떴다. 특히 동탁군은 경악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들도 대부분 이의민을 처음 봤다. 그런 그들이 봐왔던 최강의 인간은 여포였다. 그들이 여포를 본 이후 여포보다 더 강한 인간은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여포가 밀리고 있었다. 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다.
여포도 그런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난 절대 질 수 없다. 내가 최고여야 한단 말이다!’
여포는 속으로 절규하며 이의민에게 방천화극을 휘둘렀다. 그러나 여전히 여포의 방천화극은 이의민에게 쉽게 막혔고, 그의 반격을 막기는 힘든 여포다.
이의민과 여포의 일기토를 홍농성 성벽 아래에 있는 동탁도 보고 있었다. 동탁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문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봉선이가.... 내 아들이 밀리고 있어. 이게 정녕 생시인가?”
이유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기토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동탁의 최고 모사답게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확실히 여 공자가 밀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세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느라 지치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여 공자만 문제가 아닙니다. 저기 이의민의 새로운 두 장수가 우리 상장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유의 말에 동탁은 그제야 이의민과 여포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 둘에게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던 전황이 눈에 들어왔다.
이의민의 등장으로 잠시 멈췄던 성벽 위 전투가 다시 진행되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동탁군이 당장이라도 성벽 위를 장악할 것 같았는데, 황충과 태사자가 가세함으로서 전황이 요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아직은 병력에서 압도적이라 완전히 밀려나지는 않고 있었지만, 병력 차이가 무색하리만치 비등비등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친 게 아니었다. 이유는 손가락으로 다른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반대쪽 성문을 보십시오.”
홍농성 성문 바로 아래에 있는 동탁에게는 당연하게도 반대쪽 성문이 보일 리가 없었다. 이유가 보라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반대편 성문이 아니라 그 주변이었다. 반대쪽에서는 자욱한 먼지와 함께 끊임없이 함성소리가 들렸다.
“저 소리는 무엇인가....?”
“이의민의 본대가 도착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군.... 하긴. 놈이 혼자 왔을 리가 없지. 그럼 성 위쪽 우리 군사들을 물려야 하지 않겠나?”
“맞습니다. 만약 여 공자가 싸움에서 진다면 성 위의 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겁니다. 무적의 사내로 알았던 아군 장수의 패배는 아군 군사들의 사기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치겠지요. 그러니 여 공자와 함께 군사들을 전부 물려야 합니다.”
동탁은 이유의 말을 알아듣고 바로 명을 내렸다. 홍농성을 점령하기 직전에 군사를 퇴각시키는 판단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람 욕심을 제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동탁은 이유의 조언을 들었다지만 과감하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것도 그가 서량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서영! 이각! 후퇴하라! 봉선! 오늘은 날이 아니다! 너는 지쳤다! 다들 봉선을 데리고 퇴각하라!”
동탁의 명에 동탁군 상장들은 일제히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성벽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모두 동탁의 명을 들었지만 단 한사람만은 명을 듣지 않았다.
“헛소리 하지 마쇼! 밀리긴 누가 밀린다고!”
이대로 후퇴하기에는 여포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여태껏 이의민과 비등비등하게 싸운 것도 아니고 계속 밀려왔다. 지금 퇴각하면 명백히 밀려서 퇴각하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여포는 막무가내로 계속 싸우려 했다.
이때 서영이 나섰다. 서영은 여포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게 하면서 물러나게 할 방법을 알고 있다.
“공자! 이 싸움은 불공평합니다. 처음부터 공자가 지친 상태로 시작한 대결이었습니다. 게다가 공자의 애마인 적토마가 없는 싸움 아닙니까?”
대답할 여유는 없었지만 여포는 내심 기뻐했다. 자신이 이리 밀리는 건 이미 지친 상태에서 시작했고, 무엇보다 적토마가 없어서 그렇다고 합리화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변명에 가깝다.
둘의 일기토가 시작되기 전 이의민의 전투시간이 훨씬 짧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의민 역시 홍농까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느라 적잖은 체력 소모를 했다. 그리고 여포에게 적토마가 없는 것처럼 이의민에게도 한혈마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생각도 않는 여포다.
퇴각할 이유를 찾은 여포는 방천화극을 크게 휘두르며 이의민과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이의민은 여포를 이대로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크흐흐! 이놈! 어딜 도망치려 하느냐?!”
“도망은 무슨?! 시작부터 비겁한 싸움을 한 놈은 네놈이 아니냐?”
여포는 퇴각이 여의치 않자 군사들을 방패로 내세웠다. 순식간에 이의민의 대부에 피떡이 되는 동탁군 군사들. 그래도 그 덕분에 여포는 퇴각할 시간을 벌었다. 순식간에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여포다.
이의민은 그런 여포와 퇴각하는 동탁군을 보며 명을 내렸다.
“적들이 퇴각한다! 성문을 걸어 잠가라!”
이의민의 본대가 도착한 것 같은데 추격을 하지 않는 걸까? 사실 이의민의 본대가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당연히 동탁군에 비해 병력이 월등히 부족하니 무리하게 추격을 하지 않았다.
그럼 동탁과 이유가 본 이의민의 본대는 뭘까? 동탁과 이유는 이의민의 본대를 본 적이 없다. 그저 성벽 뒤편에서 나는 자욱한 흙먼지를 보며 본대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 먼지는 사실 이의민과 같이 온 천여기의 별동대가 낸 먼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