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불구대천의 원수 (2)
여포의 방천화극이 장료를 베기 전 또 끼어드는 인물이 있었다. 이번에는 장료의 편이다.
“이놈! 여포! 문원에게서 떨어져라!”
동쪽 성벽을 담당했던 고순이었다. 여유가 있어서 이곳으로 온 것은 아니다.
동쪽 성벽 위는 사실상 동탁군에게 내주었기에 어쩔 수 없이 성문 쪽인 이곳까지 밀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장료의 목숨은 살릴 수 있었지만 말이다.
여포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후 고순에게도 물었다.
“흐흐. 고순 장군. 오랜만이야. 그대는 문원과 같이 어리석은 대답을 하지 아니하겠지? 자! 내 아버지인 동탁 밑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떠한가?”
하지만 고순 역시 그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웃기지마라! 이 패륜아 놈아! 옛 주인의 원수를 갚을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여포는 고순 역시 자신을 적대하는 것을 보며 혀를 찼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대가 당연히 자신을 적대할 것이라고 유추할 텐데, 여포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하! 이 고리타분한 인간들. 너도 그렇고 문원도 그렇고 이리 좋은 기회를 왜 스스로 발로 차버리려 하는지 모르겠군. 어쩔 수 없지. 회유고 나발이고 모르겠다. 너도 그냥 죽여 버리는 게 속편하겠군. 하나씩 상대하기도 귀찮으니 둘 다 한꺼번에 덤벼라!”
여포는 여유를 부리며 고순과 장료에게 함께 덤비라며 허세를 떨었다. 아니. 다른 장수였다면 분명 허세다. 하지만 여포는 그게 허세라고 볼 수 없었다.
장료와 고순은 식은땀을 흘리며 무기를 다시 쥐었다. 둘도 알고 있었다. 둘이 함께 힘을 합쳐 덤빈다고 하더라도 여포를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도 이대로 허무하게 패배를 인정할 수는 없기에 둘 다 여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아압!!”
“죽어라! 이 패륜아 놈아!”
여포는 여유 있게 방천화극으로 장료와 고순의 합공을 막아냈다. 처음에는 잠깐 장료와 고순이 밀어붙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여포가 일부러 놀아준 것에 불과했다.
“하암! 이거 너무 재미가 없어서 하품이 나오는군. 둘이서 덤비는데 고작 이것밖에 아니 되나? 그럼 이제 내 차례다!”
여포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됐다. 한방 한방의 공격이 어찌나 강맹한지 장료와 고순이 힘을 합쳐 막아도 밀려날 정도였다.
장료와 고순의 손발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안 그래도 장료와 고순의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무기를 손에 쥘 힘도 없어질 테고, 그 순간 방천화극을 막을 수 없을 터였다.
그때 장료와 고순을 돕는 이가 하나 더 있었다. 이번에는 서황이다.
그 역시 서쪽 성벽에서 올라온 동탁군에 점점 밀려 결국 여기까지 왔다.
“그만! 이제 내가 상대해주겠다!”
“응? 네놈은 이의민과 같은 도끼쟁이가 아니더냐? 흐흐! 도끼쟁이는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지. 그래. 네놈의 목까지 베어서 이의민에게 선물로 줘야겠다.”
서황까지 가세한 삼대일의 대결이 이어졌다. 확실히 서황까지 가세하니까 일방적이었던 승부의 무게추가 서서히 균형을 맞춰나갔다.
한명이 동시에 두 명을 상대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다. 어지간히 실력 차가 나지 않고서야 성립이 불가능한 대결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물며 두 명도 아닌 세 명을 상대하는 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얘기였다.
지금 여포가 상대하고 있는 세 명은 일반 병사가 아니라 장수다. 그것도 무력이라면 어디 가서 절대 꿇리지 않는 서황, 장료, 고순이었다. 그들 세 명을 상대로 비등비등한 승부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서황, 장료, 고순도 승부의 무게추를 맞췄다고 기뻐하지 못했다. 그들도 각자 스스로의 무위에 나름 자부심이 있는 무장들이다. 그런데 세 명이서 한 명을 상대로 합공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끄러운데, 심지어 압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묵묵히 여포에 대한 합공을 이어갔다. 여포를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체면 따위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합을 주고받기가 무려 이백여 합이 넘어갔다. 그때까지도 여포는 셋을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여포보다 셋이 더 불리해지는 것 같았다.
“크하핫! 고작 이 정도냐? 세 명이서 합공을 했으면 적어도 상처는 더 많이 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실제로 각자의 몸에 난 상처도 여포가 제일 적었다. 숨을 헐떡이는 모양새 역시 여포가 가장 쌩쌩해 보였다.
서황과 장료, 고순은 질린다는 듯한 눈빛으로 여포를 쳐다봤다. 도저히 같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셋은 모두 한마음이다.
‘크윽! 여포는 정말 괴물이다. 저 괴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주군밖에 없다. 주군께서 여기에 계셨다면....’
여포는 생각보다 더 엄청났다. 하지만 셋의 믿음은 확고했다. 그래도 이의민이 더 강하다. 이의민이라면 반드시 저 여포를 쓰러뜨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이의민이 없다.
한편 초조한 눈으로 넷의 일기토를 지켜보던 이유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군사들에게 외쳤다.
“뭣들 하는 게냐! 여 공자가 저대로 삼대일로 계속 싸우도록 놔둘 거냐? 어서 여 공자를 도와야 할 것이 아닌가?”
이유의 호통에 멍한 눈으로 일기토를 구경만 하던 군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처음 장료를 상대했던 장제가 슬쩍 나섰다.
“여 공자! 내가 돕겠소. 비겁하게 셋이서 한 명을 상대하다니....”
그런데 여포는 오히려 장제에게 사자후를 내질렀다.
“갈!! 간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거늘 누가 감히 내 싸움을 방해하는가?!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여, 여 공자?! 예, 옛!”
다시 쭈그리고 군사들 사이로 들어가는 장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그걸 보는 이유는 황당할 뿐이다. 결국 동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주군. 저기 있는 적장 셋만 잡는다면 끝나는 전투입니다. 공자의 기분 때문에 계속 이리 시간이 끌리게 두실 겁니까?”
이유의 말이라면 늘 귀담아 들었던 동탁도 이번에는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음... 그리 서두를 게 있겠나? 이미 우리가 이긴 거 같은데, 일단 봉선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게.”
동탁도 이유의 말이 타당하다 여겼지만, 가급적이면 양아들과 문제를 일으키기 싫었다. 솔직히 아직은 감당이 잘 안되기도 했고 말이다.
덕분에 계속 삼대일로 일기토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서황, 장료, 고순에게 불리했다. 여포는 아직 체력에 여유가 있어보였고, 서황, 장료, 고순의 체력은 바닥이다.
“허억! 허억! 저 괴물 같은 놈....!”
“고 장군. 장 장군. 나는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거 같소. 미안하오.”
“후후. 먼저 가 있게. 아마 우리도 곧 뒤따라갈 거 같네.”
“주군께서 내리신 명을 완수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그러게 말이오. 마지막으로 주군의 얼굴이나 봤으면 좋으련만....”
서황과 장료, 고순이 승부의 추가 기울었음을 직감하고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크흐흐! 이놈들. 유언은 다 읊었느냐?”
셋은 실력으로는 명백히 여포에게 밀렸지만 기세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다시 무기를 쥐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았다.
서황은 뭐가 웃긴지 실실 웃으며 여포에게 외쳤다.
“크흐흐!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아! 우리를 이겼다고 좋아하지 마라. 어차피 너는 주군께서 오시면 개 짖는 소리를 내고 도망갈 것이 아니냐?”
서황의 말에 장료와 고순 폭소를 터뜨렸다. 예전에는 여포와 같은 편이었기에 개 짖는 소리가 치욕이었지만 지금은 이보다 더 통쾌할 수 없다.
“푸하하! 그래! 그때 참 가관이었지. 여포, 네놈보다 더 개 짖는 소리를 찰지게 내는 놈은 못 봤다.”
“크하하하하! 네 놈의 개 짖는 소리를 다시 못 듣는 게 천추의 한이구나.”
당연하게도 여포의 이성이 완전히 끊어졌다. 이마에 터질 듯한 힘줄이 솟아났다.
“이...! 이....! 이 잡것들이!! 진정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소원대로 죽여주마!”
셋을 향해 엄청난 힘을 담아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여포. 서황, 장료, 고순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전력을 다한다 해도 저 일격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방천화극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쾅!
도끼 하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방천화극이 휘둘러지는 경로를 바꿨다. 도끼쟁이 서황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방천화극과 부딪힌 도끼가 너무 작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대의 화살. 보통 화살이 아님을 느낀 여포가 깜짝 놀라 급히 화살을 막았다.
서황, 장료, 고순은 그제야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째서 아직 죽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손도끼는 설마....?”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우리 애들을 괴롭혔느냐?”
**
낙양에서 6만의 대군이 전속력으로 홍농을 향해 진군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두의 이의민은 아무래도 답답했다. 6만의 대군이 아무리 속도를 내봤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공달. 아무래도 아니 되겠어. 내가 먼저 홍농에 가봐야겠다.”
이번에도 본대를 제치고 먼저 가려는 이의민이다. 순유는 당연히 말릴 수밖에 없었다.
“주군. 동탁군은 무려 10만에 달합니다. 아무리 주군께서 대단하시다고 해도 혼자서 가시면....”
곽봉도 동참했다.
“의민! 또 선발대 뽑아서 먼저 가려고? 아니? 무슨 놈의 승상이 이래? 이제 아니 그러기로 했잖아. 그리고 서황, 장료, 고순이 어디 쉽게 쓰러질 놈들이냐?”
“아니오. 동탁군엔 여포가 있소. 병력도 적은데 여포까지 있으면 세 명으론 막기 버거울 수도 있단 말이오.”
이의민의 결심은 확고했다. 아무래도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순유도 충분히 이의민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가 봐도 지금 홍농은 바람 앞의 등불이다.
“후! 이미 마음을 정하신 거 같은데 제가 어찌 말리겠습니까? 대신 완전히 혼자 가시지 마시고 날랜 기병 천기와 믿을 만한 장수들을 동반하여 가시지요.”
“알겠다. 그럼 자의! 한승! 날 따르라.”
이의민이 천기의 기병과 태사자, 황충을 데리고 먼저 홍농으로 가려할 때 사마방도 나섰다.
“승상. 저도 가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지리를 잘 아니, 지름길로 안내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알겠소. 부탁하오.”
그렇게 사마방까지 합류하여 먼저 앞서나갔다. 천여기의 말들은 홍농을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이의민이 타고 있는 한혈마도 그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랐지만, 나머지 군사들이 타고 있는 말들 역시 모두 최상급 품종의 서량마였다. 거기다 사마방은 천기의 기병이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정확히 안내했다. 덕분에 이의민의 별동대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홍농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 서둘렀는데도 이미 늦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홍농성은 이미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투가 아직 끝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홍농성에서는 계속해서 군사들의 함성소리, 비명소리,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들이 나고 있었다.
이의민은 생각보다 쉽게 홍농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성전을 진행하는 중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동탁군에게 발각되어 홍농성에 들어오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었다.
이의민은 얼른 홍농성 성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순식간에 성벽을 타고 성벽 위로 올랐다.
그가 성벽 위로 올라가자 치열하게 전투를 펼치고 있는 홍농군과 동탁군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농군은 굉장히 힘든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아직까지 성벽 위를 완전히 장악 당하지는 않았지만 병력에서 명백히 열세라 금세 밀릴 것 같아보였다. 동탁군은 현재 앞에 있는 홍농군을 상대한다고 뒤에 있는 이의민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의민은 그대로 동탁군을 기습했다.
“크아악!”
“뒤, 뒤다! 뒤에서 기습이다!”
그제야 뒤를 확인하는 동탁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의민의 대부가 자비 없이 동탁군을 박살냈다.
홍농군도 이의민을 확인하고 환호했다.
“주, 주군!”
“승상께서 오셨다! 와아아아!!”
눈앞에 보이는 동탁군을 치워버렸지만 이의민은 아직 다급했다. 여기 있는 동탁군은 일부일 뿐이었다. 아직 성벽 곳곳에 동탁군이 많았다.
“다른 이들은 어디 있는가? 서황, 장료, 고순은....?”
군사들이 한쪽을 가리켰다. 성문 쪽이었다. 거기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고, 또 그 사이에 성벽을 장악한 동탁군이 많았다. 하지만 이의민은 망설임이 없다.
대부를 휘두르며 거침없이 성벽 위의 동탁군을 갈랐다. 그가 지나간 성벽 위는 동탁군의 시체가 쌓였다.
어느덧 이의민의 눈에 반쯤 죽어가는 서황, 장료, 고순과 그들을 향해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여포가 보였다. 이의민은 생각할 것도 없이 방천화극을 향해 손도끼를 날렸다. 뒤이어 황충과 태사자도 여포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아슬아슬하게 방천화극을 막아낸 이의민에게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무심하게 그들을 쳐다보던 이의민의 입이 열렸다.
“누가 우리 애들을 괴롭혔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