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불구대천의 원수 (1)
동탁이 드디어 홍농 앞까지 왔다. 그의 위풍당당하고 거침없는 모습을 보면 자신감 하나만큼은 이의민에 비견될 듯했다.
동탁은 홍농성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고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서영을 다그쳤다.
“이놈! 서영!”
그 쩌렁쩌렁한 외침은 홍농성까지 울릴 정도다. 서영은 식은땀을 흘리면 재빨리 동탁 앞에 부복했다.
“옛! 주군!”
“홍농을 휘저으라고 했지, 홍농성 앞에서 이리 얌전하게 제사나 지내며 날 기다리고 있으라 했더냐? 내 말이 우스운가?”
뜨거운 분노가 느껴지는 동탁의 질문에 서영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잘못하면 장안의 문사들처럼 될 수도 있었다.
“송구합니다! 주군! 소장도 홍농을 함락시키기 위해, 주군께서 오시는 길을 닦아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동탁은 그래도 장안성의 문사들처럼 서영을 바로 죽이지는 않았다. 장수라고 문사와는 딱히 다르게 대하는 건 아니다. 다른 장수였다면 문사들과 마찬가지로 자비 없이 죽였겠지만, 그래도 서영은 동탁이 아끼는 상장 중에 한명 아닌가.
“그래. 노력은 했다고....? 어디 무슨 노력을 어찌 했는지 한번 들어보자꾸나.”
서영에게 자초지종을 듣던 동탁의 얼굴에 호기심이 생겼다. 어느새 그의 화가 많이 풀린 것 같다.
“그리 도발을 하고 함정을 팠는데도 여전히 나오지 않았단 말이냐? 훗! 애송이들이 수양이 제법 대단하군.”
잘하면 서영은 동탁의 분노를 피해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영도 살았다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건 착각이었다.
“저놈들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건 알겠다. 허나 서영, 네가 내 명을 어긴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내 명을 어겼다면 벌을 내려야겠지. 여봐라! 서영의 팔 한쪽을 잘라라!”
충격적인 명에 서영은 휘청거렸다. 동탁의 기분이 풀어져서 처벌 없이 넘어가나 했더니 결국 팔 잘린 병신이 되게 생겼다.
사실 동탁의 기분이 풀어진 건 맞다. 그러니 서영을 죽이지 않고 팔만 자르라는 명을 내린 것이었다.
이때 이유가 슬쩍 다가왔다.
“주군. 들어보니 서 장군의 탓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그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동탁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내 명을 어긴 것을 이대로 넘어가라는 말인가?”
“서영 장군이 그간 주군 밑에서 세운 공을 감안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과는 공으로 덮는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흐음....”
결국 동탁은 이유의 의견을 받아들여 처벌 없이 넘어갔다.
서영은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을 짓고는 이유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유가 서영과 친해서 이러는 건 아니다. 서영은 동탁군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하는 상장이다. 그를 죽이거나 팔 병신으로 만든다면 군 전체에 큰 손실이니 이리 말린 것뿐이다. 사실 이유가 이러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부터 동탁을 이리 말릴 수 있는 자는 이유뿐이었고, 그로인해 동탁군은 균형을 유지한 채 그 세력을 키워갈 수 있었다.
서영에 대한 처분을 마무리 지은 동탁은 홍농성의 세 장수, 서황, 장료, 고순에 대한 호기심을 본격적으로 표출했다.
“봉선. 저놈들이 네 예전 수하들이었다고 들었다. 어떤 놈들이었느냐?”
“한 때 내 부하나 마찬가지였던 놈들입니다. 꽤 쓸모가 많은 놈들이지요.”
여포의 대답에 동탁은 눈을 빛냈다. 수틀리면 수하를 그냥 죽여 버리는 인물이지만, 웃기게도 인재에 대한 욕심이 제법 많았다.
“그럼 그들을 내 밑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느냐?”
“물론 지금은 사이가 틀어진 상황입니다. 허나 그놈들은 예전부터 절 존경해 마지않았던 놈들입니다. 제가 가서 설득한다면 금방 넘어올 겁니다. 아버지.”
“그래. 끌끌. 봉선. 아무튼 네가 내 아들이 된 이후로 일이 잘 풀리는 것 같구나.”
동탁은 욕심이 가득한 눈으로 홍농성을 한번 보고는 곧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동탁의 본대 10만 대군이 일제히 홍농성을 향해 돌진했다.
서영과 이각은 3만 군사들을 이끌고 성의 동편을 맡아 공략했고, 곽사와 번조는 마찬가지로 3만 군사로 서편을 맡았다. 여포와 장제 역시 3만 군사를 이끌고 성문 쪽을 공격했다.
일전에 서영이 3만 군사로 공성을 시도한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무려 3배에 달하는 병력이 삼면을 몰아치고 있다.
게다가 단순히 괴팍하기만 한 인물 같아보이던 동탁의 진가도 여기서 발휘됐다.
“여포에게 전해라! 서영과 장제 쪽으로 각각 2,000씩 증원군을 보내라!”
동탁은 뒤에서 전체적인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시기적절한 명을 내렸다. 그의 오랜 전장 경험이 그대로 드러났다.
맞서는 홍농군 역시 필사의 기세로 수성을 했다. 서황은 서쪽 성벽을, 장료는 성문을, 고순은 동쪽 성벽을 맡았다.
수성을 하는 방법은 서영의 선봉대가 공성을 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적군이 성벽 또는 성문 근처로 도달하기 전 최대한 화살을 쏟아 붙고, 적군이 성벽에 다다르면 그 아래로 끓는 물과 기름, 돌덩이 등을 있는 대로 모조리 쏟아 부었다.
“끄아아악!!”
홍농성 성벽 아래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무수히 많은 시체들이 성벽 아래 쌓였다.
마치 서영의 선봉대를 막을 때처럼 잘 막아내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이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홍농성 아래에 쌓인 시체들보다 몇 배는 많은 병력이 계속 홍농성 위로 오르려 했다. 동탁군은 아군의 시체를 방배삼아 또는 발판삼아 홍농성으로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예전에는 성벽 위에 있던 군사들과 그 아래에 있는 군사들의 수가 비슷했으니 막기가 쉬웠지만, 지금은 세 배나 많은 군사들을 막아야 했다. 수성을 하는 쪽의 손발이 어지러워 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서영의 선봉대는 기병 위주의 군사들이 많아 활을 잘 다루는 군사들이 부족했다. 공성전에서는 수성하는 쪽만 화살을 쏘는 게 아니다. 공성하는 쪽에서 화살을 쏘는 것이 훨씬 불리하긴 하지만 그래도 같이 화살을 쏴줘야 성벽 위의 수성군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다.
그게 안 되니 서영은 공성에 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동탁의 본대는 달랐다. 1만에 달하는 전문 궁수들이 직접 공성을 시도하는 군사들 뒤에서 지원을 하며 성벽 위의 수성군을 요격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성벽 위에서 마음 놓고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있었다면, 지금은 항상 화살이 어디서 날아올지 주시하며 대비해야 했다. 그리 대비를 하고도 성벽 위에서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군사들이 속출했다. 단순히 병력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수성의 난이도 자체가 급격히 올라간 셈이다.
“장군! 피해가 너무 큽니다!”
서황의 안색이 굳었다. 아직 아군의 피해보다 적군의 피해가 훨씬 더 많았지만, 점점 격차가 줄어들고 있었다.
방금 전에도 눈앞에서 군사들이 동탁군의 사다리를 치우려 하다가 화살세례를 맞고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결국 서황은 자신이 직접 나섰다. 오른손으론 대부를 휘두르며 날아오는 화살을 막고 왼손으론 사다리를 넘겨버렸다.
서황뿐만 아니다. 장료와 고순 역시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다. 그래도 다른 장수들 같으면 눈먼 화살에 맞을까 염려하여 뒤에서 계속 지휘만 하겠지만 이들은 직접 나서며 군사들을 사기를 북돋아주고 있었다.
문제는 서황이나 장료, 고순 외에 그리 활약해줄 인물이 없었다. 평범한 병사가 서황, 장료, 고순처럼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어느 정도 무위가 뛰어난 장수들이 그리 해줘야 하는데, 그들로서도 성벽에 걸쳐지는 수없이 많은 사다리를 다 치우는 건 역부족이었다.
결국 하나둘 성벽에 걸쳐지는 동탁군의 사다리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마침내 동쪽 성벽에서 첫 번째로 기어오르는 동탁군이 나왔다.
그 동탁군의 병사는 성벽 위로 올라오자마자 고순에게 베여 쓰러졌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여기저기서 동탁군이 성벽 위로 올라왔다. 고순은 처음 올라온 그 병사처럼 바로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리 할 수 없었다. 고순의 몸은 하나인데 동시에 몇 명이 올라왔으니 어찌 그들을 다 쓰러뜨릴 수 있을까.
점점 성벽 위로 올라오는 동탁군의 수가 늘어났다. 이제는 올라와서 바로 쓰러지는 이도 별로 없다. 오히려 그들의 공격에 홍농군이 쓰러지는 빈도도 제법 늘어났다. 점점 중과부적이다.
“침착하라! 다른 거 신경 쓸 거 없다. 눈앞의 적만 하나 둘 처리한다 생각하라.”
성문 쪽을 맡은 장료는 목이 터져라 외치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그리고는 직접 창을 잡고 성벽 위로 올라온 동탁군을 쓰러뜨렸다.
그 모습에 홍농군 역시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고 있다. 그때 장료 앞을 막는 한 장수가 있었다.
드디어 동탁군에서 병사들뿐만 아니라 장수까지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것도 이름 없는 하급 장수도 아니다. 여포와 함께 중군을 맡은 장제였다.
“흐흐! 대단한 놈이군. 주군께서 탐을 내실 만하구나. 나는 장제라고 한다. 이의민 같이 시시한 놈 말고 우리 주군을 섬기는 거 어떠한가?”
“감히 네놈 따위가 주군을 모독하는가?!”
하지만 그 말을 꺼낸 것은 실수였다. 이의민을 모독하는 말에 장료의 기세가 이전보다 훨씬 흉폭 해졌다.
그간의 전투로 체력을 제법 소비했을 텐데 엄청난 기세를 보이는 장료를 보며 장제는 혼비백산했다.
‘크으윽! 이놈은 지치지도 않나?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있단 말인가?’
형편없이 밀리는 장제. 주변에서 몇몇 동탁군이 그런 장제를 도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장료의 무자비한 공세에 장제 대신 죽을 뿐이다.
장제는 도망을 치려다가 꼴사납게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꼼짝없이 죽게 된 장제. 그래도 장제는 운이 좋았다.
장료의 창이 장제를 향하는 순간 누군가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쾅!!
장료의 창이 가볍게 날아갔다.
“흐흐! 오랜만이군. 문원.”
“네 이놈! 여포!”
장료의 창을 날린 장본인은 바로 여포다.
“뭘 그리 흥분을 하는가? 보니까 장제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이 자리에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필요가 있나? 날 존경한다며? 우리 전에 좋았잖아. 약속하겠다. 나와 지금 내 아버지인 동탁을 따르면 부귀영화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장료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바로 침을 뱉으며 답했다.
“퉤! 아버지? 누구를 말하는 건가? 네 아버지는 패륜아에 의해 원통하게 목숨을 잃으시고, 아직 시신이 흙이 되지도 않았다. 동탁이 네 아버지라고? 뻔하지. 또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동탁 역시 네놈 손으로 죽이겠지.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 푸하하하! 봉선아. 이 놈! 봉선아! 하늘이 내린 재주를 지녔음에도 어찌하여 그리 어리석은 짓만 골라 하느냐?”
장료의 비웃음에 여포는 안색이 굳었다. 여포는 예전에 좋았던 사이만 기억하면서 쉽게 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여포는 설득과 회유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방천화극을 들었다.
“아무래도 관짝을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군.”
여포가 방천화극을 내리쳤다. 장료는 재빨리 물러서며 날아갔던 창을 다시 회수하고 여포에 맞섰다. 하지만 장료는 기껏 되찾은 창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놓치고 말았다. 이미 체력도 다 떨어져서 버틸 힘이 없었다. 창도 없이 여포에 맞서는 장료.
“흐흐! 이제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