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움직이는 공포의 군주 (2)
동탁이 예상한대로 이의민도 동탁군의 출병 소식을 진작 알았다. 항상 척후를 보내 동탁군을 예의주시한 덕분이다.
이의민은 즉시 승상부에 수하들을 모두 소집한 후 군사회의를 열었다. 순유, 곽가, 정욱 등의 참모들과 곽봉, 황충 등의 장수들이 저마다 의견을 표했지만 회의는 의외로 금방 끝이 났다.
이의민군은 현재 장안 바로 앞에 있는 홍농까지 점령한 상태다. 장안의 동탁이 밀고 들어온다면 1차적인 공격 지점이 바로 홍농이었다. 홍농의 방어를 위해 수비군을 보내야했다.
“동탁이 드디어 움직이는 군요. 홍농에 증원군을 보내야합니다. 현재 홍농에는 수비군이 3만정도 밖에 아니 됩니다. 수성을 한다면 동탁군에게 바로 밀릴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겁니다. 동탁과 그 휘하 모사들과 장수들의 능력도 출중하니 결코 얕봐서는 아니 됩니다.”
순유가 다른 이들의 의견을 정리해서 이의민에게 보고했다.
“그럼 어서 홍농을 도와야겠군. 이미 낙양에도 충분한 군사들이 있으니 내가 10만 정도 끌고 가면 되겠나? 들어보니 동탁군도 10만에 달한다던데?”
“그건 좀 위험합니다. 낙양은 제도로서 언제든 여유로운 수비 병력이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게다가 하북의 원소와 공손찬이 각각 기주와 유주를 평정했다고 합니다. 이제 둘이서 하북을 놓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일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언제든 같이 내려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낙양에 수비 병력을 좀 많이 남겨둬야 한다는 뜻이군. 그렇다면 6만 군사들만 이끌고 홍농으로 가겠다. 홍농에도 3만이 있으니 얼추 비슷한 병력이군. 그럼 삼공과 정욱, 만총, 종요, 우금, 악진은 낙양을 방어하고 나머지는 홍농으로 따라와라.”
신속히 결정을 내린 이의민은 즉시 6만 군사들을 데리고 출병했다. 지금까지 10만이라는 대군이 심심찮게 나와서 체감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6만이라는 군사도 어마어마한 군대였다. 그들이 출병하여 다른 지역으로 간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6만 군사들이 낙양성을 완전히 빠져 나가려면 빠르면 2주, 넉넉잡아 한달은 걸리는 일이다. 실제로 10만의 동탁군은 장안성에서 출병할 준비를 시작한 지 3주가 지났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 장안성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의민군은 속전속결로 출병할 채비를 마쳤다. 그간 낙양에서도 군사들이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언제든지 출병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낙양을 빠져 나온 이의민군은 낙양의 서쪽에 위치한 함곡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쉬겠다.”
그의 한혈마는 아직 지치지 않았지만 보사들의 체력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곽봉의 지휘 아래 병사들은 식사와 잠자리를 준비했고, 이의민은 순유에게 그간 신경 쓰였던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공달. 그런데 일전에 서량에는 동탁과 마등, 두 명의 제후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마등의 이름은 잘 보이지 않던데 그는 어떤 자인가?”
“마등과 한수는 제후라기보다는 서량의 반란군들입니다. 동탁 입장에서는 반란군들을 같은 편으로 회유하면 명분에서 잃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동맹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서량에 대해 마음을 조금 놓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그들이 손을 잡았습니다. 아마 모종의 뒷거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반란군이라.... 그래도 꽤 능력은 있는 놈인가 보군. 지금 동탁의 세력을 보면 반란군이 그들을 상대하기 매우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물론 마등과 한수, 둘 다 제후로서 나름 출중한 능력을 갖춘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사실 마등은 그 자체 세력이 무섭다기보다는 그의 뒷배인 강족 덕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마등은 한족과 강족의 피를 반씩 물려받은 자라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강족? 그만큼 강한 놈들인가? 이름만 들으면 강한 것 같긴 한데....”
역시 이의민의 최고 관심사는 상대가 어느 정도 강하느냐다.
“저도 소문으로만 들은 것이 전부라서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확실히 군사 개개인의 전투력은 한족의 군사들보다 더 강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념 자체가 ‘강한 자만이 지배를 할 수 있다’ 이니 말이죠. 허나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 실제로 붙어봐야 알 것입니다.”
“지금 동탁군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만나게 되면 내가 검증을 한 번 해봐야겠군.”
“하하. 역시 주군의 호승심은 대단하십니다. 소문에 따르면 강족 외에도 주군께서 꽤나 흥미를 가지실 부분이 많습니다. 마등의 장자가 그리 걸출하다고 합니다. 아직 약관도 지나지 않은 소년장수인데 이미 서량에선 금마초를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마초라는 이름을 들은 이의민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웬만해서는 자신이 아는 이름이 잘 나오지 않는데, 마초라는 이름은 확실히 알았다.
“마초?! 그래. 마초라면 분명 오호 뭐시기라는....”
“예? 오호...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야. 오호! 라고. 감탄사였어. 어쨌든 마초가 있단 말이지... 흐흐! 그 마초라는 놈을 어서 보고 싶군.”
이의민의 호승심이 또 도졌다.
승상이 되었음에도 상대에게 대한 전의를 불태우는 이의민. 그런 모습에 순유는 질리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이의민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 해도 늘 똑같은 모습일 것 같으니까.
**
“거기! 대열을 흐트러트리지 말라고 내가 몇 번 말하는가?!”
“죄송합니다!”
“한번만 더 실수하면 군법을 적용할 것이다. 자! 처음부터 다시 한다.”
홍농성에서는 매우 살벌한 분위기로 군사훈련이 이어지고 있었다. 동탁군이 드디어 출병했다는 소식이 이미 파다하게 퍼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엄했다.
사실 홍농에 있는 모든 지휘관들이 이런 분위기를 내는 건 아니었다. 유독 장료만 잔뜩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로 군사들을 다그쳤다.
군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장료는 조금의 실수가 있어도 무조건 처음부터 다시 훈련을 했다. 그로 인해 아침부터 시작된 훈련이 깜깜한 밤이 되었는데도 계속되고 있었다.
훈련이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것도 힘들고 답답한 일이었지만, 그 훈련이 평소에 비해 몇 배나 더 강도가 높았다. 아무리 평소에 훈련이 잘 된 이의민군이라 해도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감히 정북장군인 장료의 명령을 거부하기가 힘들었고, 어쩔 수 없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장료도 좋아서 그리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훈련을 지시하면서도 뭔가 쫓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누가 봐도 평소와는 전혀 다른 장료의 모습이었다. 장료는 여태껏 그 어떤 전투를 앞에 두고도 평정심이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털썩!
한 병사가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거의 탈진 직전이었다.
“이놈! 이것도 버티지 못해서 실전에서는 어찌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무서운 기세로 병사에게 호통 치는 장료.
보다 못한 서황이 걱정스러운 듯 다가가서 물었다.
“문원. 너무 지나친 거 아니오?”
“아니오. 대적을 상대하는데 오히려 이 정도로도 부족하오.”
“잘 보시오. 문원. 우리 군사들이 지나치게 긴장해서 이쪽의 눈치만 보고 있지 않소. 그러니 계속해서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소. 적당한 긴장은 필요한 것이나 지나친 긴장은 없는 것만 못 한 것이오. 더군다나 시간이 너무 늦었소. 군사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하오. 그러니 이만 하시오.”
군사들은 이제 탈진 직전이었다. 여기서 더 훈련을 하다가는 방금처럼 쓰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는 군사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제야 장료도 초조한 표정이 풀렸고, 군사들의 상태가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공명의 말대로 내가 너무 군사들을 몰아세운 것 같소. 내 실수요.”
서황은 장료가 왜 이리 동요를 하는 건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문원. 내 문원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오. 나 같아도 철천지원수가 온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하오.”
어느덧 둘에게 다가온 고순도 서황의 말을 거들었다.
“공명의 말이 옳다. 문원.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동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 목적을 이루면 과거 주인의 복수는 자연스레 딸려오는 것이다. 그러니 평정심을 유지한 채 어떻게 하면 적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을지 생각하라. 이만 훈련을 종료하고 군사들에게 휴식을 주거라.”
“예. 고순 장군.”
고순의 원한 역시 장료에 비해 절대 작지 않았다. 하지만 고순은 장료와 달리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동탁만을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장료도 깨닫는 바가 있다.
장료는 자신을 자제시켜 준 두 사람에게 감사하며 훈련을 종료시켰다. 그리고 장료 역시 모처럼 편안한 밤을 맞이했다.
다음 날, 홍농에 아침이 밝았다.
“장군! 정체불명의 적이 몰려옵니다. 그 수는 대략 2만보다 조금 적은 것 같습니다.”
장안에서 오는 군대라면 틀림없이 동탁군일 터였다.
“전군! 경계 태세! 적이다!”
“명심해라. 우리가 맡은 임무는 방어다. 성문이 절대 열려선 아니 된다.”
홍농을 지키는 서황, 고순, 장료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이며 동탁군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서영은 그런 세 장군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셋 다 아직 경험이 일천한 장수들일 뿐이었다.
“클클. 한낱 애송이 3명 인줄 알았더니, 그래도 제법 장수 티가 나는 놈들이구나. 나는 서영이라고 한다. 누가 나의 칼을 받아 볼 테냐?”
서영은 일부러 셋을 도발하며 그들이 성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홍농성의 이의민군은 성문을 굳게 닫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좀 더 입을 털기로 한 서영.
“거기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네놈이 고순이냐? 그럼 네가 장료겠군.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아냐고? 우리 여 공자께서 네놈들에 대해 말씀 많이 하셨거든. 꽤 쓸 만 한 놈들이라고 말이다. 어떠냐? 지금이라도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면 다시금 여 공자와 함께 할 수 있다. 주군께서도 최고의 대우를 해주실 것이다.”
당연히 서영도 그들이 진짜로 항복할 거 같아서 한 얘기는 아니다. 여 공자를 강조한 것도 그렇고 어디까지나 그들이 성문을 열고 나오기를 유도하는 도발이었다.
어제의 장료였다면 넘어갔을 수도 있다. 여포 때문에 매우 예민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서황과 고순의 조언 덕에 이제는 평정심을 가지고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릴 수 있게 된 장료는 아무렇지 않게 서영의 도발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