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96화 (96/175)

96. 움직이는 공포의 군주 (1)

기주의 업현.

업성 안에 있는 관청에는 두 사내가 상반된 태도로 서 있었다. 한 사내는 우두커니 서서 다른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내는 무릎을 꿇은 채 비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 살려주시오. 원 태수. 날 살려주면 앞으로 평생 원 태수의 오른 팔이 되겠소.”

살려달라고 사정하고 있는 자는 바로 얼마 전까지 이 곳 업성의 지배자이자 원소와 함께 기주를 양분했던 한복이었다. 그리고 그런 한복 앞에 있는 사내는 바로 원소다.

둘이 서 있는 모습과 상반된 태도를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기주를 놓고 다툰 원소와 한복의 전쟁이 드디어 결판이 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쟁의 시작은 명백히 한복의 우위였다. 도적 토벌이 끝난 후 이의민의 폭로에 의해 원소의 세력은 크게 위축됐다. 황궁에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그가 데리고 있던 군사들을 절반이나 바쳐야 했다. 당장 그것만 해도 부담스러운데 이후 부과되는 무거운 세금까지 생각하면 더욱 암울했다.

기주를 놓고 다투던 한복 입장에서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원소가 기주로 돌아오는 즉시 그를 쳐서 기주를 오롯이 자신의 손아귀에 두려했었다. 하지만 원소는 바로 기주로 가지 않고 병주로 가서 여포와 힘을 합쳤다.

처음에는 원소가 기주를 버리는 줄 알고 좋아했던 한복이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원소는 여포를 꼬드겨 그와 함께 병주의 힘을 흡수했다.

그리고는 바로 기주를 노렸다. 그래도 한복은 원소와 여포의 연합에 맞서 제법 잘 싸웠다. 특히 중간에 반 이의민 연합이 발표되면서 여포까지 이탈했다.

하지만 한복은 이미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다. 여포가 빠지면서 전쟁이 장기화되나 했지만 몇 번의 판단 실수, 그리고 수하들의 충언을 제대로 가려듣지 못한 채 원소에게 패배했고 끝내 본거지인 이곳 업성까지 내주고 말았다.

이제 이곳에는 한복의 수하나 군사들은 없다.

원소는 자신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한복을 오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한 자사. 그래도 한때 나와 맞서서 싸웠던 제후치고는 너무도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요? 체통을 좀 지키시지.”

“나, 난 그런 것 필요 없소. 제발 살려주시오.”

한복은 계속해서 목숨을 구걸했지만, 안타깝게도 원소는 그 구걸을 들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후! 아무튼 참으로 고맙소. 그대가 전풍이나 저수의 말만 들었어도 무릎을 꿇은 자는 나였을 것이오. 그러니 나는 그대를 반면교사 삼아 그들의 말에 더욱 귀 기울여서 천하를 평정할 것이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가 살아 있으면 아니 되오. 잘 가시오.”

“워, 원 태수! 원 태수!”

한복이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소용없었다. 원소가 자랑하는 장수, 안량이 다가와서 단칼에 한복의 목을 베었다.

“그래도 장례는 정중히 치르도록 하라.”

원소는 자신의 또 다른 상장군 문추를 불렀다.

“문추. 한복의 신하들은 어찌 되었나?”

“투항한 자를 제외하곤 모두 집에 문을 걸어 잠근 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문추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원소에게 보고했다. 그는 끝까지 한복을 따르겠다며 마음을 돌리지 않는 한복의 신하들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아까운 모양이다.

“다른 놈은 필요 없다고 해도 전풍, 저수, 심배, 장합, 이 네 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밑에 두고 싶다. 물론 내 상장군인 자네와 안량이 결코 그들에게 떨어지는 인재는 아니다. 허나 내 대업을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해.”

“하지만 주군께서는 이미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그들 없이 말입니다.”

“한복을 상대하는 것 정도야 가능했지. 허나 이제 첫걸음일 뿐이야. 앞으로는 더 강한 적을 상대해야 하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도 반드시 필요한 인재들이야.”

원소가 말하는 더 강한 적은 당연히 이의민이었다. 그를 생각한다면 언급한 네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족할 것 같다.

문추는 자신의 주군인 원소가 계속 이의민을 언급하는 것이 불편했다. 물론 문추도 이의민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이의민이 싸우는 것을 직접 본적이 없는 그로서는 원소가 너무 지나친 걱정을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자신의 주군인 원소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겠습니다. 주군. 그럼 소장이 그들을 좀 더 설득해보겠습니다.”

“아니야.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이 좋겠군. 그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라. 내가 직접 그들을 만날 것이다.”

**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니는 객잔이 있다. 또 객잔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곳은 낙양이 아닌 위군 업현의 객잔이다.

그 곳으로 행색이 초라한 사내 십여 명이 들어서고 있었다. 객잔 주인은 그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행색이 영락없는 거지 떼였기 때문이다.

“훠이! 우리 먹고 살 것도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슈.”

이때 거지들 중 덩치가 제법 큰 사내가 화를 내며 주인장에게 따졌다.

“감히! 이 분이 누군지 알고....!”

그런데 거지들 중 그나마 단정한 외모와 옷차림을 한 거지가 덩치 큰 거지를 말렸다.

“되었다. 묘재. 지금 우리 꼴을 보고 그 누가 우리를 영웅이라 믿겠느냐. 주인장. 씻을 물과 따듯한 음식, 그리고 술 좀 내어주시오. 돈은 선금으로 치르겠소.”

놀랍게도 거지 사내의 품속에서 제법 많은 엽전이 나왔다. 객잔 주인은 그 엽전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태도가 바뀌었다.

“아...! 하하하! 손님이셨군요. 진작 말씀을 하시지.... 여기로 오십시오.”

거지들은 객잔 주인이 마련해준 물로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때를 말끔히 씻어냈다. 그제야 이들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방금 전까지는 별 볼일 없는 거지 떼들이었지만, 씻고 나니 영웅의 풍모가 엿보였다.

이들은 바로 조조 일행이었다. 낙양에서 어렵게 탈출한 그들은 황하를 건너 하북으로 왔다. 낙양을 탈출하면서 무일푼에 따르는 군사가 하나도 없어진 그들이었다.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낙양으로 가서 이의민의 목을 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결국 이리저리 떠돌다가 하북에서 흘러나오는 소문을 듣고 온 곳이 여기다.

원소가 어릴 적부터 친우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넘어서야 할 대상으로 보는 조조 입장에서는 썩 유쾌한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조조에게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아무런 연도 없는 곳에 갔다가는 괜히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지도 몰랐다. 물론 조조라는 인물이 누구에게 이용당할 인물은 절대 아니지만, 그만큼 모든 세력과 힘을 잃었으니 누구에게도 함부로 몸을 의탁하기 힘들었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선택한 쪽이 바로 원소다.

“결국 본초가 한복을 쓰러트렸구나.”

거지꼴을 벗어던진 순욱이 답했다.

“듣자하니 원소가 제법 꾀를 썼습니다. 하내를 치러가던 여포의 군사들이 사실은 한복의 뒤를 노린다는 소문을 냈나 봅니다. 전풍이나 저수 같은 책사들은 모두 원소의 계략이라고 말렸지만 겁이 많은 한복은 그들의 조언을 믿지 아니 하고, 여포군을 토벌하러 군사를 보냈다가 오히려 원소에게 뒤를 내주고 말았다고 합니다.”

순욱의 설명을 듣고 조조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순욱의 조언을 듣지 않고 패망한 자신과 겹쳐 보이면서 한복에게 동병상련의 감정까지 느꼈다.

“하북의 사웅도 이제 두 명으로 좁혀졌구나. 원소와 공손찬이라.... 문약. 내가 이대로 원소에게 가는 것이 맞겠는가?”

이미 업까지 와 놓고 갑자기 다른 얘기를 하는 조조다.

“주군. 아무리 봐도 원소에게 붙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그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인물입니다. 주군과 대립을 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주군을 품음으로서 자신의 포용력을 만천하에 드러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 겁니다.”

순욱의 말까지 듣고 보니 처음 생각대로 원소에게 가는 것이 맞아보였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자꾸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흐음! 역시 내 생각도 같은데.... 어찌 자꾸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인지....”

조조는 애써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

조조 일행은 무슨 소리인가 하며 일제히 웃음소리가 난 탁자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죽립을 눌러쓴 남자 둘이 있었는데 한 명은 평범한 체격이었고, 다른 한명은 체격이 제법 거대해 보였다. 둘 중 평범한 체격의 사내가 웃고 있었다.

그런데 웃고 있는 사내를 보니 명백히 조조를 보고 비웃는 것 같았다. 하후연은 그 사내에게 성질을 내며 옆 탁자에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하후연은 옆 자리에 가지 못하고 몸을 움찔 했다. 웃고 있는 사내 옆에 있는 덩치 큰 사내가 은연중에 기운을 풍겼다.

하후연은 그 기운을 느끼고 깨달았다. 그 덩치 큰 사내가 절대 자신의 하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도 하후연은 자신이 움츠러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사내들에게 소리쳤다.

“뭐가 웃긴 것이냐?!”

이에 웃었던 사내가 죽립을 벗으며 얘기했다.

“천하의 영웅 조조가 둥지를 고르는 꼴이라니. 엿들은 건 미안하오. 아는 분이라 아는 척을 하러 왔다가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소.”

죽립을 벗은 사내를 본 조조의 눈이 커졌다. 그를 하북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 못했었다.

“그대는.... 현덕이 아닌가?”

**

둥둥둥둥!

넓은 평야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안에서 동탁이 드디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병력이 무려 10만에 달했다.

낙양의 이의민을 상대하기에 병력만 보면 결코 모자라지 않는 대병력이었다.

동탁이 가운데에 있고 그 좌우에는 그의 상장들이 도열해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 상장의 무리 속에 붉은 말을 탄 여포가 있었다.

동탁은 여포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동탁은 여포를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기뻤다.

“봉선. 그대가 있어 든든하구나. 팔은 이제 괜찮은가?”

“아무 문제없습니다. 아버지. 오히려 이 적토마 덕분에 나는 더 강해졌습니다.”

아버지인 정원을 죽인 여포는 이제 동탁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끌끌끌. 암! 그래야지.”

듬직하게 여포를 포함한 상장들을 둘러보던 동탁은 갑자기 창을 하나 뽑더니 앞으로 던졌다. 이전처럼 누구 하나 조지려고 그런 것일까? 하지만 던진 힘이나 속도를 보면 그렇지는 않아보였다.

자세히 보니 창끝에는 깃발이 달려 있었다. 동탁은 자신의 상장군 중 하나인 서영에게 명을 내렸다.

“서영! 정예병 3만을 주겠다. 지금쯤이면 이의민도 우리가 출병했다는 것을 알았을 터, 먼저 가서 홍농을 휘저어 놓아라. 내 깃발을 그 곳에 꽂아라.”

“충! 소장 서영. 주군의 명을 받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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