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95화 (95/175)

95. 줄을 잘 탄 결과 (2)

승상부 앞으로 잡아들인 낙양의 유지들과 전현직 관리들의 처분이 마무리 됐다. 특히 이들의 꼭지 점이라 할 수 있는 최열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죽이는 것까지는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고 부르짖는 이도 있었지만, 이의민은 그간 나라를 좀 먹었던 최열의 행태를 결코 가볍게 넘길 생각이 없었다.

최열이 죽고 그 외에도 각종 부정과 비리에 깊숙이 가담한 자들 역시 처단을 피하지 못했다. 죄가 그리 무겁지 않은 자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낙양에서 쫓겨났다.

관련자들의 수가 엄청났기에 낙양은 일시적으로 혼란이 올 것 같았다. 낙양에서 크고 작은 일을 하던 이들이 동시에 사라진 셈이니 그 공백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의외로 혼란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처벌을 받아 공백이 된 자리를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차지했다.

그럼 이들은 또 어찌 뽑힌 이들인가? 더 이상의 매관매직은 없었다.

대부분 이의민과 순유, 곽가, 종요, 정욱 등이 직접 뽑은 이들이었다. 부정부패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전, 밤낮없이 관직과 인재들의 목록을 살피며 공에 따라 관직을 제수한 덕분이다.

그렇게 상식적인 관직 제수가 이루어짐에 따라 숨어있던 낙양의 인재들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양표의 말대로 선비들이 다 썩은 것은 아니었다. 매관매직이나 최열의 패거리에 염증을 느낀 이들은 속세에 눈과 귀를 닫고 학문에만 매진했었다.

사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이의민 역시 기존의 하진이나 최열과 다를 게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태의 상징인 최열이 숙청되고 매관매직이 폐지됐다. 그리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관리들이 처벌되고 그 자리에 정말 오를 만한 이들이 오르자 이들 역시 새로운 권력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단순히 낙양의 관리들만 바뀐 게 아니다.

이의민은 순유의 조언을 받아들여 장부를 철저히 조사했다. 그리고 낙수를 포함 억울하게 흑사회에게 피해 입은 백성들까지 구제했다. 백성들이 그동안 관청에 백날 하소연해봤자 소용이 없었는데, 이의민이 그들의 목소리를 다 들어주고 있다. 이제 낙양의 백성들이 이의민의 이름을 연호하고 아침마다 승상부를 향해 절을 하는 광경은 낯설지 않다.

완전히 달라진 낙양의 모습은 이전에 없던 활기를 불어넣었다.

“미관말직이라도 좋소. 이 나라를 위해 일할 기회를 주시오.”

“아! 거 줄 좀 서시오. 어허! 밀지 말라니까!”

우도위였다가 수문보사로 보직이 바뀐 마선식은 수많은 사람들을 검문하며 투덜대고 있었다.

“젠장! 오지게 많군.”

입은 투덜대고 있지만 그렇다고 검문을 대충하지는 않았다. 외성을 통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마선식은 우도위 시절 비리 때문에 결국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그 죄질이 가볍다고 여겨져 추방까지는 되지 않았고, 대신 재산을 상당 부분 압류당하고 보사로 강등을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충분히 좌절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마선식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의민의 시대가 오니 뇌물 같은 것을 먹이지 않고 출세를 할 수 있는 길이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마선식은 다른 그 누구보다 열심히 수문보사 일을 수행하며 출세에 대한 야망을 놓지 않았다.

“자! 줄을 서시오! 한 명씩 철저하게 검문을 할 것이오.”

그때 외성 성문 앞으로 수백 명에 달하는 행차가 이어졌다. 대부분 말을 타고 있었고, 가장 선두에 있는 이는 화려한 갑주까지 걸치고 있었다. 딱 봐도 높으신 분의 행차였는데, 대부분의 면면을 보니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아마 지방에서 힘 좀 쓴다하는 호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예전이었다면 마선식은 이들을 보자마자 깍듯하게 인사하며 외성 안으로 들여보냈을 터였다. 하지만 마선식의 의식도 많이 달라졌다.

‘딱 봐도 한 가닥 하게 생겼는데.... 그래도 나는 낙양의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이다. 상대가 그 누구라도 경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 혹시 내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들에게 쫄지 않고, 당당하게 검문을 했다는 소문이 승상의 귀에 들어간다면....?’

마선식은 잠깐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예전의 위치로, 아니. 그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는 발칙한 상상 말이다.

다른 보사들이 전부 쫄아서 비켜주는 가운데 마선식 혼자서만 일행의 앞길을 막으면서 창을 들고 외쳤다.

“멈춰라! 이곳은 낙양이다! 그 누구든 검문도 없이 함부로 통과할 수 없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말이다.

퍽!

“꽥!!”

선두로 들어오던 장수 하나가 귀찮다는 듯 그대로 마선식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쯧쯧! 천한 놈이 감히 누구의 행차를 막는 것이냐? 어이! 여기 지휘관은 없는가? 우리가 온다는 전갈을 못 들었느냐?!”

그제야 이곳의 책임자인 동문도위가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바짝 엎드렸다.

“호, 혹시 사도 대인과 사례교위, 경조윤 대인이십니까?”

“그렇다! 뒤에 계신 분이 바로 사도 원술님이시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 계신 분이 사례교위이신 만총님, 그리고 왼편에 계신 분은 경조윤 사마방님이시다.”

장수의 소개에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엄청난 이름이 나와서이리라.

사도나 사례교위, 경조윤 같은 관직을 떼고 봐도 어마어마한 이름들이다. 무려 천하 이대세가인 원가와 사마가의 가주들이 아닌가.

‘워, 원술과 사마방....? 빌어먹을... 하필이면....’

마선식은 그제야 자신이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어떤 상대에게도 굴하지 않고 담담하게 검문을 이어가는 모습을 그렸건만, 하필이면 그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이렇게 오늘도 출세와는 거리가 더 멀어지는 마선식이다.

그렇게 좌절하는 마선식을 뒤로하고 원술 일행은 유유히 낙양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승상부였다.

“뭐가 이리 시끄럽나 했더니 원술 자네였군.”

제법 친근한 어투로 원술을 맞이하는 이의민이다. 원술은 그런 이의민을 보며 속으로 심호흡을 한번 했다.

처음 인연은 분명 좋지 못한 인연이었다.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표현 말고는 둘의 사이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그와 한배를 타고 한편이 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도라는 관직까지 받게 됐다.

여기까지 오니 처음 이의민을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분노와 증오는 많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지금은 아예 없어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단지 원술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그걸 표현하지 못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이의민이란 인물 자체를 부정할 수 없게 된 원술이다. 그가 보기에도 이의민이 단순무식하고 힘만 센 무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평범하게 만드는 영웅의 기운이 이의민에게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이의민과 손을 잡지 않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적으로서 이의민을 상대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삼공으로서 서 있는 게 아니라 하진과 같은 최후를 맞이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쨌든 이의민과 손을 잡은 것은 다시 생각해도 백번 옳은 선택이었다.

‘나 혼자 이리 천하를 뒤엎을 수 있었을까? 내 옆에는 노숙도 있고 기령도 있지만.... 그건 힘들다. 난 절대 이의민처럼 할 수 없어. 그렇다면 결국 이의민 곁에 있는 것이 내게 가장 좋다.’

이미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술의 남은 알량한 자존심이 이의민에게 완전히 고개를 숙이도록 놔두지 않았다. 자존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온 그가 아닌가.

“나, 날 사도로 만들어준 것은 고맙긴 하군. 허나 착각하지 말게. 난 자네에게 사도 자리를 구걸한 적은 단 한번도 없어. 자네가 내게 사도 자리를 이리 주는 걸 보니 이 몸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 온 것뿐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누구에게도 굴종할 생각 없어.”

원술의 얘기에 이의민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굴종이라니 뭔 말을 그리 하나. 우린 이제 누가 뭐래도 친우가 아닌가. 친우끼리 그리 말하면 섭하지.”

“치, 친우....?”

생각지도 못했던 이의민의 말에 원술의 표정이 잠깐 풀어졌다. 그는 애써 표정을 굳히려 애쓰며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흐, 흥! 그렇다고 누가 좋아할 줄 아느냐? 하지만 친우의 부탁을 아니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뭐 언제든 내 힘이나 우리 가문의 힘이 필요하면 말하게.”

“흐흐. 고맙군. 역시 나의 둘도 없는 벗이군.”

“뭐, 뭘... 친우끼리... 흠흠! 먼 길을 왔더니 시장하군. 이만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네.”

당황한 채 어색한 표정을 도저히 숨기지 못하고 물러나는 원술을 보며 이의민은 피식 웃었다.

“흐흐. 하여간 다루기 쉬운 놈이라니까.”

뒤이어 만총과 사마방도 이의민에게 인사를 해 왔다.

“오랜만이야. 백녕.”

“주군.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모자라 결국 여포를 놓쳤습니다.”

“아니야. 그 정도만으로도 놀라운 성과야. 잘 와주었네. 공달이 보면 아주 좋아할 거야.”

“처음 뵙겠습니다. 사마가의 가주 사마방이라고 합니다.”

“오오! 어서 오시오. 말씀은 많이 들었소. 왕광과 만총을 도와 여포를 물리치는데 아주 크게 일조하셨다고....”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실상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저희 둘째가 다 한 것이지요.”

“뭐 그거나 그거나.... 아무튼 잘 오셨소. 일단 푹 쉬시오. 장안은 내가 되찾아주겠소.”

“감사합니다. 승상.”

사마방까지 마주한 이의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하 이대가문의 가주라서 굉장히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여포를 상대로 맹활약했다는 보고를 들어보니 더 기대가 됐다.

하지만 막상 사마방과 대면을 해보니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단순 느낌일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감이 웬만해서는 틀린 적이 거의 없지 않은가.

‘정말 그 둘째라는 어린아이가 다 했다는 말인가? 이름이 뭐라고 했지? 사마.... 아무튼 그 아이를 한번 보고 싶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급하게 전령 한명이 뛰어왔다. 그 전령을 본 이의민의 눈이 빛났다. 전령의 복장을 보아하니 멀리서 온 전령이었다. 낙양 내부가 아닌 외부의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이다.

“승상! 장안에 보낸 척후들의 소식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역시 장안에서 온 소식이었다. 최근 장안에 제법 많은 척후들을 보내서 그들의 동향을 조금도 놓치지 않게끔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

“말해보라.”

“장안의 동탁이 곧 출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군마들에 사용할 건초가 수시로 드나들고 있고, 군사들의 훈련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이제 동탁과....”

그 이름도 유명한 동탁과의 전쟁이 슬슬 시작되려 하고 있다. 이의민이 상념에 빠져 있는데, 그 상념을 깨는 이가 있었다. 또 다른 전령이었다.

“승상! 하북에 보낸 척후들의 소식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장안에 이어 하북에서도 심상찮은 움직임이 보고되고 있다.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일에 불안할 법도 한데 이의민은 오히려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제 다시 시작인가? 모두 승상부로 모이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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