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94화 (94/175)

94. 줄을 잘 탄 결과 (1)

양주 단양군 강승현.

이곳 강승현은 양주에서도 북쪽에 위치해 있는 덕에 기다랗게 펼쳐진 장강의 절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다.

소문이라도 퍼졌는지 이곳에서 하염없이 장강을 바라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바로 손견이었다.

장강을 보는 그의 표정은 참으로 씁쓸해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처음 군을 일으켰을 때만 해도 강을 넘어 낙양으로 간 이후 연합과 함께 이의민을 처단하려고 했다. 이의민과는 딱히 접점이 없어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내대장부로서 반드시 견제해야 할 적이라 여겼다. 이의민이 얼마나 단기간에 무섭게 치고 올라온 인물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의민과 싸울 날을 고대했던 손견이지만, 그와의 싸움은커녕 장강을 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다. 처음 손견을 따라왔던 군사들은 어느새 절반 이상 사라져 있었다.

그런 손견과 같은 마음인 듯 그의 수하들 역시 침통한 표정이었다. 손견의 최측근인 정보도 괴로운 표정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주군... 이 이상은 어렵습니다.”

손견은 대꾸 없이 그저 장강 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굳이 정보가 말하지 않아도 손견 역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장강 위에서 보란 듯 떠있는 저 배들 때문이리라.

장강 위의 배 한척 위에서는 현재 전쟁 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법한 질펀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호호호. 대인. 소녀의 술 한 잔 받으시와요.”

“낄낄! 오냐 오냐. 오늘 밤 내 달빛과 함께 너를 취하고 말 것이야.”

“어머?! 대인. 소녀 민망합니다.”

“응? 하하하! 내가 기분이 좋아 말실수를 했구나. 너와 함께 술에 취하겠단 말이었다. 크하하!”

그 배는 분명 군선으로 보였는데 갑판 위는 군사들이 아니라 수십 명의 미녀가 있었다. 그리고 온갖 금은보화들과 비단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금은보화와 미녀들 사이에 화려한 복장을 갖춰 입은 한 사내가 술을 마시며 미녀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손견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들끓고 있었다. 결국 손견은 분통을 참지 못하고 배 위의 사내에게 외쳤다.

“공로! 명가의 자제면 자제답게 행동해야 할 것 아닌가?! 지금 날 조롱하는 것이냐?!”

그렇다. 배 위에서 미녀들을 희롱하며 놀고 있는 그 사내는 바로 현재 손견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원술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죽네 사네 하면서 싸웠던 적 우두머리가 대놓고 전장 한복판에 술판을 벌이고는 조롱을 하는 셈이었다.

원술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면서 손견의 분을 더 돋웠다.

“응? 너는 손견이 아니더냐? 저번에 열심히 도망치길래 이 근처에 없는 줄 알았잖느냐? 언제부터 거기 있었느냐?”

“이런 뻔뻔한 놈!”

손견은 급기야 화를 참지 못하고 활을 들어 원술에게 겨눴다. 하지만 활을 든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뿐 차마 화살을 날리지는 못했다.

“음? 거기서 쏘게? 크하하하! 요즘 광대놀음이 별로 재미가 없다 했더니, 그게 바로 너 때문이었구나! 거기서 백날 쏴봐라. 여기까지 오는가.”

안타깝게도 원술의 말대로 손견과 배까지의 거리는 화살이 닿지 않을 만한 거리다. 홧김에 활을 들긴 했지만 오히려 상대의 놀림감만 되었으니 더 분통이 터지는 손견이다.

원술은 그런 손견을 놀리는 게 어지간히 재밌는지 쉬지 않고 입을 털고 있다.

“하하. 많이 열 받았나? 날 죽이고 싶겠지? 열 받아서 죽을 것 같지? 허나 어쩔 텐가? 못 죽이지? 어찌 할 수가 없지? 그냥 거기서 그렇게 부들부들 떨고나 있게. 그게 자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이야. 그럼 난 자네의 그 모습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실 것이야. 크하하하!”

결국 손견은 참지 못하고 남은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배를 준비하라! 저놈의 목을 베어올 것이다.”

하지만 다시 정보가 그런 손견을 뜯어 말렸다.

“주군! 더 이상은 아니 됩니다. 이미 진 싸움입니다. 이제 퇴각하셔야 합니다.”

정보의 말대로 이미 진 전쟁이었다. 단순히 장강에서의 전투만 진 것이 아니다. 손견의 원래 근거지였던 장사와 그 일대가 모조리 원술의 손에 들어갔다. 야심차게 준비했던 전쟁이 참담한 패배로 인해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손견이다.

하지만 손견은 지금 이성적으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이의민에게 단련이 된 원술은 현재 상대를 열 받게 만드는 능력 하나만큼 전 중원에서 최고봉이었다.

그런 원술에게 전쟁에서 지고 농락을 제대로 당하고 있으니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가 없다.

수하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 자신이 직접 배를 끌고 나가려고 장강 쪽으로 다가갔다. 결국 정보와 수하들이 손견의 팔다리를 잡으며 뜯어 말렸다.

“주군! 제발 참으십시오!”

“주군! 저기 저 배들이 아니 보이십니까? 지금 나가시면 그냥 허무하게 물고기 밥이 될 뿐입니다.”

손견은 그제야 정보가 가리키는 원술의 군선을 확인했다. 장강 가운데에는 원술이 탄 군선 한척만 유유히 떠 있었으나 그 뒤에 수십 척의 군선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만약 손견이 배를 몰고 장강 위에 나가는 순간 정보의 말대로 고기밥이 되었을 터였다. 결국 수하들의 만류에 의해 장강으로 나오지 못하는 손견을 보며 원술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다시 손견을 비웃으며 한마디를 더 던졌다.

“손견. 잘 생각해보게. 지금 눈앞의 나를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무슨 소리냐?”

“유표. 그 영감탱이가 널 잡아 죽일 거라고 벼르고 있다는데?”

“뭐라고?”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손견은 충격을 받았다. 원래 유표와 손견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반 이의민 연합으로 억지로 같은 편이 됐다. 그랬던 유표는 결국 이의민의 수하가 되었다. 그 말인즉슨 유표가 다시 손견의 적으로 돌아서게 됐다는 뜻이다. 졸지에 원술뿐만 아니라 유표까지 상대해야 될 판인 손견이다.

이곳 장강에서 시간이 끌리면 끌릴수록 손견은 더 궁지에 몰리게 됐다.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한다.

손견은 원술을 한 번 쏘아본 후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오군으로 간다.”

양주의 동남쪽 구석에는 오군과 회계군이 있었다. 두 지역 모두 양주에서도 상당히 구석진 곳에 위치한 곳이라 그만큼 세력을 키우기 힘든, 먹음직스러운 땅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손견이 갈 곳은 그 곳밖에 없다. 물론 그 곳도 쉽지는 않겠지만 원술과 유표를 상대하는 것보다야 쉽지 않겠는가.

손견이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오군으로 가면서 자신의 어린 아들을 불렀다.

“책아.”

“네. 아버지.”

그의 아들 손책은 아직 어린 나이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매우 의젓했다. 대략 17살 정도 되었는데 사실 그 정도면 다 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완전히 어른스럽지는 못할 나이였다. 그럼에도 손책은 벌써 군주의 풍모를 풍기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역시 그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노련한 친구가 있다. 그는 바로 주유다.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단지 어리다고만 여기어 너와 공근의 말을 무시했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구나.”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군주로서 내리신 선택은 언제나 옳습니다. 단지 저희들이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손견보다 더 어른스럽게 위로하는 그의 아들 손책. 손견은 그런 자랑스런 아들을 보며 아쉬움을 삼켰다.

손견은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손책은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위로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아니었다.

왜 원술에게 진 것인지는 명확했다.

‘내가 결국 원술에게 패한 것은 그보다 명성이 뒤떨어져서일까? 아니면 병력이 모자라서일까? 아니다. 이미 알고 시작했고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왜 패배한 것인가....’

손견은 원술의 곁에 그림자처럼 머물던 한 인물을 떠올렸다. 노숙이었다.

처음에는 손견도 그를 경시했다. 기껏해야 장자 손책이나 주유보다 조금 나이가 더 많은 젊은 책사 정도로만 평가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노숙이 원술군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가 계책을 내놓는 족족 손견군의 약점을 무자비하게 찔렀다. 한데 노숙의 계책을 방비할 기회가 없던 건 아니라서 이번 전쟁의 패배가 더 안타까웠다. 손책의 친구이자 이제 막 책사로서 공부를 해왔던 주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노숙의 계책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즉시 대응책을 내놓고 손견에게 알려왔다. 하지만 손견은 주유의 나이가 너무 어린 터라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되돌아보니 전부 주유 말을 들었어야 했었다. 만약 그랬다면 장강을 차지하고 있는 이는 원술이 아니라 손견이었으리라.

손견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들 손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언했다.

“오군을 점령하면 너와 그 아이를 중심으로 세력을 개편할 것이다. 준비를 하고 있어라.”

“예. 아버지.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한편 원술은 손견이 물러가자 그제야 장강에서 배를 돌렸다.

“저 놈도 이제 끝이 났군....”

“그렇습니다. 주군. 감축 드립니다.”

손견을 격동시키기 위해 불렀던 미녀들도 이미 다 물리쳤다. 그의 곁에는 노숙만이 있다.

그런데 원술은 이번 승리가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쩝... 그런데 말이야. 이긴 것은 좋은데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들어. 따지고 보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 이의민 그 놈을 위한 일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승상의 승리가 곧 주군의 승리입니다. 만약 주군께서 지금 승상의 편이 아니라 반 이의민 연합에 가담했다 생각해보십시오. 결코 이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긴 한데.... 일단 눈에 보이는 콩고물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원술은 이의민이 자신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까 신경 쓰였다. 그렇게 찜찜한 기분으로 자신의 거처인 양주 구강현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원 중랑장은 황제폐하의 교지를 받드시오!”

“폐, 폐하께서....?”

영문을 모른 체 교지를 든 사신 앞에 무릎을 꿇는 원술. 그의 앞에서 사신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교지를 낭독했다.

“원 중랑장은 들으라. 원 중랑장은 그간 승상과 함께 역도의 무리들을....”

원술은 그제야 이의민이 조그마한 보상이라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이의민이 자신의 공을 무시하지는 않는 것 같아 약간 안도가 되었다.

‘후우. 확실히 의리는 있는 놈이군. 그럼 양주 자사를 주려나? 아니면 중앙 관직 중 적당한 거 하나라도....? 그래도 주요요직은 전부 제 수하들에게 다 줬을 테니 난 구경 밑에 뭘 받으려나....’

그리 생각을 하고 있던 원술.

“...이에 짐은 원 중랑장을 사도로 임명할 것이다!”

“응?”

원술은 황제의 교지를 읽는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뭔가 잘못 들은 것 같다.

“방금 뭐라고....?”

원술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주변 수하들이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데 그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한참 동안 멍청한 표정을 짓던 원술은 서서히 귀가 정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수하들의 목소리도 똑바로 들을 수 있었다.

“감축 드립니다! 주군! 폐하께서 주군을 사도로 임명하신다 하셨습니다!”

원술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내가.... 내가.... 나 원공로가 정말 삼공이란 말인가?”

옆에서 노숙이 껄껄 웃었다.

“하하! 거 보십시오. 주군. 제가 뭐랬습니까? 승상은 절대 주군을 잊지 않으신다고 했잖습니까. 다시 한 번 감축 드립니다.”

“내가 사도...! 내가 사도라니! 크하하! 원소 이놈아! 보았느냐?! 나야 말로 사세삼공 원가의 적통이니라!”

“이제 오세삼공이지요.”

“낄낄낄! 그렇군. 오세삼공 원가의 원술이 바로 이 몸이니라!”

원술이 태어나서 오늘처럼 기쁜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온몸의 희열을 만끽하는 원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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