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낙양의 숨은 실세 (4)
좌중랑장이 기거하는 관사의 문이 느닷없이 부서질 듯 세게 열렸다.
쾅!!
당연하게도 그곳을 지키는 군사들은 상대에게 호통을 쳤다.
“이 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응?”
그런데 상대를 알아본 군사들은 전부 어리둥절했다. 자신들도 익히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 도위 아니십니까?”
“인사는 됐고... 좌중랑장은 어디 갔느냐?”
“중랑장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한데....”
좌중랑장은 우도위 마선식의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자였다. 그런데 평소에 좌중랑장 앞에서 공손하기만 했던 마선식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좌중랑장! 어서 나오시오!”
안에 있던 좌중랑장 역시 황당해하며 마선식을 맞이했다.
“마 도위. 갑자기 찾아와서 이 무슨 짓인가? 그 건방진 태도하며... 혹시 낮술이라도 했는가?”
그런데 마선식은 그런 좌중랑장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는 같이 온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뭣들 하는가? 어서 죄인을 포박하라!”
“뭐? 죄, 죄인? 정말 미쳤나? 마선식! 감히 키워준 주인을 물려고 하느냐?”
좌중랑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평소라면 감히 좌중랑장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을 마선식이다. 하지만 지금은 태연하게 화를 받으며 투덜댔다.
“지랄하네. 내가 당장 죽게 생겼는데 주인은 무슨.... 어서 끌고 가라!”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인가? 마 도위!”
“일단 승상부에 가서 물어보쇼. 그럼 다음으로 가자.”
좌중랑장을 빠르게 압송한 마선식은 양피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바로 마선식과 장씨 형제 등이 실토한 비리에 연루된 이들의 명단이었다.
“씨발! 많기는 더럽게 많군. 이걸 언제 다해?”
투덜대는 입과는 다르게 어느새 그는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뛰고 있었다. 이들을 다 잡아들이지 못하면 자신이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마선식으로서도 발에 땀나게 뛰면서 명단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낙양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자가 마선식 한명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외에도 곽가나 종요, 순유나 정욱이 쳐 놓은 덫에 걸린 하급 관리나 장수들이 발에 불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활약한 덕분에 황궁 내의 승상부에는 어느덧 많은 이들이 포박되어 무릎 꿇려져 있었다. 승상부 앞을 거의 메우다시피 한 이들은 전부 크고 작은 비리에 연루된 낙양의 전현직 관리들이다. 그것도 하급 관리들은 거의 없고 거의 대부분 중간급 이상의 거물들이라 할 수 있었다.
승상부의 주인인 승상 이의민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끌려온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 봉효. 밖에서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니 길래 이리 시끄러워?”
“별 일 아닙니다. 일전에 주군께서 말하신 비선실세, 그들을 잡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곽가는 그동안 진행했던 일들에 대해 빠짐없이 보고했다.
“명분을 찾겠다고 말미를 달라더니 벌써 처리를 하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주군.”
이번에는 순유가 대답했다.
“봉효가 제 말을 어기고 반찬투정을 하다가 우연찮게 명분을 찾았습니다.”
“흠. 우연이라고는 하나 더럽게 빠르긴 하군. 내가 부하들 하나는 잘 뒀단 말이지. 그런데 전에 말한 무슨 정후더라? 아무튼 최열 그 늙은이도 잡아온 것인가?”
“네. 양평정후가 저들의 정점에 있는 자니 아니 잡아올 수 없었습니다.”
“나야 그 편이 더 좋긴 한데, 괜찮겠나? 그 정도 인물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라며?”
“그 때는 명분이 없었을 때입니다. 명분이 생긴 지금은 입장이 다릅니다. 저희도 충분히 검토를 해보고 자신이 있으니 건드린 것입니다.”
자신만만하게 웃는 순유와 곽가를 본 이의민. 그들이 이 정도로 자신감을 드러냈다면, 그들이 계획하는 일은 거의 성공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있다라.... 좋아. 진행시켜.”
**
삼공 중 하나인 사공 장온의 저택에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와서 다급하게 외쳤다.
“급한 일이오! 어서 사공 어른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어허! 여기가 어디라고! 사공 어른을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줄 아느냐?”
그러자 찾아온 이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맞섰다.
“우리는 양평정후 대인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오.”
이들이 하는 얘기가 사실이라면 이들의 주인 역시 절대 사공인 장온에 꿇릴 만한 인물이 아니다. 양평정후 최열은 현재 모든 관직을 내려놓았지만, 과거에는 사도와 사마를 역임한, 장온에게는 선임과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에 이곳의 하인들도 한발 물러선 후 장온을 부르러 갔다. 얼마 후 장온이 직접 나왔다. 최열의 하인들이 왔다는 얘기에 직접 나올 만큼 아직 영향력이 있다는 얘기다.
“무슨 일이냐? 양평정후 대인께 무슨 변고라도 생겼느냐?”
“대인. 제발 도와주십시오. 승상이 드디어 마수를 드러냈습니다. 지금 자기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저희 대인께서도 오늘 승상부로 끌려가셨습니다.”
“뭣이? 그것이 사실이냐? 대체 승상이 왜 그런 것이냐?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을 거 아닌가?”
“듣자하니 뭐 저희 대인께서 가혹하게 백성들을 수탈하고 괴롭혔다는데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그리고 설사 대인께서 정말 그리 하셨다고 하더라도 선비가 학문과 국가를 위해 백성들을 좀 희생시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뻔뻔하기 그지없는 얘기에 장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장온 역시 최열의 부정과 비리를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눈감았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도 최열 같은 인물을 건드리는 것보다 그냥 눈감고 모른 체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나은 길이라 여기고 있었다.
아무튼 장온 역시 이의민이 최열을 잡아간 이유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시대에 고위직을 해먹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명분으로 백성들을 내세울 뿐이었다.
“그럼 지금 최 대인이 승상부에 계신단 말이냐? 혹시 최 대인의 신변에 벌써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크흑! 최 대인께서 끌려가실 때 관해인지 복어인지 하는 놈이 아주 무례하게 행패를 부렸습니다. 다행히 최 대인께서는 욕만 보셨지 다치거나 신변에 큰 이상은 없으셨습니다. 허나 이대로 가면 틀림없이 봉변을 당하시지 않겠습니까?”
“으음....”
장온은 침음을 흘리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당장이라도 승상부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신이 간다고 해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현재 자신이 삼공 중 하나인 사공에 올라있긴 하지만 말만 사공이지 별 힘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지금 사공의 관직을 유지하는 것도 원래 하진과 인사 문제로 대립을 하고 있었던 것 덕분이었다.
“양 사마를 만날 것이다.”
결국 장온은 바로 승상부로 가는 대신 같은 삼공 중 하나인 사마 양표를 먼저 만나 상의하기로 했다.
**
“승상. 사마와 사공께서 만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들어오시라 해라.”
이의민도 마냥 쉽게 대할 수는 없는 인물 둘이 승상부로 찾아왔다.
그 와중에 황궁 밖에서는 선비들의 규탄과 상소가 연이어 이어지고 있었다. 승상이 아무런 증좌도 없이 선비들을 탄압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의민은 그 시끄러운 상소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평온하게 장온과 양표를 맞이했다.
“두 분 어서 오시오. 그동안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어쩐 일이시오?”
“승상. 어찌된 소란인지 해명을 요구합니다. 지금 승상부 앞에 있는 저들이 백성을 수탈했다는데 증좌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증좌도 없이 일을 진행했겠소?”
이의민은 그 앞에 장부 하나를 던졌다. 얼른 그 장부를 펼쳐보는 장온과 양표. 곧 두 사람의 입이 벌어졌다.
“이, 이것은....?”
“참 많이도 해쳐 드셨더군. 특히나 최열, 그 작자는 뭔 욕심이 그리 많은지.... 쯧쯧.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말이야.”
장온과 양표는 장부를 열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최열이 부정과 비리를 일삼았다는 사실을 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다.
장부에는 언제 누구에게 얼마를 왜 줬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나와 있었다. 그들조차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인사이동이나 막대한 이권사업 등이 왜 벌어졌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대부분 목록에는 최열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목록에 적힌 재물의 양을 눈대중으로 대충 계산해 봐도 어마어마해보였다. 못해도 황실의 금고에 있는 재물보다 더 많은 재물인 것 같다. 적당한 수준이었다면 어떻게든 옹호를 했겠지만 이건 정도를 벗어났다.
충격을 받고 장부를 계속 뒤적거리는 양표를 향해 순유가 입을 열었다.
“양 사마. 평소 양 사마를 존경하고 흠모해왔던 한 사람으로서 말씀 올리겠습니다. 장부에 적힌 그것들이 모두 백성들의 고혈입니다. 이런데도 단지 과거에 고관대작을 지냈다는 이유로 무조건 넘어가줘야 합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순유의 말에 장온과 양표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이 한 짓이 아님에도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여태껏 선진에 대한 예우로 그의 부정과 비리를 눈감아 주었으니 한통속이나 다름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것도 봐주십시오.”
어느 동물의 가죽인지 모르겠으나 싸구려 가죽에 삐뚤삐뚤 알아보기 힘든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승상지지(支持)’
“객잔주인과 대장장이들, 다관이나 포목점 등을 하는 이들이 가져온 것입니다. 글자를 아는 사람을 한참을 물어서 겨우 네 글자를 적어왔습니다. 물론 그 뜻의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완전치 않은 문구이긴 합니다. 허나 두 분께서는 정녕 이들의 마음 아니 느껴지십니까?”
양심이란 게 있는 양표와 장온은 부끄러움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여기에 이의민이 쐐기를 박듯 이들에게 통보를 했다.
“나 승상 이의민은 이 장부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원리원칙에 따라 처분할 것이오. 양평정후 최열 역시 예외가 아니오. 그리고 낙양에 흑사회 같은 패거리들은 앞으로 발붙일 수 없을 것이오. 나 이의민이 다스리는 곳에 관부의 권력 외에는 그 어떤 권력도 있을 수 없소. 그리고 이들이 획득한 이득은 모두 불법한 이득이므로 모든 돈은 국고로 환수될 것이오.”
이의민의 통보에 양표는 감히 반박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승상을 의심해서 송구합니다. 모든 것은 승상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선비들이 모두 썩지는 않았을 겁니다. 죄 있는 자는 죄를 물으시되 수사에 공정을 가해주십시오.”
양표와 장온이 나가는 것을 보고 이의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거 참.... 졸지에 백성들의 구원자가 돼버렸군.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하하! 모든 영웅들이 다 그랬지 않겠습니까? 본인의 뜻이 아닌 하늘의 뜻인 게지요.”
“어쨌든 이제 유지니 선비니 뭐니 신경 쓸 것도 없겠군.”
“맞습니다. 설사 그들이 또 모인다 해도 백성들이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입니다.”
순유의 말대로 선비들은 몰라도 낙양의 백성들은 점점 이의민을 지지하고 있다.
“아무튼 그나마 삼공에 있던 자들은 그리 썩은 이들이 아니라 다행이군. 저 명단에는 없으니 말이야. 사마와 사공까지 갈아치울 필요는 없겠어.”
이때 곽가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군. 그나저나 사마와 사공은 그렇다 쳐도 사도자리는 현재 공석이지 않습니까? 새로운 사도를 임명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웬만하면 주군의 말을 잘 들을 만한 자로 말이지요.”
“혹시 마땅한 사람이 있나?”
이의민의 질문에 모두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의민의 사람들 중에 순유나 곽가보다 높은 관직에 있을 만 한 사람을 뽑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의민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들 없나? 그럼 내가 직접 추천을 해보지. 딱 적당한 놈 하나가 있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