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낙양의 숨은 실세 (3)
마선식은 기분 좋게 낙양의 저잣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특히 평소보다 기분이 훨씬 더 좋은 듯했다.
“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우도위 마선식이야! 마선식!”
마선식, 그의 정체는 바로 낙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우도위다.
그는 하진이 대장군이던 시절 운 좋게 하묘와 연이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연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하묘에게 각종 뇌물을 바치며 우도위라는 자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앞날이 창창했던 마선식이었지만, 인생에 시련이 없을 수가 없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하씨의 세상은 이의민이 낙양을 점령하면서 끝이 났다.
하묘에게 붙어 우도위라는 자리를 유지해왔던 마선식도 드디어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마선식은 운이 좋게도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한 채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이의민은 우도위 정도의 인물까지 신경 쓸 위치가 아니었다.
그리고 신경을 쓴다고 해도 우도위를 비롯한 낙양의 여러 하급 관리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도 없었다. 낙양의 말단 관리들 중 하씨 등과 연루되지 않은 자는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때문에 하씨들과 연관이 있다고 무조건 처단한다면 낙양 경비나 각종 관리, 유지보수 등의 업무에서 치명적인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순유나 곽가 등도 비리와 유착의 정점인 하씨들만 일단 처단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고, 그 밑에 있던 관리들은 대부분 그대로 두었다.
마선식은 이의민이 낙양을 점령하고 승상에 오른 지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신을 그대로 놔두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우리 같은 것들까지 신경을 쓸 리가 없지. 그래도 앞으로가 문제군. 연줄도 끊겼는데, 이대로 우도위 일이나 하며 조용히 살아야 하나? 아니면 이의민 밑으로 다시 한번 줄을 대볼까....’
두려움이 사그라지니 욕심이 스멀스멀 샘솟았다. 그래서 이제 낙양에서 새롭게 권력자가 된 이의민에게 어떻게든 줄을 대어 지금보다 더 많이 해먹고, 우도위가 아닌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생각까지 가지게 됐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의민의 최측근이라는 광록훈 곽가에게 부름을 받았다. 예전이었다면 혹시 하묘와 관련된 것이 있는지 추궁할 지도 모른다며 겁을 먹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제법 지났고, 부른 곳도 그런 추궁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흐흐흐. 내조부나 승상부도 아닌 객잔으로 부르는 까닭이 뭐겠는가? 광록훈께서 내게 사적으로 바라시는 게 있단 뜻이 아니겠는가. 새옹지마라고 하묘가 죽으니 구경이란 뒷배가 생겼구나... 아니지. 광록훈은 승상이 가장 가까이 하는 인물 중 하나라고 하니, 사실상 승상이란 뒷배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지. 흐흐.’
마선식은 곽가가 무슨 의도로 자신을 낙수객잔으로 부르는지 아직 알지 못한 채, 김칫국을 사발 째 마시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막상 낙수객잔으로 간 마선식은 살짝 의아했다. 아무리 봐도 구경과 같은 고위 관리가 올만한 객잔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음....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고위 대신들을 위한 비밀스러운 호화객잔인 줄 알았는데, 이게 뭐람.... 이건 뭐 평범한 민초들이나 오는 흔한 객잔이잖아? 혹시 숨겨진 맛집인가?’
약간 실망한 마선식은 그대로 낙수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실망한 마음을 절대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곽가 앞에 오체투지 했다.
“우도위가 광록훈을 뵙습니다. 광록훈과 대사농께서 소인을 찾으셨단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소인 두 분께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대인들께선 소인을 몸종이라 생각해주십시오.”
“견마지로 같은 건 필요 없고, 일단 대가리부터 박고 시작할까?”
“예?!”
마선식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곽가를 쳐다봤다. 분명 은밀한 제안을 위해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다짜고짜 대가를 박으라니 무슨 소리인가?
“귀가 먹었느냐? 네놈의 그 대가리를 땅바닥에 박으라고.”
황당했지만 일단 곽가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꼴사납게 기합을 받는 마선식.
“넌 이제 묻는 말에만 답한다. 혹시라도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얘기가 네 입에서 나오면 어찌 되는지 알고 있지?”
“예!”
그제야 마선식은 곽가가 자신을 좋은 의도로 부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고 싶으니 곽가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곽가는 마선식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병사 하나가 와서 보고를 했다.
“장씨파 놈들이 접근중입니다.”
“좋아.”
‘이런! 망했다!’
“과, 광록훈.... 그게... 드릴 말씀이....”
“어허!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면 어찌한다고 했지?”
결국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마선식. 그 와중에 장씨파는 위풍당당하게 낙수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선두의 장일은 한눈에 곽가와 종요를 알아보며 외쳤다.
“저놈들이냐?”
“예. 형님. 아직도 도망치지 아니 한 것을 보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봅니다.”
“그런 걸 치료하는 것이 우리 전문 아니겠느냐. 흐흐흐. 응? 저놈은 또 왜 저러고 있나?”
장일은 곽가 옆에 한 사내가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박고 있는 것을 보며 의아해했다. 하지만 곧 관심을 접었다. 하인 놈 하나가 실수해서 벌을 받는 정도의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일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저 부잣집 도련님들을 볼모로 돈을 크게 뜯어낼 수 있을지 밖에 없었다.
장일은 자신의 몸집만큼 커다란 대도를 꺼내들고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자! 일단 네놈의 팔 한짝부터 시작할까? 네놈의 부모에게 줄 선물로 적당하겠군. 흐흐흐.”
그런데 곽가와 종요는 무엇 때문인지 장일의 위협에 살짝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허세를 부리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어허!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것이냐?”
“크흐흐! 누군데?”
“우리 가문은 영천의 지조 높은 선비의 가문이다. 그런데 감히 건달패인 너희 따위가 우리를 건드린다는 말이냐?”
곽가의 말에 장일은 폭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영천의 지조 높은 선비의 가문? 아우야. 영천이 어디 붙어있는 촌동네냐?”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 굳이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흐흐흐. 아가야. 우리를 그냥 낙양의 뒷골목 건달로 본 모양인데,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가르쳐주마. 앞으로 어디 가서 함부로 가문을 들먹이지 마라.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
장일은 으스대며 자신들의 뒷배가 되는 낙양의 유력가문들의 이름을 읊었다. 전현직에 있는 각종 관리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그 중 상서 선양도 있었고, 심지어는 사도와 사마를 역임한 양평정후 최열의 이름도 있었다.
물론 최열 정도 되는 거물이 장일과 직접 대면할 리는 없다. 실질적으로 최열과 장일은 모르는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일은 자신들이 대고 있는 줄의 가장 꼭대기가 최열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게다가 상대는 낙양에 딱히 접점이 없는 촌놈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최열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팔아먹고 있는 장일이다.
“흐흐. 아무리 촌구석에 살다 왔다고는 해도 양평정후 최열이란 이름은 들어봤겠지? 그분이 바로 우리 뒤에 계신 분이다. 너희 같은 영천 촌놈들은 만나 뵐 수조차 없으신 분이지.”
장일은 한껏 거들먹거리며 곽가와 종요의 표정을 감상했다. 아마 깜짝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하리라. 하지만 곽가와 종요는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히려 곽가는 옆에서 머리를 박고 있는 마선식의 배를 걷어찼다.
“크학!”
“원상 형. 그래도 이놈이 거짓말은 아니 했구려. 나오는 이름들이 일치하니 말이오. 일어나. 임마.”
그제야 마선식을 제대로 보는 장일이었다. 그리고는 곧 크게 놀란 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 우도위?”
마선식은 눈으로 장일을 욕했다.
‘아는 척 하지마! 이 새끼야!’
“뭣들 하는가?!”
곽가의 외침에 객잔 밖에서 군사들이 들어왔다.
장일은 그제야 뭔가 상황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이대로 잡힌다면....’
비대한 몸집과는 달리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을 내리는 장일. 비리비리한 곽가를 포로로 잡기 위해 몸을 날렸다.
“크아악!!”
그런데 곽가 뒤에 있던 호위로 보이는 무사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 호위무사가 검을 휘두르니 장일의 오른팔이 대도를 든 그 상태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감히 광록훈을 해하려 들다니!”
장일 입장에서는 기습이었지만, 한번도 본적이 없는 빠른 공격이었다. 제대로 붙었다고 해도 장일의 팔이 잘렸을 터였다.
하지만 장일을 더 충격으로 몰아넣은 건 따로 있었다.
“과, 광록훈....?”
장일은 팔이 잘린 고통도 못 느끼고 있다. 정신적으로 더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이라면 구경이라 해도 하묘를 믿고 한 번 뻗대봤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다. 자신이 가진 연줄로도 감히 어쩌지 못할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단순 구경이라는 신분이 문제가 아니다. 구경 중에서도 태상, 대사농, 광록훈, 태복은 승상 이의민의 오른팔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호위무사로 보였던 인물이 복장을 제대로 드러냈다. 온몸을 둘렀던 망토 안에서 화려한 갑주가 나왔다. 그는 바로 황충이다.
“나는 절충장군 황충이다! 모두들 무기를 버려라! 버리지 않는다면 역도로 간주하겠다.”
그에 장씨파들은 모두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미 광록훈이란 얘기를 들었을 때 바짝 엎드려야 했지만, 워낙 급작스럽게 진행되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황충은 그런 장씨파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장삼의 팔 한쪽을 베었다.
“크아악!”
그제야 장이가 장씨파를 대표해서 항복 선언을 했다.
“하, 항복! 항복하겠소.”
하지만 그 항복 선언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이가 있다. 어느새 장이 뒤로 다가온 관해.
“항복하겠소? 이 새끼들이 돌았나? 다시 말해 봐.”
퍼억!!
관해의 무지막지한 주먹이 장이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크억! 아, 아닙니다. 항복하겠습니다! 아니. 살려주십시오! 대인.”
관해는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황 장군. 이리 순박한 자들에게 어찌 그리 겁을 주십니까?”
장일과 장삼은 한쪽 팔을 잃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장이는 완전히 굴복하여 살려 달라 외치고 있었다. 나머지 장씨파들도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모두 무릎을 꿇었다.
곽가는 그들을 보며 냉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내게 칼을 들이댄 네놈들을 살려둘 순 없다.”
“대인. 몰랐습니다. 제발 용서를.... 크흐흑!”
곽가는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한가지 제안을 했다.
“살아날 방법이 하나 있는데 알려줄까?”
“뭐, 뭐든 하겠습니다. 개처럼 짖으라면 짖겠습니다. 멍멍!”
“그딴 건 필요 없고 장부 하나만 가져오면 돼.”
순간 장이는 곽가가 무얼 얘기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그것만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모른 척했다.
“무, 무슨 장부를 말씀하시는 건지....? 크악!”
관해가 다시 뒤통수를 가격했다. 그리고 곽가는 다시 목소리를 내리깔며 장이를 압박했다.
“설마 모른다 하지 않겠지? 사람을 믿지 않는 네놈들 흑사회 특성을 내가 모를 거 같나? 정 대답하기 싫으면 아니 해도 돼. 그냥 성격대로 다 쓸어버리지 뭐. 자! 그럼 네놈들은 필요가 없군.”
곽가의 압박을 받은 장이는 끊임없이 번뇌했다.
‘젠장! 그 장부는 우리의 마지막 희망인데....’
그렇게 고민하던 장이를 대신해서 장일이 외쳤다.
“있습니다! 대인! 저희 집에 고이 모셔두고 있습니다.”
결국 장씨파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어낸 곽가다.
“황 장군은 저들을 데리고 가서 장부를 가져 오시오. 장부에 대해서는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모르게 처리해야 하오.”
“예. 광록훈.”
황충은 장씨 삼형제를 그대로 끌고 갔다. 특히 팔이 잘린 장일과 장삼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황충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들이 여태껏 낙양 백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