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낙양의 숨은 실세 (2)
낙수는 장삼 패거리가 쫓기듯 떠나는 모습을 보고도 표정이 밝아지지 않았다.
당장의 위기를 넘긴 것은 맞다. 하지만 그건 낙수와는 관계없이 손님으로 온 저 부잣집 도련님 때문이었다. 저 부잣집 도련님이 계속해서 낙수객잔을 지켜주기라도 하면 앞으로 장삼을 걱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리가 없을 것 아닌가.
하지만 장삼은 저 손님이 간 이후 언제든지 다시 올 터였다. 다시 올 때는 장삼이 손님에게 받은 화풀이를 자신에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망할....! 다시 오면 날 완전히 반 죽일 기세던데....’
설사 저 손님이 작정하고 자신을 지켜준다고 해도 걱정이었다. 이 바닥에서 장씨파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여태껏 낙수도 장씨파 때문에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관청에도 밥 먹듯 드나들고, 심지어는 억울한 마음에 황궁 근처까지 찾아가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아무 소용없었다. 그리고 이곳 낙양에서 장씨파가 어찌 저리 기세등등하게 설칠 수 있는지만 확인할 수 있었다.
영천에서 왔다는 저 부잣집 도련님들은 호위를 보니 제법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결국 낙양 관리를 등에 업은 장씨파는 당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엄연히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겠지.’
그리하여 그 부잣집 도련님들에게 다가가는 낙수다. 그런데 대뜸 그 부잣집 도련님이 입이 열렸다.
“이봐! 주인장! 나 좀 보자고.”
그 도련님은 상대가 장삼 같은 질 나쁜 건달이라 함부로 말을 한 것 같지 않다. 낙수는 딱 봐도 40대가 넘는 삼촌뻘, 아버지뻘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반말을 찍찍 내뱉으며 사람을 함부로 불렀다. 그냥 그 사람의 성격인 듯하다.
‘빌어먹을.... 저놈도 장삼이랑 다를 바 없는 놈 아니야?’
“아.... 예...”
고맙게 여겼던 마음까지 절로 사라지게 만드는 언행에 낙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도련님, 아니. 곽가에게 다가갔다.
“앉아봐.”
“예....”
점점 기분이 나빠졌지만 감히 반항할 수도 없다. 일부 패거리에 불과했지만, 장씨파도 도망치게 만든 상대에게 어찌 반항할 수 있을까.
그때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자가 미소를 지으며 낙수를 안심시켰다.
“후훗. 너무 긴장하지 마시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는 거요.”
종요의 달램에도 낙수의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가.
“무엇이 궁금하십니까요?”
“방금 나간 자들의 정체가 뭐요? 대체 뭐길래 주인장에게 보호비니 뭐니 하는 걸 받는 겁니까?”
낙수는 있는 그대로 술술 얘기했다. 얘기를 다 들으면 이 도련님들은 아마 못 들은 척하고는 곧 객잔을 떠날 거라 여기며 말이다.
“방금 그놈은 장삼이라는 놈인데 낙양 흑사회 장씨파의 셋째입니다. 그리고 장씨파는 낙양의 뒷골목을 모조리 접수하고 통일한 무서운 놈들입니다. 적어도 낙양에서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겁니다.”
이에 종요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장씨파에 대해서 얼핏 들어본 것 같군.”
“낙양에서 일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원상 형도 들어봤다니 제법 유명한 놈들인가 보군요. 그래서 그놈들이 왜 여기서 깽판을 치다 나간 건가?”
“평소 그놈들이 하던 짓입니다. 예전부터 객잔이나 기루, 다관 등을 관리해준다는 명목으로 보호비를 받았습니다. 그 보호비가 너무 많아서 죽을 맛이었지만 어쩌겠습니까? 방금 같은 놈들이 와서 가게를 박살내거나 구타까지 일삼으니 순순히 주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도 예전에는 버틸 만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 통에 돈을 벌지도 못했는데 보호비를 달라고 하니 미칠 노릇이지요. 보호비를 내지 못하면 그냥 가게를 통째로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혹시 관아에 도움을 요청해보셨소?”
“왜 아니 해봤겠습니까? 그렇지만....”
낙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간의 기억과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올라왔다. 그런 낙수를 보며 곽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신 답했다.
“뻔한 거 아닌가. 변방 시골도 아니고 낙양에서 고작 흑사회 따위가 이리 활개치고 다닌다는 것은 뒤를 봐주는 놈들이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관부까지 줄을 댈 수 있는 낙양의 오랜 유지란 새끼들이 그놈들 뒤에 있겠지.”
낙수가 놀라서 곽가를 쳐다보았다. 마치 자신이 직접 한 것처럼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 첫 번째 놀랐고, 낙양의 유지들을 마치 동네 개새끼 취급하는 말투에 두 번째로 놀랐다.
아무에게나 말을 함부로 한다고 해도 자신보다 명백히 더 위에 있는 자에게까지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낙양 유지에게도 이렇게 막말을 할 정도면 그냥 일반적인 지방 부자는 아니라는 소리다.
‘뭐지? 단순히 촌뜨기 철부지 도련님이 아니란 말인가...?’
곽가가 파악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여기 치안을 담당하는 놈이 우도위지? 어이! 거기 가서 놀고 있는 장군 아무나 하나 데려와라. 그리고 힘 좀 쓴다하는 병사들도 한 백 명쯤 데리고 와라. 그리고 그 옆에 너는 지금 우도위한테 가서 당장 이곳으로 튀어오라고 전해라. 한식경 주겠다.”
“옛!”
곽가의 명에 따라 모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낙수가 봐도 이들이 단순 호위무사로 보이지 않았다. 낙수의 예전 단골들 중 관군 출신이 많았기에 군례까지 알고 있었다.
‘뭐, 뭐야? 군례까지 하다니.... 관군 출신들인가? 아니면 정말 관군들....?’
낙수는 기절초풍할 것 같았다. 낙수는 조심스럽게 곽가에게 다시 물었다.
“저... 호, 혹시....”
하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낙수가 받은 충격이 컸다.
“아! 왜? 뭐가 묻고 싶은 건데?”
또 말을 막 내지르는 곽가. 그런 곽가를 대신해서 종요가 대답을 해주었다.
“훗! 봉효. 이 사람. 딱 봐도 우리 정체를 궁금해 하는 것 아니겠는가. 주인장. 안심하시오. 여기 곽 광록훈을 믿고 기다리시오. 절대 이 객잔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요.”
“과, 과, 과, 광록훈?!”
낙수는 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처음 받은 충격도 컸지만, 방금 종요의 입에서 나온 광록훈이라는 말을 들으니 이전 충격과 비교도 안 되는 충격이 몰려왔다.
평범한 백성들은 광록훈이라는 관직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낙수는 그래도 황궁 근처 객잔을 하면서 보고 들은 것이 제법 있었다. 이곳 낙양에서조차 그보다 높은 사람이 얼마 없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럴 수가.... 광록훈이라면 구경의 일인....’
퍼뜩 정신을 차린 낙수는 바로 오체투지 했다.
“천인이 감히 눈이 없어 대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곽가는 그런 낙수는 본체도 않고 종요에게 따졌다.
“아! 원상 형. 일은 같이 벌려놓고 왜 남의 일처럼 말하는 거요? 대사농이 그래도 되는 거요?”
“허허. 그만큼 자네를 믿는단 게지.”
낙수는 더 돌아버릴 것 같다. 곽가가 광록훈이란 사실을 들었을 때도 정신이 아찔했다. 그래도 자신에게 시종일관 존대를 쓰는 걸로 보아 그 옆의 종요는 그리 높은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종요가 곽가와 같은 구경의 대사농이라니.
구경 중 두 명이 자신의 객잔에 있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특히 대사농은 이의민 덕분에 너무나 유명해진 관직이 아닌가.
낙수는 놀라서 어질어질한 가운데 눈물이 났다. 정말 이들이라면 흔한 부잣집 도련님과는 달리 정말 장씨파를 해결할 힘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태도를 보니 해결을 해줄 것 같기도 했다.
장씨파 뒤에 낙양에서 주름 잡는 유지들과 관리들이 있다지만, 그들이 아무리 모여 봤자 감히 구경 중 두 명인 광록훈과 대사농에 비할 바는 아니다.
어느덧 곽가가 부른 인물들이 도착했다. 대략 백여 명의 군사들이 도착했고, 그 선두에는 제법 화려한 갑주를 걸친 장수도 둘 있었다.
낙수객잔은 때 아닌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손님은 아니지만 말이다.
“진동장군과 절충장군이 오셨군.”
곽가의 부름에 응한 인물은 이번에 진동장군이 된 관해와 절충장군이 된 황충이었다.
“크하핫! 광록훈. 때마침 기도가 지겨워 지는 찰나에 아주 잘 부르셨소. 객잔에 온 김에 간만에 코가 삐뚤어지도록 한번 마셔봅시다.”
“나 참! 관해 장군은 대낮부터 무슨 술타령입니까? 지금 우리가 놀러왔소?”
“광록훈의 말이 맞소. 우리가 하는 일은 단순히 건달들을 때려잡는 게 아니란 말이오. 일단 병사들의 복장부터 갈아입히시오.”
종요의 말처럼 이들은 낙양에서 행패를 부리는 건달들 몇몇을 정리하자고 나선 게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하급 장수 몇몇만 낙양 전체 순회공연을 하게 하면 된다.
구경이 된 곽가와 종요가 직접 나선 이유는 바로 장씨파 같은 건달들 뒤에 있는, 낙양을 오랫동안 좀먹고 있던 세력들을 쳐내기 위함이었다. 이미 이의민이 그들을 척결하는 데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었다. 순유를 위시로 한 신하들까지 명분만 있다면 언제든 그들을 쳐낼 생각이었는데, 그 명분을 이 곳 낙수객잔에 찾은 셈이니 이제 거리낄 것이 없는 두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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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곰과 같은 거대한 몸집에 축 늘어진 살을 자랑하는 인간이 있었다. 곰인지 돼지인지 모를 이 인물은 낙양의 대로 한복판을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제집처럼 말이다.
아무도 그의 앞을 막는 자는 없었다. 심지어는 낙양을 순찰하는 보사들도 그의 눈치를 보며 슬슬 피하는 것 같았다.
그가 바로 아까 낙수객잔에서 도망친 장삼의 맏형이자 장씨파의 우두머리인 장일이었다.
그 비대한 몸에서 나오는 힘 덕분에 그는 상당히 싸움을 잘했다. 낙양의 뒷골목도 오직 주먹으로 평정한 그였다.
“셋째야. 여기가 맞느냐?”
“예. 형님. 아무튼 소제의 복수는 확실히 해주셔야 합니다. 그 어린 싸가지 없는 놈에게 수모를 당한 걸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아니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흐흐. 감히 누구 아우를 건드린 것인지 확실히 깨닫게 해주지.”
그 옆으로 장일과는 다르게 상당히 날렵한 몸매를 지닌 사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장씨파의 둘째, 장이였다. 몸은 장일과 달리 말랐지만 그 역시 싸움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실력이다.
장이는 입맛을 다시며 장삼에게 다시 물었다.
“셋째야. 아무튼 그놈들, 틀림없이 영천에서 올라온 부자라고 했지?”
“예. 작은 형님. 그놈이 가진 거만 다 털어도 당분간 어르신께 드릴 재물을 마련하는 건 문제없을 겁니다. 덤으로 낙수객잔까지 우리 것이 됩니다. 흐흐흐.”
선두의 장일과 장이, 장삼을 따라 무려 이백 명에 가까운 건달들이 일제히 낙수객잔에 도착했다. 장씨 삼형제는 곽가와 종요 일행을 혼내주기 위해 흑사회를 모조리 끌어 모았다.
장씨파의 식구들 몇몇이 먼저 낙수객잔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
“형님들. 그 놈들이 아직 객잔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인원은 아까 봤을 때 그대로입니다.”
“흐흐. 미친놈들. 내가 한번 굽실거려주니까 진짜 호구로 본 건가?”
“그럼 고작 열 명이 다란 말이냐? 이거 이거, 너무 싱겁게 끝나겠는데?”
“흐흐. 형님. 그 촌놈들은 낙양이 영천 같은 촌구석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모르나봅니다.”
“그럼 가르쳐줘야지. 자! 들어가자!”
장씨 형제들은 한껏 거들먹거리며 낙수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들은 낙수객잔 주변에 이상하리만치 사람들이 많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