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논공행상 (2)
승상이 된 이의민. 고려시절과 마찬가지로 위로 단 한명만 남겨두고 그 다음가는 권력자가 됐다. 이의민 위에 있는 그 단 한명은 명목상의 1인자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이의민이 1인자인 것도 같다.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다시 쥐게 된 이의민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지난 고려시절 때도 충분히 겪어서 알고 있었다. 최고의 권력 곁에는 달라붙는 인간들이 많다는 걸.
그들은 최고의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고 싶거나, 콩고물이 하나라도 떨어질까 기웃거리는 인간들이었다.
이의민에게는 고려시절부터 겪은 일이기에 익숙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거대한 대륙에 위치한 이 한나라는 그 규모가 고려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찾아오는 인간들과 잘 보이려는 인간들의 숫자가 고려시절에 대여섯 배, 아니. 과장 좀 보태서 열배는 넘는 것 같았다.
“아오! 결국 목적을 이뤄서 좋긴 하다만 다른 의미로 미치겠군. 보자는 인간들이 왜 이리 많아? 공달, 원상. 그냥 자네들이 다 알아서 처리 좀 해.”
“주군. 저희들도 지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랍니다.”
“그럼 나처럼 내 밑에 열 명에게 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허나 제 밑에 있는 부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일겁니다.”
이의민에게만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의민의 얼굴 한번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만 매일 만 명이 넘었다. 이의민 혼자 그들을 어찌 상대하겠나. 결국 급에 따라 이의민을 만날 수 있는 자들은 정해져 있다.
명예든 권력이든 재산이든 최고에 위치한 사람들이나 이의민을 만날 수 있었는데, 거기에 포함되지 못한 자들은 이의민을 볼 수 없으니 대신 순유나 곽가, 곽봉, 서황 등 그 아래 사람을 보려고 했다. 그리고 이의민의 측근도 보기 힘든 자들은 또 그 측근에 측근을 노렸다. 이의민의 연줄을 잡고자 하는 이들도 그런 식으로 일종의 생태계가 형성되는 셈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이 정도로 모이는 건 이의민이 기존의 하씨들을 몰아낸 후 새롭게 떠오른 권력이기에 더 그랬다. 기존에 연줄을 댔던 하씨들은 몰락했으니 이의민에게 새 연줄을 대야 했고, 거기다가 하씨들이 몰락하면서 조정에 빈자리들이 제법 생겼다.
분명 하씨들만 처벌하고 나머지 신하와 관료들은 대부분 자리를 보전해주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은 자리들이 공석이 됐다. 그만큼 하씨들이 해쳐먹고 있던 자리들이 많았다. 많은 이들이 그 자리를 노리고 이의민과 그 수하들에게 오는 중이다.
“그런데 이리 대놓고 돈다발을 싸들고 오다니.... 뭐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너무 노골적인 게 아닌가?”
“사실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하진이 집권하기 훨씬 전부터 아예 공식적으로 매관매직을 했었습니다. 주군도 잠깐 하진 곁에 있으셨으니 아실 거 아닙니까?”
“그래. 그랬지. 그때 난 여기에 별 관심도 없었고, 그냥 미친놈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하긴 이해가 살짝 가기도 하는군. 조정의 관직 목록을 보니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군. 이걸 어찌 일일이 공을 따져가며 제수한단 말인가? 그냥 돈 받고 파는 게 속편했겠군.”
“허나 주군께서는 그리 하시면 아니 됩니다. 관직을 매관매직으로 산 자가 관리가 된다면 과연 어찌 되겠습니까? 그 관직을 사는데 평생 번 돈이 들어갔으니, 본전 생각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럼 과연 청렴결백하겠습니까? 어떻게든 뜯어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뜯어내려할 것입니다. 그럼 그 관리가 맡고 있는 부분에서는 각종 부정과 비리가 또 판치면서 조금씩 썩어가는 겁니다. 물론 이 많은 관직을 일일이 제수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허나 이 정도는 하셔야 합니다. 높은 위치에 오르셔서 큰 권력을 손에 쥐신 만큼 주어진 의무도 큰 법 아니겠습니까?”
“알겠어. 알겠다고.”
이의민은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관직 목록과 후보 목록을 살피고 있다. 고려시절에는 하진과 마찬가지로 했던 결과 자신은 패망했다. 두 번 다시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
그때 부관 하나가 웬 서신을 가져왔다.
“승상. 양평정후께서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양평정후...?”
이의민이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의아해하자 종요가 설명했다.
“양평정후라면 최열이라는 사람입니다. 사마와 사공을 역임한 조정의 원로인데, 지금은 은퇴하여 다른 관직은 없고, 대신 낙양의 유지로서 선비들에게 꽤나 영향력을 행세하는 자입니다.”
“뭐 보나마나 날 잡고 만나자는 얘기겠지.”
종요의 설명을 듣고 별 생각 없이 서신을 읽던 이의민은 순간 표정이 구겨졌다. 순유는 이의민의 표정을 보고서는 서신을 읽지 않고도 내용을 짐작했다.
“양평정후가 효렴을 한 것이군요.”
효렴은 효행이 많은 사람을 관리에 등용시켜 주십사 하는 일종의 천거다. 말이 효행이지 실상 자기 사람을 요직에 앉히고 싶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런 천거는 이의민이 한두 번 받은 게 아니다. 이미 일상이었는데 이의민이 표정을 구긴 이유는 서신에 적힌 문구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은 천거를 하면서 자신이 승상을 얼마나 존경하고 따르는지, 그리고 천거가 이루어졌을 시 어떤 대가를 지불할 것인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물론 이의민이 그런 천거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른 놈들은 서신을 보내더라도 설설 기며 아부를 떨어왔는데, 최열의 서신에는 그런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마치 도발처럼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서신의 마지막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이 늙은이의 청을 들어주어 고맙소. 승상의 무운을 빌겠소.’
“하!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관직을 나한테 맡겨 놨나? 버릇없는 새끼. 당연히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나봐? 지가 직접 와서 사정해도 모자랄 판에.... 이놈은 대체 뭐하는 놈인데 이리 방자한 것인가?”
이에 순유도 살짝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하진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서 처벌은 힘든 자입니다.”
“쯧쯧. 아무리 그래도 원로씩이나 되는 놈이 이리 눈치가 없나? 이리 나대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보나?”
이번에는 종요가 설명을 보탰다.
“아마 일부러 그랬을 겁니다. 주군께서 백성들의 평판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시니 절대 명분 없이 자신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지요. 그리고 주군께서 비록 낙양을 점령했다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대한 연합군 세력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능구렁이 최열은 이 상황을 이용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흠. 그런데 하다못해 삼사도 아니고 현직도 아닌 원로가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건가?”
“최열이 은퇴하고 낙양 유지로 지낸다지만 조정에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합니다. 조정의 권력을 아예 놓은 것이 아니지요.”
“흠. 그렇다면 비선실세라고 봐야 하나.”
“그렇습니다. 아마 비선 중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자라고 보셔도 됩니다.”
이의민은 더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얘기했다.
“내가 들어온 이상 비선 따위는 있어서 아니 되지. 전부 다 처단해야겠어.”
하지만 비교적 오랫동안 황궁에서 일한 덕에 낙양 사정에 밝은 종요는 우려를 표했다.
“주군. 그리 성급하게 결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비록 주군께서 낙양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지만, 밑바닥 상황은 다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낙양에서 부를 쌓아온 낙양유지들, 그리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미래에 관리가 될 선비들, 그리고 이 자들을 연결해주며 궂은일을 해주는 흑사회, 이렇게 3개의 세력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실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정점에 있는 자가 바로 최열입니다.”
“음... 결국 최열을 건드리면 그 3개 세력이 내게 등을 돌릴 거다 뭐 그런 건가?”
“맞습니다. 이미 하진을 숙청하고 관련된 자들을 처벌했기에 그들을 처벌할 마땅한 명분이 없습니다. 명분이 없는 상태에서 그를 치게 되면 백성들이나 다른 제후들의 평판이 떨어질 것입니다. 설사 주군께서 감내할 생각이 있으시다 하더라도 당장 장안의 동탁을 몰아내기 전에 낙양 내부에 적을 만드는 것은 매우 위험한 도박입니다. 그러니 매우 신중하게 접근을 하셔야 합니다.”
종요의 조언을 들은 이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밀어붙였겠지만, 이제는 이의민도 많이 신중해졌다.
“확실히 기분대로 처리할 만 한 일은 아니군. 그런데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흑사회 놈들이 제도인 이 낙양 안에 버젓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라에서 그 놈들을 왜 소탕하지 못했는가? 그만큼 크고 위협적인 세력인가 말이야.”
“그렇진 않습니다. 흑사회 놈들이 대단해봤자 낙양 저잣거리 건달패에 불과한 놈들입니다. 조정에서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이면 소탕할 수 있습니다. 허나 문제는 그럴 의지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아니. 의지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여태껏 흑사회를 보호하려고 하는 입장입니다. 부패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이들이 흑사회이니까요. 민초들 수탈 같은 대놓고 하기엔 눈치 보이는 일들이나, 정적 제거 같은 일들에 쓰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필요로 하는 공생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설명을 다 들은 이의민은 혀를 찼다. 듣고 보니 정말 있어서는 안 될 놈들이다. 종요의 조언으로 신중해진 이의민이지만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하여간 원로란 놈이 가지가지 하는 군. 매관매직으로 삼공을 지낸 주제에 말이야. 그럼 정말 그놈들을 어찌할 방법이 없단 말인가? 동탁 믿고 이러는 거 같은데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동탁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해. 자네가 정 방법이 없다면 내 방식대로 쓸어버릴 생각이야.”
하지만 순유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방금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명분이 없어서 놔둘 수밖에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 말인즉슨 명분만 만들면 하씨들과 마찬가지로 처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처단할 명분은 생각보다 지천에 널려 있을 겁니다.”
“오호라.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역시 순유는 다 계획이 있었다.
“좋아. 공달. 원상. 이 건에 대해서는 자네들에게 맡기지. 흠. 이것뿐만 아니라 사실상 다 맡기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자네들이 알아서 한번 잘 해봐.”
“예. 주군. 최열은 아직도 자기가 예전과 같은 위치에 있는 줄 착각하는 모양인데,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보여주겠습니다.”
순유, 종요와의 국정 논의를 마친 이의민. 그를 만나고 싶은 사람이 또 승상부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 인물은 이의민에게 연줄이나 대려고 온 자가 아니다. 이의민도 만나기를 고대했던, 하남윤이 된 정욱이었다.
“오오. 중덕. 기다라고 있었네. 동탁 쪽 소식은 뭐 들어온 게 없는가?”
“당장이라도 움직일 거 같던 놈들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낙양 탈환을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는 좀 더 상황을 봐야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있는데 이상하게 홍농에 유입되는 백성들이 많아졌습니다.”
이에 같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대홍려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이의민이 대부분의 안건들을 순유, 곽가 등 하고만 논의하니, 발언할 기회가 될 때 뭐라도 말하고 싶은 듯했다.
“승상께서 낙양을 탈환하셨으니 돌아오는 백성들이 아니겠소? 아니면 타지 사람들이 거주지 이전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승상의 선정은 소문이 파다하지 않소? 실제로 변방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오.”
하지만 순유와 종요, 곽가 등은 종요의 보고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낙양을 탈환했는데 왜 홍농에만 이주를 한단 말인가.’
그래도 그들 역시 당장 이유를 짐작할 수 없으니 대홍려의 의견을 따로 반박하지 않았다.
“평범한 일은 아닌 것 같으니 홍농 쪽 경계를 좀 더 강화하시지요.”
“그리 하도록. 그럼 홍농에 3만의 추가 병력과 함께 서황, 장료, 고순을 보내라.”
이윽고 회의가 끝나고 신하들이 일제히 승상부를 빠져나갔다. 그런데 곽가가 종요의 소매 깃을 잡고 늘어졌다.
“원상형. 나 좀 살려주시오.”
“허허. 천하의 광록훈 곽봉효를 누가 해하는가?”
“공달 형이 날 죽이려고 하오. 매일 약밥이나 백제에서 왔다는 약제 같은 맛대가리 없는 것들만 골라서 숙수가 내줍니다. 제발 날 살려주시오. 고기, 고기를 먹고 싶소.”
“허허. 남들은 몸에 좋다고 해서 먹지 못해 안달인데 배부른 소리를 하는구먼.”
“아! 그러지 말고 오늘은 술 한잔 합시다.”
“그럼 오늘은 나와 함께 나가지. 닭을 아주 맛있게 굽는 객잔을 알고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