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88화 (88/175)

88. 논공행상 (1)

낙양의 감옥에서 많은 이들이 질질 끌려 나오고 있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지금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아직도 인지하지 못하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이들은 하진과 하묘, 한때는 하태후였던 하씨, 그리고 그 일족들과 왕윤, 주준, 사손서, 노식 등 조정의 대신들이었다.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난 이 나라의 대장군이다!”

“대장군 같은 소리하고 있네. 대역죄인아. 또 쳐 맞기 싫으면 얌전히 따라와라.”

하진은 아직도 자신이 대장군인줄 알고 군사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내세웠지만, 예전에는 감히 눈도 마주칠 수 없었던 말단 군사에게 얻어맞을 뿐이었다.

특히 군사들은 하진과 하묘 등 하씨들에게 쌓인 게 많았다. 말단 군사들은 사실 하진들과는 직접적으로 마주칠 기회도 없었지만, 그들도 알 건 다 알았다. 자신들이 왜 이렇게 어렵게 생활을 하는지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하씨들에게 그동안 쌓인 울분을 풀 절호의 기회였다. 특히 권력의 최정점에서 온갖 사치, 향락을 즐겼던 하진과 하묘, 하태후에게는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일반 죄수들, 아니. 그보다 더 심하고 모질게 대했던 군사들이었다.

그런 하씨들과 같은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던 왕윤 등 나라의 충신들은 처지가 조금 달랐다. 군사들은 감옥에 갇힌 그들에게도 충분히 예를 갖췄다. 죄인이 됐지만 사도로서, 우장군으로서 대접했다. 군사들도 그들이 진정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쳤다는 걸 알고 인정해주는 셈이었다.

“왕 대인. 이제 나오시면 됩니다. 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 죄가 없다는 게 밝혀져 석방되셨습니다.”

“그럼 대장군과 태후마마는 어찌 되는 것이냐?”

“저들은 이곳 분들과는 달리 대역죄인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대장군과 태후가 아닙니다.”

“허어!”

왕윤은 한숨을 내쉬며 하진 쪽을 바라보았다. 지하 감옥을 지키는 말단 병사 하나가 하진에게 욕설을 퍼붓고 손찌검을 하고 있었다. 지금 왕윤에게 얘기를 하는 병사 역시 하진과 하태후는 더 이상 예전 신분이 아니라며 그들을 깔아뭉개고 있다.

다른 때라면 그들에게 호통이라도 치고 싶은 왕윤이지만, 지금은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다. 혹시라도 눈앞의 병사가 하진을 구타하고 있는 저 병사처럼 돌변할 것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솔직히 왕윤도 하진과 하태후 등이 황실과 조정을 좀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의민이라는 더 큰 적이 나타났으니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뜻을 함께 한 것뿐이었다. 어쨌든 지금 보니 병사들이 자신과 하진을 대하는 태도 차이도 그렇고, 업보가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왕윤이다.

왕윤은 얼른 주준과 사손서 등에게 얘기했다.

“우장군. 광록훈. 이대로 있을 것이 아니라 즉시 폐하께 가야겠소. 대사농은 대장군과 태후마마를 처형시키기로 마음먹었을 거요. 그것만은 막아야하지 않겠소?”

모두 왕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나가려고 했다. 그때 왕윤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병사가 굉장히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왕 대인. 여기 있는 분들 모두 지금 당장 폐하를 뵈실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어찌 내가 폐하를 알현할 수 없단 말인가?”

“지금 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 원래 맡고 계셨던 관직이 박탈되셨습니다. 즉, 왕 대인도 더 이상 사도가 아니시고, 주 장군께서도 우장군이 아니십니다. 조정에 아무런 관직도 없으신 분이 폐하를 알현할 수는 없습니다.”

“크윽!”

이미 사전에 순유와 정욱 등이 치밀하게 처리를 해놓았다. 왕윤은 그 병사에게 큰 소리도 쳐보고 어르고 달래기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대로 황궁에서 나갈 수밖에 없다.

황궁 밖으로 쫓겨나던 중 사손서가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왕윤에게 말을 걸었다.

“사도. 우리가 낙양의 선비들을 모아서 황궁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소? 저들이 아까 얘기했듯이 우리는 죄가 없다고 했잖소. 그런데 멋대로 우리 관직을 빼앗았으니 이는 법도 기준도 없는 무도한 짓이오. 이걸 성토하면서 낙양의 선비들을 모은다면 이의민을 압박할 수 있지 않겠소?”

“허나 이의민에게 그런 게 통하겠소이까?”

“이의민이 앞뒤 없이 행동하는 것 같아도 백성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아주 무도한 자는 아닌 것 같소. 그러니 낙양의 선비들을 앞세워서 압박한다면 이의민도 물러설 수밖에 없을 거요.”

“그럼 그리 합시다. 우장군. 그대도 도와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왕윤과 사손서, 주준과 함께 낙양의 선비들을 모으러 갔다.

한편 하진과 하묘는 대역죄인 취급을 받으며 목에 포승줄을 매단 채 개처럼 끌려가고 있었다.

황궁의 어도로 끌려온 그들은 황제와 이의민 앞에 무릎 꿇려졌다. 황제는 그런 하진과 하묘를 외면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외삼촌 둘이 그 꼴이 됐으니 똑바로 보기 힘들 터였다.

“스, 승상... 짐은 속이 좀 좋지 않소.... 침소에 좀....”

하지만 이의민은 정중하지만 강한 어조로 황제가 외면하려는 것을 막았다.

“끝까지 보셔야 하옵니다. 폐하. 그래야 이 역적 놈들에 의해 사라졌던 폐하의 위엄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하진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이의민에게 애걸복걸했다. 개처럼 기어서 말이다. 한때 위풍당당했던 대장군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보게. 대사농. 아니. 승상. 내가 자네를 후장군으로 발탁한 덕분에 자네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 아닌가. 그 은혜를 어찌 이리 갚으려는가?”

“후후후. 그건 고맙게 생각한다. 허나 은혜를 받으면 그 자가 날 죽이려 해도 가만히 죽어줘야 한다는 말인가? 네놈이 날 죽이려 할 때부터 네놈은 그 은혜를 스스로 발로 차 버린 셈이다.”

하진은 이의민과는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황제에게 기어갔다.

“폐하! 신을 살려주시옵소서.”

황제는 하진의 애원을 듣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라고 어찌 외삼촌인 하진을 살리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이미 이의민과 하태후의 목숨을 놓고 협상을 한 상태였다. 하태후라도 살리고 싶다면 하진과 하묘는 반드시 죽이라는 이의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황제다.

‘미안하오. 외숙.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소.’

“여, 여, 역적 하진과 하묘를 참수하라.... 크흑!”

황제는 울먹거리면서 하진의 참수를 명했다. 결국 하진과 하묘의 목이 떨어졌다.

황제는 도저히 그걸 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하태후는 멍한 표정으로 오라비의 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이의민의 위엄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죄인 하씨 역시 오랫동안 친족들을 이용하여 국정을 농락해왔다. 그 죄가 하진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아니하나 황상의 생모라는 처지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녀의 목숨은 보전하되 태후전의 가장 작은 방에 머물도록 하고 궁인으로 강등시킨다. 그녀는 앞으로 폐하의 허락 없이 누구도 만날 수 없고 시종을 거느릴 수도 없다.”

어쩌면 죽음보다 더 치욕스런 일이다. 태후가 궁인이라니. 물론 그녀에게 궁인들이 하는 잡무를 시키지는 않겠지만 황궁 내 최정점의 권력을 누려왔던 그녀 입장에선 너무나도 굴욕적인 처우였다.

황제의 허락이 있다면 다른 이들을 만날 수도 있고 시종을 거느릴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 황제는 이제 이의민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이의민의 허락이 있어야만 치욕스런 삶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하태후, 아니. 하씨는 절망스런 표정으로 궁인들에게 끌려갔다. 이제 그녀를 볼 일은 두 번 다시없을 터였다.

이제 막 하씨들에 대한 정리가 끝날 무렵이었다. 갑자기 황궁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왕윤과 사손서 등이 낙양의 선비들을 끌고 온 것이었다.

“폐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어찌 죄가 없는 사도와 광록훈, 우장군의 관직을 거두시나이까? 이는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이를 폐하께 추천한 승상에게 책임을 물으셔야 하옵니다!”

낙양에 있는 모든 선비들이 전부 총동원된 것 같았다. 황궁 앞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수였다. 낙양에 이렇게나 많은 선비가 있었나 싶다.

이의민은 그들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려시절이라면 괜히 시끄럽게 군다며 닥치는 대로 다 죽여 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이의민은 그러는 것이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왕윤은 그런 이의민을 보며 선비들을 앞세운 효과가 있나 싶어 기대를 가졌다. 그런데 이의민은 이들을 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관직을 거두다니 그게 다들 무슨 소리인가?”

“대사농! 아니. 승상! 그대가 폐하를 현혹시켜 사도와 광록훈, 우장군의 관직을 마음대로 뺏은 것 아니오?”

“거 무슨 말도 아니 되는 소리를... 다들 잘 들으시오. 그들의 관직을 뺏은 게 아니올시다. 그들은 더 높은 관직에 제수되기 위해 잠시 전 관직을 내려놓은 것뿐이오.”

이의민의 얘기에 다들 어리둥절했다. 더 높은 관직을 준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리고 이의민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이들이 여기에 모여 상소를 올릴 명분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특히 당사자인 왕윤과 사손서, 주준은 크게 당황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요. 그대들에게 이제 더 높은 관직이 제수될 것이오.”

이의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의 교지를 가져온 신하가 이들 앞에서 크게 외쳤다.

“왕윤, 사손서, 주준은 들어라! 그대들은 여태껏 짐의 곁을 지키며 평생을 헌신해왔다. 비록 역적 하진에게 속아 잠깐 불충을 저지른 과오는 있지만, 짐은 그것조차 그대들의 충심이 너무 커서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에 짐은 전 사도 왕윤을 태사(太師)로 임명할 것이며, 사손서는 태부(太傅)로 임명하고, 주준은 태보(太保)에 임명한다.”

신하가 교지를 외치자 세 사람을 비롯한 이곳에 모인 모든 선비들이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이 여기에 이리 모인 이유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 그럼....? 우리가 왜 여기에....?”

“상소를 올릴 이유가 없지. 이만 해산하세....”

“괜히 사도 어른 때문에... 아니. 이제 사도가 아니시지. 태사 어른 때문에 이게 무슨 망신인가....”

왕윤 등은 이의민에게 완전히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을 바로 삼사로 임명했다면 황제에게 바로 가서 여러 가지 훼방을 놓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의민은 그들이 삼사로 임명되기 전 잠깐 관직을 전부 박탈시켜서 하진이 처형될 동안의 시간을 벌었다. 그뿐만 아니라 낙양의 선비들에게 실없는 인물로 각인되게 만드는 효과까지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삼사로 승진을 한 셈이지만, 실권은 더 없는 명예직으로 만들었다. 이걸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할 기반을 마련한 이의민이다. 역시 이 모든 것은 순유와 곽가, 정욱이 함께 머리를 맞대 만든 작품이다.

왕윤, 사손서, 주준은 삼사로 임명되고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의민에게 완벽히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명예직일 뿐인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낙양의 선비들을 다시 모으려고 해도 이미 한번 물을 먹은 그들이 왕윤 등의 부름에 제대로 응하지 않을 확률이 컸다.

이의민은 승리의 미소를 짓고는 황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예전처럼 시원하게 피로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자! 이제 대충 다 해결 됐으니 마무리를 지어야겠군. 모두 승상부로 모이라고 전해라.”

이의민이 얘기하는 마무리는 수하들의 논공행상이다.

승상부에 모인 이의민과 수하들.

“마음 같아서는 자네들에게 최고의 관직을 내리고 싶지만 공달이 반대하더군. 처음부터 너무 고관들로 구성되면 보는 눈도 있으니 별로 좋지 않다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모두들 공이 큰 것을 알고 있네. 누구하나 이름 뺄 사람이 없어. 그래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날 따른 기간과 그간의 공을 합산하여 내린 결정이네.”

최종적으로 임명한 수하들의 관직은 다음과 같았다.

순유는 태상, 곽가는 광록훈, 미축은 태복, 종요는 대사농에 임명됐다. 삼공 바로 아래 위치한 구경에 이의민이 사람이 네 명이나 배치된 셈이다.

무장들 역시 예외는 없다.

서황과 우금, 고순, 장료는 각각 동서남북 사정장군이 됐고, 관해는 진동장군, 악진은 진서장군, 태사자는 진남장군, 황충은 절충장군에 임명됐다.

그 외에도 유엽은 간의대부, 만총은 사례교위, 교모는 청주자사, 포신은 서주자사, 왕광은 연주자사, 정욱은 하남윤으로 임명됐다.

정말 대대적인 관직 개편이었다. 모두가 감격하는 가운데 유독 한사람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아니? 이게 끝인가? 나는? 이 곽봉님은...?”

편한 자리라서 그런 것일까 억울해서 그런 것일까? 곽봉은 자기도 모르게 반말을 하면서 이의민에게 따졌다. 이의민은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아! 형님을 빼먹었군. 곽봉을 낙양 내성보사로 임명한다.”

“아, 아니?! 지금 뭐라고....?”

곽봉이 자기 귀를 의심하는 가운데 서황은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 축하합니다! 곽 형님. 그토록 바라던 내성보사가 되셨으니 실로 감축할 일이 아닙니까?”

“염병. 야! 공명! 너 죽을래. 의민. 아니. 아우님. 아니. 주군. 정말 이러긴가?”

곽봉만 빼고 모두가 즐겁게 웃고 있었다. 이의민은 한참 웃다가 다시 표정을 진지하게 고치고 공표했다.

“비장군 곽봉을 후장군으로 임명한다.”

“이런 후장...! 응? 후장군....?”

곽봉이 진짜로 임명된 관직은 사방장군 중 하나이자 이의민이 받은 첫 번째 관직인 후장군이었다.

“뭐....? 진짜인가? 내가 정말 후장군이란 말인가...?”

낙양 외성 보사였던 자신이 사방장군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제야 다른 이들도 활짝 웃으면서 곽봉을 축하했다.

“곽 형. 축하하오.”

“내 사실 다 알고 있었소. 하하!”

모두가 웃을 때 곽봉의 눈물이 떨어졌다. 당연하게도 기쁨의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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