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상처 입은 맹수 (1)
의기양양하게 방진을 폈던 포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막상 유인작전을 실행해보니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만총이 짠 방진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단 한 사내 때문에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선두에서 방천화극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휘두르는 여포 때문이었다. 그만큼 여포는 상식을 뛰어넘는 무위를 선보이고 있었다.
분명 그가 탄 말 위로 그물을 제대로 던졌다. 하지만 여포에게는 소용없었다. 처음에는 말이 크게 당황하며 뒤로 물러서자 여포 역시 잠깐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여포는 이내 방천화극을 휘둘러 그물망을 그대로 찢어버렸다. 날붙이로 그물을 찢는 것이 뭐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만총이 만든 그물은 촘촘하기도 하고 거대하기도 했다.
몇 번 무기를 휘두른다면 일부분이 찢겨나갈 수는 있어도 전체가 찢어질 일은 없었다. 그만큼 잘 만든 그물이었다. 하지만 여포의 방천화극은 그물을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버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물을 다 찢어버린 여포는 그 기세를 그대로 타고 포신의 군사들에게 돌격했다.
“이런 괴물 같은....! 어쩔 수 없다!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결국 포신은 눈물을 머금고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돌격해오는 여포와 여포군 기마병들에게 군사들이 짓밟히고 있었지만, 일단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할 것 아닌가.
포신은 예상보다 피해가 커졌지만, 유인작전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군사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넋 놓고 있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나 다를 바 없다. 어떻게든 희생을 감내하고 작전을 성공시키는 것이 진정 그들을 위한 길이다.
한편 후방에서 함정을 준비하는 왕광 등도 여포의 모습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기존의 함정이었다면 정말 사마의의 말대로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마 가주님. 군사들이 대열도 제대로 못 갖춘 채 무작정 도망치고 있구려. 일전의 함정으로 갔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습니다.”
“아마 그랬겠지요. 제 아들이지만 볼 때 마다 놀랍습니다. 그걸 한눈에 알아보다니.... 정말 대단한 아이입니다.”
“만 군사도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저나 다른 이들은 그저 어린아이의 말이라고 제대로 듣지도 아니 했는데.... 어쨌든 그때 우습게 생각했던 것 때문에 만 군사에게 미안해지는군요.”
여포는 어느새 포신의 군사들을 다 뚫어내고 포신 근처까지 다가왔다. 포신군도 그 수가 제법 적지 않은데 벌써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여포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괴물 같은 놈.... 앞에 군사들이 몇 명이었는데....’
“그래! 포신! 네놈도 이의민과 같이 있었던 놈이지! 왕광과 함께 여기서 죽어라!”
여포는 눈에 빛을 내며 포신을 향해 달려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모습을 본다면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움직이지도 못할 터였다.
그래도 포신 역시 한 지역에서 세력을 이룬 인물이다. 여포를 보고 움직이지도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
“흥! 도망가긴 왜 도망가느냐? 네놈의 개 짖는 소리를 다시 한번 들을 기회를 두고 말이다!”
“이 씨발 새끼가!!”
단순한 여포는 또 간단한 도발에 말려들었다. 포신을 향해 죽일 듯 뛰어갔다.
왕광 등은 후방에서 그런 포신과 여포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여포와 그 군사들이 준비한 함정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전에 포신이 따라잡혀 죽어버리면, 그의 군사들이 다 쓰러진다면 생각보다 피해가 너무 커지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왕광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아서일까? 포신은 성공적으로 여포를 계획된 위치로 유도했다.
“모두 산개하라!”
포신과 군사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열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전속력으로 도망치는 것만 열중하는 포신군이었다.
다른 장수였다면 이에 이상함을 느낄 법도 했지만 포신의 도발에 넘어가 잔뜩 흥분하기도 했고 평소에도 자기 잘난 맛에 똘똘 뭉친 여포는 자신이 두려워 도망치는 건 줄 알고 그대로 쫒았다.
그때 사방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포가 있는 곳에서부터 땅이 무너지고 있었다. 서서히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그대로 땅이 꺼지듯이 내려앉았다.
쿠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흙먼지를 동반하며 무너진 땅. 거기에 있던 여포는 흙먼지 속에서 그대로 사라졌다. 아마 그대로 함정으로 떨어졌으리라. 여포가 제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물리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다.
여포뿐만 아니다. 여포를 따라왔던 여포군 군사들 역시 일제히 함정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으아아악!!”
“뭐, 뭐야?! 땅이 무너진다!”
전장에는 그들의 비명소리 뿐이다. 기세 좋게 포신군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당연히 이겼다고 생각되는 전투에서 천재지변과 같은 일을, 아니. 그보다 더한 일을 겪었으니 그저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새로 만든 함정이 제대로 발동했다. 포신의 군사들이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어쨌든 그들의 희생 덕분에 여포와 그의 군사들을 정확히 함정 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아마 이전의 작고 많은 함정이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작전이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포신의 군사들이 대부분 함정을 먼저 밟아버렸을 테니 말이다.
“됐다!”
만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선두의 여포군 상당수가 함정에 빠지긴 했지만, 남은 군사들도 많았다. 실질적으로 함정에 빠진 여포군의 수는 대략 3천 정도였다. 나머지 2만 7천에 달하는 군사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얘기다.
이미 포신군 역시 앞선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왕광군 역시 2만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찌 승리를 점치고 있을까?
함정에 빠진 3천명 안에 여포가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여포만 없으면 충분히 해볼 만한 전투다. 게다가 적들은 예상치 못한 함정과 여포의 갑작스런 부재로 인해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아직까지 여포군에 비해 병력이 더 적긴 하지만 오히려 왕광과 포신의 군대가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여태껏 도망치던 포신은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남은 군사들에게 외쳤다.
“이제 여포는 없다! 동료들의 복수를 하자!”
왕광 역시 지체하지 않았다.
“포신을 도와 적들을 섬멸하라!”
아까 전의 치욕을 갚기라도 하듯 방열과 한호, 변희가 동시에 튀어나갔다. 여포에게는 쪽도 쓰지 못하고 도망쳤지만, 남은 여포군들을 상대로는 충분히 맹활약 할 수 있는 그들이다. 우왕좌왕하던 여포군을 순식간에 쓸어버렸다.
후방에서 여포군을 통솔하던 장양과 휴고 등은 있는 힘껏 남은 군사들을 통제하려고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놈들아! 당황하지 말고 정신 차려라! 대열을 유지하라!”
하지만 여포군이 따르는 건 장양이나 휴고가 아니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여포가 사라졌으니 제대로 통솔이 될 리가 없었다.
그나마 어떻게든 군사들을 통제하려는 그들의 노력도 곧 방해를 받게 됐다. 휴고 앞으로 다가온 변희.
“흐흐! 이게 누구신지... 휴 형님 아니쇼?”
“이놈 변희? 네놈! 어디 갔다 했더니 왕광에게 붙었구나! 이 배신자 놈!”
“배신 같은 소리하네. 흑산적이 망한 지가 언젠데 누구한테 붙든 무슨 상관이요?”
서로 안면이 있는 둘은 같은 흑산적 출신이었다. 흑산적이 이의민에 의해 토벌된 이후 둘의 행보가 갈렸는데, 휴고는 여포에게 가고 변희는 왕광에게 간 셈이었다.
둘은 예전의 인연이 악연이었다는 듯 치열하게 싸웠다. 둘 다 대단한 무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 밀리지 않고 흥미진진한 접전을 이어갔다. 원래 싸움은 하수끼리의 싸움이 더 재미있다고 하지 않던가.
원래 휴고가 변희에게 밀리는 장수는 아니었지만, 주변 상황과 분위기 때문에 점점 밀리는 모양새였다. 오십여 합이 넘어갈 무렵 휴고는 손발이 어지러워지더니 끝내 변희의 유성추에 정통으로 가격당해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휴고마저 쓰러지니 군사들을 그나마 통제할만한 장수도 없었다.
“장 별가님. 이제 어쩝니까?”
장양이라고 별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사실 장양은 여포를 따라 연합에 합류하는 것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도 연합이 승리할 거라 믿고 있었지만, 괜히 다른 연합에 치여 푸대접이나 받고 앞에서 인간방패 역할이나 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포를 믿고 연합에 합류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는데, 그 여포도 없으니 낙양으로 갈 이유가 없다. 그전에 자신들의 목숨이 더 급한 상황이니 일단 낙양이고 나발이고 무작정 퇴각을 선택하는 장양이다.
“여기서 할 게 뭐가 있겠느냐? 퇴각하라!”
하지만 만총은 그걸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한놈도 살아가선 아니 된다! 모두 퇴각로를 막아라!”
목순이 어떻게든 장양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항전했지만, 금세 방열의 창에 목이 달아났다. 이제는 정말 장양 하나만 남았다.
장양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데 그때 뒤에서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는 사자후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아!!”
전장의 모두를 멈추게 하는, 실제 사자도 놀라서 도망갈 것 같은 사자후였다.
그 소리는 분명 함정으로 판 구덩이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모두가 침을 삼키고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퍽! 퍽!
무언가 찌르고 쌓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구덩이에서 높게 뛰어오르는 한 인영을 볼 수 있다.
“크아아아!!”
놀랍게도 여포였다. 그는 구덩이에 빠져 죽은 군사들의 시체를 쌓아 그걸 발판으로 구덩이를 빠져 나왔다. 그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애초에 함정에서 살아남았다는 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그 구덩이는 한번 빠지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구덩이의 바닥 전부를 창으로 메웠고, 그것도 모자라 창 사이사이에 날붙이를 붙여 발을 딛는 순간 상처를 입도록 했다. 게다가 여포는 가장 먼저 떨어졌었다. 운 좋게 살았다고 해도 이후 떨어진 군사들에게 압사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대체 어떻게 했는지 여포는 살아서 구덩이를 빠져 나왔다. 하지만 그의 몸도 성치는 않았다. 온몸에 큰 상처가 나있고 팔은 부러졌는지 너덜거렸다. 분명 엄청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도 여포의 목소리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장양! 어디 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주군!”
여포는 주인 잃은 말 하나를 잡고 장양에게 갔다. 오른팔 하나로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그의 앞을 막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온몸이 작살난 듯 보였지만, 그의 등장만으로 왕광군과 포신군의 기세가 주춤했다. 오히려 온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은 그를 상대하는 군사들을 더 두렵게 만들었다.
아무런 제지 없이 장양 앞으로 간 여포.
“주군. 일단 피하셔야 합니다.”
“크으! 저런 쿨럭! 버러지만도 못한....”
여포는 장양에게 가고 나자 그제야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뚫고 지나온 것이 짜내고 짜낸 힘이었나 보다.
어떻게든 여포를 살려야 된다는 생각으로 장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각했다. 여포가 쓰러졌다는 것을 확인한 왕광과 포신, 만총은 다시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쫓아라! 한놈도 살려두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