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2)
방열과 변희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휘둥그레 눈을 떴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인물이 하나 있었다.
이제 한 10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였다. 방열과 변희는 황당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여 아이를 다그쳤다.
“얘야. 대체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느냐?”
그런데 그 어린아이는 방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꾸 딴 소리만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웅얼거렸던 그 내용이었다.
“그고 구로케 하는고 아닌데....”
“뭐, 뭐라고?”
“그고 구로케 하는고 아닌데....”
“변 장군. 이 애새끼가 자꾸 뭐라고 하는 건가? 알아듣겠나?”
변희는 인상을 쓰며 어린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젠장! 내가 왜 이런 애새끼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거야?’
함정을 파다말고 어린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하고 있다니, 자신의 처지가 황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집중을 한 결과 변희는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었다.
“그거.... 그렇게 하는 게.... 아닌데.... 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뭐? 뭘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삽질을 얘기하는 거 아닐까요?”
변희의 번역(?)을 듣고 난 방열은 성질이 났다. 안 그래도 거대한 함정을 파느라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웬 어린아이가 나오면 안 될 곳에 나타났다. 그것도 모자라서 훈수를 두고 있으니 기가 막힐 지경이다.
“하! 콱! 이 어린노무새끼가! 네놈이 태어나서 삽질을 해본 적이라도 있나? 너 언제 여기 왔어? 이거 이거 군기가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먼! 이 꼬마가 들어올 동안 다들 뭐했느냐?!”
방열의 성질에 군사들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힘들게 삽질을 하는 터라 누가 오는지 경계하기가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 어린아이가 이곳에 있는 건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다. 방열은 그 아이를 그냥 강제로 내보내려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봐. 변 장군. 아무래도 저 꼬마, 이상하지 않은가?”
“예? 뭐가 이상합니까?”
“아무리 우리가 경계에 소홀했다고는 하나 저런 아이가 어찌 이곳에 들어온단 말인가? 게다가 저 아이가 입고 있는 옷 좀 보게. 평범한 애가 입고 있을 만한 옷이 아니야.”
“그래서 뭐가 문제입니까?”
“아무래도 저 꼬마, 여포의 세작이 아니겠는가?”
지나친 방열의 억측에 변희는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답했다.
“에이! 그건 아닐 겁니다. 세작이면 저런 화려한 복장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 백성의 아이 같이 꾸몄겠지요. 게다가 애초에 세작을 저런 아이로 쓰겠습니까?”
“아니지. 오히려 그런 고정관념을 이용해서 일부러 저런 세작을 쓴 것일세.”
변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 그 아이가 다시 뭔가 웅얼거렸다.
“그고 구로케 하면 아조씨들 다 죽는데....”
이제는 그 아이의 말을 한번에 알아들을 수 있게 된 변희. 그 말을 듣고 나니 기가 막혔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삽질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함정에 대해 지적을 하는 것 같았다. 삽질은 자기들이 직접 하는 게 아니라 군사들이 하는 거라 그 꼬마의 지적이 직접적으로 와 닿지는 않았던 방열과 변희였다. 그런데 함정에 대한 지적을 하니 순간 열이 확 올랐다.
“방금 저 꼬마가 또 뭐라고 했는가?”
“함정이 잘못됐다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저 꼬마, 방 장군의 말대로 세작일지도 모릅니다. 제까짓 게 뭘 안다고 지적을....”
“그렇지? 내 말이 맞다니까!”
그렇게 죽이 맞은 방열과 변희. 둘은 그대로 그 꼬마를 끌고 왕광에게 데려갔다.
하내 태수 왕광은 두 인물을 만나고 있었다. 한명은 방열과 변희도 익히 아는 인물, 만총이었다. 그런데 다른 한명은 둘도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무슨 일인가? 방 장군. 벌써 끝났는가?”
“거의 다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중 중요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바로 여포의 세작으로 의심되는 소년을 잡았습니다.”
“세작이라니?!”
방열의 보고에 왕광은 물론 만총과 그 옆의 처음 보는 사내 역시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방열은 자신이 또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여기며 그 아이를 데리고 오게 했다. 그 아이를 본 왕광과 만총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내는 갑자기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왕광은 놀랐다는 것인지 아니면 황당하다는 것인지 약간 애매한 목소리로 방열에게 되물었다.
“세작이라는 게.... 설마 지금 그 아이를 얘기하는 것인가?”
“예. 태수님도 믿기지 아니 하실 줄 알았습니다. 세작으로 이런 어린아이까지 이용하다니.... 여포, 그놈은 참으로 악독한 놈입니다.”
방열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왕광에게 아이를 내세웠다. 이의민군이 하남 일방을 쓸고 있을 때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다며 얼마나 투덜댔던가. 드디어 공 세울 기회를 잡았다 생각하는 그였다.
그때 낯선 사내가 갑자기 왕광에게 사과를 했다.
“아무래도 아들놈이 호위도 물리치고 돌아다녔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허허!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마 선생의 아이인데 어찌 탓을 하겠습니까?”
“그리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놈! 둘째야! 아비 몰래 어디를 그리 다니는 것이냐? 집에 돌아가면 혼꾸멍을 내줄 테니 단단히 각오하거라!”
둘의 대화를 듣고 방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작으로 의심한 그 아이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됐으니 말이다.
이 부근에서 사마선생이라 불릴 사람은 한명 뿐이었다. 낯선 사내의 정체는 여남 원가와 함께 천하 이대세가로 불리는 사마가의 가주, 사마방일 터였다. 장안을 관리하는 관직인 경조윤에 있던 그가 고향인 하내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마방의 둘째 아들은 바로 사마의였다. 원 삼국지에서 조조를 모시고 천하를 통일하여 위나라를 세우는데 크게 일조한 인물, 삼국지 최고 두뇌인 제갈량과도 비견될 인물이 사마의다. 물론 아직 한참 어린나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그럼 이 꼬맹이가....?!”
“뭐? 여포의 세작을 잡아? 하여간 일 처리하는 꼬라지 하고는.... 쯧쯧쯧.”
방열은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들지 못했다. 기껏 공을 세운다고 생각했는데, 말 그대로 삽질만 한 꼴이다.
“사마의라고 했느냐? 미안하게 됐구나. 내 수하 장수가 멍청한 짓거리를 한 바람에 어린 네가 고생을 했구나.”
그런데 사마의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구로케 하면 아조씨들 다 주거요....”
“응?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느냐?”
이에 사마의 통역 전문(?)인 변희가 바로 해석을 해주었다.
“아! 사마의가 한 얘기는 우리가 지금 파는 함정을 보고 얘기하는 겁니다. 함정을 이대로 파면 우리가 다 죽는다나 뭐라나.... 하하하.... 어린아이가 제법 당돌한 면이 있습니다.”
사마의의 정체를 알았으니 이제는 화를 내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웃는 변희다. 왕광이나 방열, 심지어는 아비인 사마방 역시 그저 웃으며 사마의의 말을 넘기고 있었다.
“벌써부터 저런데 관심을 가지다니, 정말 크게 될 아이 같습니다.”
“허허! 제 아들의 어리광을 귀엽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릴 때부터 참 저런 것에 유독 관심이 많은 아이였지요.”
그런데 사마의의 말을 유일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었다.
만총은 찜찜한 기분을 도저히 감출 수 없었다. 사마가의 아이가 총명하다는 소문은 만총도 익히 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찜찜한 기분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실제로 전쟁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어린아이 아닌가.
하지만 만총은 자신이 이 작전을 짜면서도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하나 중요한 걸 놓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마의의 말을 듣고 보니 찝찝한 느낌이 더 거세지고 있었다.
‘함정이 문제라.... 흠! 내가 저런 어린아이의 말에 흔들리고 있는 건가? 아니다. 단순히 그런 게 아니라 정말 함정에 문제가 있을 수도....’
결국 만총은 어린아이에게 작전에 대해 물어보는 다소 부끄러운 짓을 하고야 말았다. 그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짓이었지만,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의야. 네가 보기에는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죽을 것 같으냐? 네가 본 함정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이더냐?”
만총이 사마의를 붙잡고 물어보는 모습을 보며 왕광 등은 황당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이의민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그를 무시할 수는 없기에 잠자코 보고만 있다.
만총이 구체적으로 질문을 하니 그제야 사마의도 좀 더 구체적인 답을 했다. 이번에는 이전처럼 그냥 웅얼거리는 게 아니라 제법 발음도 또박또박했다.
“적을 빠트리려다가 보사 아저씨들이 다 빠져 죽을 거예요.”
순간 머릿속에서 빛이 번쩍한 만총은 바로 함정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웬걸, 척 보기에 문제가 될 만 한 게 보이지 않았다.
‘기우였나...? 역시 괜히 어린아이의 말을 듣고 휘둘린 건가?’
만총은 괜한 걱정을 했다며 다시 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그의 머리가 다시 번쩍하며 경고음을 보냈다.
만총은 황급히 성루로 올라가서 높은 곳에서 함정을 내려다보았다.
성루 위에서 함정 쪽을 내려다보니 군사들 일부가 포신의 지휘 하에 여포를 유인하여 함정에 빠트리는 움직임을 훈련 중이었다. 만총 자신이 직접 짠 방진을 형성하며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수비군으로 훈련하는 이들은 정확히 함정을 피해 여포군 역할을 맡은 군사들을 유인했다. 함정이 길목 중간 중간 존재했지만 수비군이 함정에 빠질 위험은 없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눈에 빤히 보이는 구덩이에 빠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물론 여포군이 실제로 와서 전투를 치른다면 저 구덩이들을 전부 짚과 흙으로 덮을 거다. 그래도 군사들은 철저한 훈련으로 함정의 위치를 숙지하게 만들 생각이었고, 만총의 생각대로라면 수비군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여포군만 함정에 빠질 터였다.
그런데 만총은 자신의 계획에 한가지 큰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납기로 유명한 여포다. 주군께서 가장 어렵다고... 아! 어렵다고 하신 적은 없으셨지.... 재미있다고 하신 상대였다. 즉, 주군께서 상대한 자중 가장 강하단 말이다. 그런 자를 상대로 질서정연하게 훈련한 대로 후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 생각이 너무 오만한 생각이었다.’
실제로 여포의 모습에 공포에 빠진 군사들이 어찌 행동할 지는 생각 못하고 그저 훈련대로만 움직인다고 가정한 만총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짠 방진은 시선의 분산을 위해 간격이 매우 크다. 촘촘하게 일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넓게 분산되어 움직이지. 그렇다면 그들이 정신없이 도망칠 경우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
크게 깨달은 만총은 즉시 왕광에게 갔다.
“태수님. 함정을 다시 파야 합니다.”
“예? 지금까지 잘 해놓고 왜 그러시오? 설마 저 아이의 말을 듣고 그러는 것이오?”
“의의 말이 맞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가 역으로 우리가 판 함정에 당할 공산이 큽니다.”
“허어! 아무리 그래도 저런 아이의 말을....”
왕광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만총의 태도가 완고했다. 결국 포신까지 불러서 군데군데 무수히 파놓은 함정을 부랴부랴 다시 메웠다.
그야말로 삽질이 이어지고 푸념이 이어졌다. 고작 어린아이의 말에 휘둘리는 만총의 행동이 어이없기도 했다.
투덜대면서도 함정을 새로 만드는 그들. 이전에 팠던 작고 많은 구덩이를 다시 다 메우고 거대한 구덩이 하나를 팠다.
그러면서 만총은 사마의를 주시했다.
‘설마 저 아이가 그걸 보고 그리 말을 한 것인가....? 설마.... 아무리 그래도 아직 어린 아이가 아닌가....?’
만총은 애써 그럴 리 없다고 부정을 해보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사마의를 보며 식은땀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