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1)
낙양의 황궁 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던 하태후. 황제나 하진 등 한나라 최고 권력자들 앞에서도 언제나 표독스러운 모습으로 세상 무서울 것 없이 행동하던 그녀가 마치 복날 개처럼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관해의 희번득한 눈빛을 보니 수틀리면 정말 죽여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덕분에 하태후가 여태껏 상대를 가리지 않고 보였던 표독스러운 태도는 오간데 없었다.
“제, 제발 놓아다오. 이대로 날 놔준다면 천만금.... 아니. 억만금을 주겠다.”
처음으로 상대에게 사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하태후였지만, 그런 그녀를 끌고 가는 관해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좀 조용히 하고 따라오시오. 태후마마. 아니지. 죄인 하씨. 그러고 보니 이제 태후도 아닌데, 몸 성히 끌고 갈 필요는 없잖아? 괜히 귀찮은 짓거리를 했군.”
관해는 이제 아예 하태후의 머리채를 잡아버렸다.
“아아악!!”
그리고는 다시 감옥으로 질질 끌고 가고 있다.
정말 이곳이 황제가 있는 황궁이 맞는지, 아니면 대낮 저잣거리인지 의심이 가는 광경이었다. 그런 하태후를 보는 황제는 온몸을 떨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관해를 불렀다.
“그, 그만해다오. 아, 아니. 그만하시오. 장군. 어찌 어머니를 그리 끌고 가신다는 말이오. 흑흑! 제발 멈추시오.”
황제가 말리는 소리에도 관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군인 이의민의 포부를 듣기 전에는 그래도 황제의 명은 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관해의 눈에는 황제 역시 주군의 앞길에 놓인 마지막 장애물일 뿐이다.
결국 관해는 황제의 얘기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하태후의 머리채를 잡은 채 질질 끌고 나가버렸다.
“크흐흐흑!! 어, 어머니! 크흐흑!”
하태후가 끌려 나간 후 황제는 실성한 사람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한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그가 자신의 어미를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보던 중상시 하나가 이의민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대사농. 폐하께서 많이 놀라셨으니 조회는 다음에 하는 것이....?”
중상시에 제안에 이의민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뜻일까?
대신 정욱이 대노를 하며 중상시를 꾸짖었다.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요? 폐하께서 저러시면 빨리 달래 드리고 조회를 준비할 생각을 해야지!”
한동안 하진 곁에 있었지만 정식으로 조정 내에서 관직을 받은 적은 없는 정욱이다. 즉, 현재 정욱은 아무런 관직도 없이 이 어전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 자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런 자가 중상시 정도 되는 인물에게 호통을 친다는 건 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제지하는 사람도 없다.
모두 입을 다물고 이의민과 정욱의 눈치를 볼 뿐이다.
이의민은 너무 황제를 극한의 상황에 몰아붙였다고 생각을 했는지, 점잖은 태도로 위로했다.
“폐하. 갑작스런 소란에 얼마나 놀라셨사옵니까? 이게 다 저희 신들이 부족한 탓이옵니다. 이제 신이 다시는 폐하의 성심을 어지럽히는 이런 일들이 없도록 조치를 하겠습니다.”
“크흑! 대사농. 나는 두렵소.”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모든 것이 다 말이오....”
“신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시옵소서. 성심이 어지러우시겠지만 오늘 중요하게 논의할 일이 있으니 꼭 계셔야합니다. 그것이 한나라 황제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번 조회를 통해 역적이 쓸고 간 이 곳 제도를 정상화시키는 일을 하셔야 합니다.”
더 이상 황제는 거부를 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정중한 태도로 권유를 하는 듯한 이의민이지만, 그 말속에는 절대 거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 알겠소. 그럼 무엇부터 하면 되는 것이오?”
“가장 첫 번째 안건은 역시 역적의 수괴, 하진의 처벌이옵니다.”
이의민의 단호한 얘기에 황제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외숙을....? 이보시오. 대사농. 내 사정하겠소. 제발 어머니와 외숙을 살려주시오.”
이의민에게 애원하는 황제. 그러나 이의민의 태도는 여전히 단호했다.
“폐하. 어쩔 수 없습니다. 혈족을 위하는 폐하의 성심은 알겠으나 이는 이 나라와 황실, 그리고 폐하를 위한 일입니다.”
“그럼 나머지 대신들은...?! 사도를 포함한 그 모두를 다 죽일 셈이오?!”
무슨 용기일까. 황제는 실성한 듯 울부짖었다.
그건 자신의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두려움이었다. 황제로서 그 커다란 두려움이 나머지 두려움을 잠시 잊게 만들고 있었다.
황제의 외침에 이의민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방금 외침을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아니옵니다. 사도 왕윤과 우장군 주준, 광록훈 사손서에 대한 조사도 이미 끝났습니다. 조사결과 그들은 하진에게 속아 그리 행동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오래 동안 이 나라를 지탱해온 기둥들인 그들은 전부 석방하셔도 될 것입니다.”
왕윤이나 주준 등은 석방해준다는 얘기는 황제에게 불행 중 다행인 얘기였다.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으로 이의민에게 되묻는 황제.
“그, 그것이 사실이오? 정말 그들은 죽이지 않는 거요?”
“죄가 없다고 밝혀진 이들을 신이 무슨 권리로 죽이겠습니까? 그리고 이들을 석방함과 동시에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삼사에 봉하시는 것이 좋을 듯 사료됩니다.”
드디어 황제의 만면에 미소가 돌아왔다. 사실 그도 하진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이의민이 자신의 사람을 모두 죽일 거라고 생각하여 크게 두려웠다.
그런데 이의민이 언제나 자신의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왕윤, 주준, 사손서 세 사람을 살려주겠다고 하니 황제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다행일 수가 없다. 게다가 살려주면서 관직을 박탈하거나 지방으로 내쫓는 것도 아니고, 현재 직위보다 더 높은 자리를 준다고 했다. 삼사라면 삼공보다 위에 있는 최고위직이 아닌가.
하지만 소제는 어처구니없게도 삼사라는 관직이 무얼 의미하는지 생각지 못했다. 삼사는 태사, 태부, 태보로 이뤄졌으며 품계는 무려 삼공보다도 높았다. 하지만 실권은 거의 없다시피 한 명예직이었다. 마치 현재 황제와도 비슷했다. 명목상의 위치만 높을 뿐, 아무런 힘이 없는 자리다.
즉, 이의민이 제안한 것은 세 사람이 원래 조정에서 가지고 있던 힘을 다 뺏고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의도였지만, 황제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기뻐했다.
사실 이의민 입장에서는 세 사람을 그냥 하진과 같이 죽여 버리는 게 편했다. 현 한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이들이니 새 나라를 세우려는 이의민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이다. 실제로 이의민은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순유가 반대했다.
“주군. 그 세 사람은 현재 백성들에게도 널리 존경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그냥 죽여 버린다면 주군의 잔혹함에 대해 성토하는 말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럼 어찌 해야 되는가? 그냥 변방으로 쫓아버릴까?”
“그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오히려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척하며 손발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유는 세 사람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는 것이 아닌 삼사로 만드는 계략을 생각해냈다. 그러면 백성들의 반발심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이의민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될 여지가 크니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라 할 수 있다.
역시 황제는 이의민이 내민 미끼를 덥석 물었다.
“윤허하겠습니다. 대사농. 어서 그리 하세요!”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윤, 주준, 사손서에 대한 처분을 마무리한 후 이의민은 더 이상 안건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다음 안건은 바로 역적 무리를 처단한 이의민에 대한 논공행상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 입으로 어떤 상을 줘야 한다는 얘기를 하기는 조금 낯부끄럽지 않은가.
대신 어전을 장악한 이의민의 수하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폐하! 이번 하진의 난을 제압한 대사농 이의민에게 상을 내리시어 폐하의 위엄을 떨치소서!”
감히 거부할 힘은 없는 황제.
“그, 그래야겠지요? 어떤 관직이 좋겠습니까? 대사농? 대장군이 공석이 됐으니 하시겠소?”
“.....”
하지만 이의민은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다.
“마, 마음에 아니 드시오? 그, 그럼 사도가 공석이니 그걸로....?”
“.....”
역시 대답 없는 이의민.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정욱이 나섰다.
“폐하. 대사농이 없었다면 지금쯤 황실은 하씨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옵니다. 게다가 병주와 청주의 도적들 역시 대사농이 아니었으면 소탕을 하지 못하고 나라가 안팎으로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대사농이 세운 공은 가히 태산만큼 크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공에 마땅한 최고의 관직을 내리시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사도면 최고인 삼공인데.... 그렇다고 삼사는 이미 대사농이 천거를 한 자리가 아니오? 뭘 더 어찌 하라는 말이오?”
“사도는 왕윤이 있던 자리가 아니옵니까? 그가 조정에서 크고 작은 여러 공이 있는 대신이긴 하나 어찌 대사농의 공과 비하겠사옵니까? 대사농에게 그보다 더 높은 승상의 지위를 내림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승상....?”
현 조정에서는 승상을 따로 두고 있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삼공을 뛰어넘는 조정 최고의 관직이었다. 그걸 부활시켜 이의민에게 내려야 한다고 하니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기는 황제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거부하고 싶다고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황제는 떨리는 음성으로 이의민을 승상에 임명했다.
“알겠소. 그럼 대사농 이의민을 승상으로 임명하도록 하겠소.”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하는 이의민.
“황공하옵니다. 폐하. 폐하께서 나머지 공신들은 하나하나 임명하시기 에는 일이 너무 많으니 신들이 알아서 공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고 보고를 올리겠사옵니다.”
한마디로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이다.
“그, 그리 하시오.”
**
아직 이의민이 낙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퍼지기 직전, 하내 근처에서 군사 무리가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다.
“어이! 거기 다했는가?”
“아! 방 장군님. 좀 쉬엄쉬엄합시다. 지금 이게 며칠째요?”
“변희. 왕 태수가 대사농 밑으로 들어간 다음 분위기가 많이 바뀐 거 모르나?”
그들은 바로 하내 태수 왕광의 군사들이었다. 왕광의 수하 장수인 방열과 변희는 군사들을 이끌고 구덩이를 파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미 군데군데 수많은 구덩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도 모자란다는 듯 계속 삽질을 했다. 이들은 뜬금없이 왜 삽질을 하는 걸까?
삽질로 끝난 것이 아니다. 구덩이를 판 다음 그 밑에는 뾰족한 창을 세워두었다. 구덩이에 떨어지자마자 그 창에 찔려 죽도록 설계한 함정 같았다.
왜 이런 함정을 만든 걸까? 바로 병주에서 곧 내려올 여포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의민은 자신이 상대하겠다며 왕광과 만총에게 가급적이면 내려오라고 지시했지만, 왕광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여포를 완전히 죽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병력이라도 줄여놓자는 생각을 했다. 그의 터전인 하내를 이대로 넘기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왕광의 부탁을 받은 만총도 여포를 상대하기 위한 한가지 꾀를 냈다. 그것이 바로 여포가 가는 길목에 만드는 이 함정이었다.
“으휴! 아무튼 무시무시한 구덩이요. 제 아무리 여포 그놈이라 해도 여기 걸리면 그냥 콱 죽을 수밖에 없겠지.”
“흐흐! 내가 봐도 그러네. 참으로 우리가 작업 하나는 잘 하는 것 같군.”
“대사농 곁에 곽 뭐시기 인가? 작업을 잘한다고 명성이 자자하던데 우리한테는 아니 될 거요.”
방열과 변희는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보며 자화자찬을 하고 있다. 그때 어디선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음도 명확치 않는 어린아이가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고 구로케 하는고 아닌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