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82화 (82/175)

82. 이의민의 결심 (2)

이의민과 순유가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수하들은 신이 났다. 특히 곽봉이 가장 신이 나 보였다.

그 어떤 인물과도 금세 친해지는 무지막지한 친화력으로 무장한 곽봉은 유엽과 황충에게도 그 마수(?)를 뻗었다.

“크하하하! 자네. 유엽이라고 했나? 내 술 한 잔 받으라고. 환원관에서 기가 막힌 물건을 발명해서 유표를 박살냈다면서? 나 순 군사나 곽또라이 같은 천재는 많이 봤지만 자네 같은 인물은 또 처음 보는 것 같네.”

“하하하. 사실 소인의 발명품은 미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 그걸 완성시켜 주신 겁니다.”

“어쨌든 자네가 시작을 해줬으니 거둔 성과 아니겠나? 하하! 그리고 어디 보자.... 형...장은....?”

“허허! 주군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소장은 황충이라 합니다.”

“커흠...! 거! 나이도 잡수실 만큼 잡수신 분이 제 앞에서 소장이라니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전 곽봉이라고 합니다.”

넉살 좋게 인사로 시작해서 술 몇 잔에 어느덧 유엽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된 곽봉이었다. 그런데 황충을 상대로는 쉽게 형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아무래도 모두의 형님이라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 것 같다.

이의민은 순유와의 대화를 마치고 그런 수하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슬쩍 잔을 들었다.

이의민이 잔을 들자 모두 주목하며 같이 잔을 들었다. 이의민은 그 모습을 보고 순유와 나눴던 얘기를 이들과도 빨리 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다들 고생이 많았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자네들 덕분이야.”

“아닙니다. 주군이야 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계속 승승장구 하실 것입니다.”

이의민의 인사에 곽봉이 수하들 대표로 대답했다. 둘만 있을 때는 아직도 스스럼없이 친동생 대하듯 이의민을 대하는 곽봉이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이제 철저하게 주군으로 대했다.

“승승장구라.... 말 잘하셨소. 곽형. 그래. 내가 어디까지 승승장구 할 거 같소?”

별 생각 없이 대답했던 곽봉이었다. 하지만 무겁게 분위기를 잡는 이의민덕에 연회장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다.

갑자기 이의민이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한 이도 있었고,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은 이도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이의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권좌의 끝을 보고자 하오.”

이의민이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이제 알아듣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다. 지금 수하들이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한가지였다. 이의민이 하는 얘기는 그 누구도 감히 거론하기 힘든 주제기 때문이다.

“공달이 그러더군. 그 누가 됐든 본심을 숨기라고. 여기 있는 사람 중 내가 본심을 드러낸다면 반발심을 가질 이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여기 있는 그대들은 모두 내게 목숨을 맡긴 사람들이고, 난 그대들을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그대들을 속이라고? 난 절대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지금 솔직히 내 속마음을 다 밝히겠다.”

거침없이 당당하게 얘기하는 이의민이었지만, 살짝 쓰린 속마음이 느껴졌다. 순유야 예상과는 다르게 자신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즉, 지금 여기서 정들었던 수하들과 바로 이별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만약 내 결정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지금 말하라. 내 이름을 걸고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 낙양에서의 관직은 줄 수 없겠지만, 적당한 지방 관직과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는 재물도 함께 내릴 것이다. 그러니 지금 말하라.”

이의민의 얘기에도 누구하나 입을 여는 이 없이 연회장은 여전히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의민이 밝힌 뜻에 불만을 가지고 낙향하겠다고 하는 이도 없지만, 반대로 이의민의 뜻을 따르겠다고 선뜻 나서는 이도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아직 수하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결정을 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 됐다.

이의민은 많은 수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의 이탈을 각오한 채 무거운 표정으로 수하들을 바라봤다. 분명 반발하는 이가 있지만 아직 분위기 때문에 나서지는 못한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고요를 깨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는 인물이 있었으니.

쾅!

바로 곽봉이다.

“여기 계신 분들! 나 곽봉이 한마디 하겠소. 나는 우리 아우님. 아니. 우리 주군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오. 다들 알다시피 난 낙양의 이름 없는 보사요. 여러분들과 달리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자요. 그런 내 인생이 우리 주군을 만나면서 바뀌었소. 내가 이런 말 하면 필시 ‘저 새끼 저거 지 팔자 바뀐 거 때문에 남들까지 선동한다.’ 이리 생각할 것이오. 거기 관해! 딱 그 생각하고 있었지?”

곽봉의 연설 중간에 섞인 가벼운 농담에 수하들은 조그맣게 킥킥 거렸다. 그러면서 수하들 사이에서 도는 긴장감과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렇소! 주군을 따르고서 맞이한 나의 광영 때문에 주군의 뜻을 지지하는 것도 있소.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오. 나는 보았소. 태행산에서! 청주에서! 서주에서! 연주에서! 주군이 백성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아시오? 태행산의 악명 높은 도적들은 착실히 농사를 짓고 있고, 청주의 황건들은 모두 충실한 병사가 되거나 민초의 삶으로 돌아갔소. 전쟁으로 고통 받던 서주와 연주의 백성들은 이제 평화를 되찾았소. 그리고 우리 군사들은 어떻소? 이전까지 관군은 말이 관군이었지, 제대로 된 배급도 받지 못하고 빌어먹는 신세였소. 그런데 주군의 군사가 된 이들은 전부 잘 먹고 잘 살고 있소. 이 모든 것이 주군께서 바꾸신 것이오. 주군은 미축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자금을 지원 받았음에도 사치와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말단 군사들이나 민초들의 배를 불렸소. 밑바닥에서 살아온 나이기에 나는 이런 밑바닥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먼저 알 수 있소. 그들은 진심으로 행복해 했소.”

‘끄응.... 여기서는 그냥 모른 척 하고 있어야겠군.’

사실 이의민이 정말 백성들이나 말단 군사들을 생각해서 그리 했던 건 아니다. 단지 이번 생에서는 군사들의 중요성을 더 크게 깨달았고, 순유나 곽가와 같은 책사들의 조언을 더 잘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야 두 번째 생에서는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전부 이의민 자신을 위해 한 것이었는데 어쩌다보니 곽봉의 말처럼 만백성을 위한 행위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곽봉의 얘기에 결과론적으로는 거짓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의민의 속마음과는 달리 수하들은 전부 그가 만백성을 위해 행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

“방금 주군의 말을 듣고 상상해 보았소. 만약 주군께서 황상에 앉는다. 그럼 전국 13주 모든 백성들을 이리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말이오!”

곽봉의 말이 끝나게 다른 누군가가 무섭게 탁자를 쿵 내려쳤다.

“옳소! 나 우금 역시 곽봉 장군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요. 이제야 감겼던 눈이 뜨이는 거 같소. 주군의 출세는 곧 우리들의 출세요. 주군을 따른다면 곽 장군이 말한 세상을 우리 손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하는 것이오. 이 얼마나 기쁜 일이오.”

“맞소이다! 다들 생각해보시오! 여기까지 왔는데 주군께서 황제에게 모든 힘을 다시 돌려준다고 하신다면 힘이 빠지는 건 오히려 우리들일 것이오!”

너도나도 이의민의 뜻을 따르겠다고 소리쳤다. 심지어 유씨인 유엽조차 말이다.

“하하! 같은 유씨라고 배려 안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소인는 먼 방계이므로 사실상 황족이라 말하기도 힘듭니다. 그러니 소인은 기꺼이 새로운 제국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이의민은 놀라기도 하고 좀 얼떨떨하기도 한 표정으로 수하들을 바라봤다. 솔직히 적어도 한두 명은 무조건 나갈 줄 알았는데 아무도 나가는 사람 없이 뜻을 같이 하겠다고만 외치고 있다.

그래도 좀 더 확실하게 하고 싶은 이의민.

“다들 조용! 이래서는 불만 있는 자도 나설 수가 없잖은가. 자자! 정말 괜찮으니까 마음에 안 들면 지금 얼른 말해.”

그래도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제야 이의민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모두....”

**

낙양의 아침이 밝았다. 이의민과 수하들은 새벽까지 연회를 즐겼지만, 아침이 되자마자 어제 뭐라도 했냐는 듯 모두 칼같이 일어나 각자 맡은 일을 했다.

물론 이의민이나 정욱, 종요 등을 제외하면 이곳 낙양에서 맡은 직책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이 잡혀 들어갔기 때문에 이의민의 수하들이 그 업무들을 대신하고 있었다.

“폐하! 조회를 시작할 시간입니다. 이제 어전으로 가셔야 하옵니다.”

황제가 항상 참석하는 조회. 하지만 황제는 어쩐 일인지 조회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다.

“황상께서 옥체가 편치 않으시다. 오늘 조회는 취소를 하겠다.”

웃기게도 황제가 직접 거부 의사를 밝히는 것도 아니고 하태후가 거부했다. 황제는 무엇이 두려운지 어미인 하태후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아직 약관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몸은 다 컸는데, 지나치게 어미에게 의존하는 모습이 참으로 꼴사납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그런데 하태후가 분명 조회 참석 거부를 했는데도 황제를 데리러 온 신하는 뜻을 꺾지 않았다.

“아니 되옵니다. 폐하. 오늘은 중요한 조회이니만큼 꼭 참석하셔야 하옵니다. 옥체가 편찮으시다면 어의를 대동할 것이니 이만 나와 주시옵소서.”

말투는 정중했으나 사실상 황제를 강제로 끌고 가기라도 하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분노한 하태후가 침소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익! 감히 폐하께서 아니 가시겠다는데....!”

그런데 밖으로 나온 하태후는 동공이 크게 흔들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제 하태후를 실금하게 만들었던 이의민과 그 수하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의민은 대부를 찬 채로 황제 침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군사들 몇몇과 함께 황제를 모시고, 아니. 사실상 끌고 나오다시피 해서 어전으로 데리고 갔다. 황제가 울면서 하태후를 불러봤자 소용없었다.

하태후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눈이 뒤집어졌다. 그리고는 어제의 공포를 잠깐 잊은 듯 어전까지 따라와서 이의민을 향해 소리쳤다.

“이보시오! 대사농! 어찌 이리 방자하단 말인가?! 폐하께서 입실하란 윤허도 내리지 않았는데!”

이의민은 물끄러미 하태후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상하군. 공달. 어째서 어전에 아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뭣이라? 이놈!! 나는 이 나라의 태후니라!”

“태후가 조회에 참석할 권한이 있는가?”

기다렸다는 듯 순유가 대답했다.

“태후마마께 그런 권한은 없습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어째서 저 여자가 아직 태후인가?”

“뭐, 뭣이...?! 저 여자...?! 이 죽일 놈! 나는 황상의 어미로서....!”

이의민은 하태후의 말을 끊고 무서운 기세로 호통을 쳤다.

“저 여자는 대역죄인 하진의 누이이다! 그런 자가 아직도 태후 자리를 꿰차고 있단 말인가?! 당치도 않은 일이다. 역적의 누이가 이 나라의 태후라니.... 여봐라! 당장 저년을 이 자리에서 끌어내라!”

이의민의 서슬 퍼런 명에 내관들은 몸을 벌벌 떨며 움직이지 못했다. 하태후 역시 이제야 어제의 기억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어제처럼 다시 실금하면서 입을 열지 못했다. 이의민은 그런 하태후와 내관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아니 되겠군. 아니 되겠어. 관해! 당장 저년을 끌어내 옥에 가두라. 다들 명심하라! 오늘부로 하태후의 직위를 박탈한다. 지금부터 그녀를 대역죄인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하태후는 그렇게 지린내를 풍기며 감옥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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