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81화 (81/175)

81. 이의민의 결심 (1)

낙양의 황궁에서 또 다시 연회가 벌어졌다. 바로 전날 대장군 하진이 이의민에게 승리한 기념으로 연회를 열었는데, 우습게도 오늘은 이의민이 승전 기념 연회를 열고 있다.

전날과 같이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였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이전 연회는 말단 군사들은 전부 근무를 서는 등 구경만 하고 고위직 신하들만 참석하는 자리였다면, 오늘의 연회는 직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는 낙양 백성들에게도 개방을 하여 술과 고기를 나눠주었다. 이쯤 되면 단순한 연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축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의민이 아무리 술을 좋아하고 많이 먹는다고 해도 당연히 휘하 12만 군사들 한명 한명과 건배를 할 수는 없다. 그래도 군사들의 부대를 한번 씩은 다 돌아보고, 그 부대의 지휘관과는 한번 이상 건배를 하면서 같이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무려 12만이다. 휘하 부대 역시 세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아무리 부대 지휘관 하고만 마신다고 하더라도 엄청 마실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의민은 그리 마셨는데도 제법 멀쩡해보였다. 그의 신력 이상으로 술도 센 이의민이다.

그렇게 부대를 하나씩 다 순회한 이의민이 자리에 돌아왔다. 이의민의 최측근 수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슬슬 어지러울 법도 하건만 다시 거침없이 술잔을 드는 이의민. 그런데 순유가 갑자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표정으로 이의민에게 물었다.

“주군. 한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좋은 분위기를 망치는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허나 더 늦출 수는 없다고 여겨 여쭙겠습니다.”

이의민도 심각함을 느끼고 표정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래. 물어보게. 무엇이 궁금한가?”

“주군께서는 낙양과 황제 폐하의 신병을 손에 넣으셨습니다. 앞으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순유가 묻고자 하는 것은 연합군이니 뭐니, 대응책이니 뭐니, 그런 게 아닐 것이다. 단순히 황제를 등에 업은 신하로 남을 건지, 아니면 그 이상 갈 것인지 묻는 거라고 느낀 이의민이었다.

그는 순유의 질문 이후 그답지 않게 한참 침묵을 지켰다. 문득 고려시절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 때와 지금이 징그러울 정도로 똑같구나. 하늘은 내게 왜 이런 상황을 또 주셨는가....?’

이의민의 생각대로 그가 고려시절 막 권세를 쥐었을 때와 지금과 상황이 제법 비슷했다. 그때도 허수아비 왕을 손아귀에 넣고 가장 큰 군세를 보유하게 됐다. 물론 고려시절에는 나라 안에 자신들을 견제할 세력은 딱히 남아있지 않았고, 지금은 위협이 될 만큼 큰 세력을 가진 적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차이는 있었다.

그래도 그때처럼 이의민의 세력이 가장 크고 강대한 세력인 것은 같았다. 다른 모든 제후들을 뛰어넘고, 심지어는 황제마저 뛰어넘는 권세를 차지한 이의민이다.

그런데 고려시절에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왕보다 더 큰 권력을 쥐었음에도 명목상으로는 엄연히 왕보다는 낮은 위치였다. 이의민은 그게 못마땅했다.

실질적인 힘은 왕을 뛰어넘는 만인지상인데, 왜 눈치를 보며 왕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허리를 숙여야 한단 말인가. 결국 이의민은 더 욕심을 내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천출이라는 신분에서 오는 열등감은 그를 끝없는 권좌에 대한 탐욕의 길로 이끌었고, 끝내 옥좌로까지 까지 눈을 돌리게 한 것이다.

고려시절에서는 그 욕심의 대가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당시에는 최충헌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삼국지 시대에 떨어진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러모로 쉽지는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충헌, 그놈이 말했지...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넘봤다고.... 정말 그런 것이냐? 최충헌. 나 같은 놈은 영영 꿈도 꿔서는 아니 되는 자리가 옥좌란 말이더냐? 황제가 아무리 머저리라도, 마음속으로라도 욕심내면 아니 되는 자리란 말이더냐?’

이의민은 고려시절에 마지막 한 단계를 남기고 죽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세계에서 다시 같은 몸으로 태어났다. 그리고는 마치 이것이 이의민의 운명이라도 되듯 하늘은 이번에도 같은 상황을 주고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이 날 환생시킨 뜻이 무엇인가? 전생의 삶을 교훈삼아 욕심 없이 살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번에는 한 번 제대로 해보라는 기회를 주기 위함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결론을 내리기 힘들었다. 고민을 하던 이의민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꿈뻑꿈뻑 거리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순유와 한창 바쁜 수하들이 들어왔다. 그들을 보자 마음속에 품어왔던 야망이 들끓었다.

전생의 고려시절에서는 이의민의 곁에 없었던 인물들이다. 고려시절에는 이의민의 곁에 싸움과 병법 밖에 모르는 무부들만 즐비했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삼국지에서 이름을 날리고 고려시절까지 그 이름이 오르내린 쟁쟁한 영웅들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 하늘이 진정 나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면 이 상황까지 만들어 줄 이유가 없다. 저런 듬직한 놈들까지 내려주신 것은 어디 다시 한 번 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설령 하늘의 뜻이 아니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나 이의민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설사 하늘이라 하더라도 베면 그만인 것이다.’

이의민은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의 방식대로 말이다.

장고 끝에 결론을 내린 이의민. 그런데 속으로는 명쾌한 결론을 내렸을지언정 순유에게 답을 해주는 건 다른 얘기였다. 아무리 수하들이라지만 자신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건 단순히 한 지역의 제후가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의민은 망설임 없이 순유에게 얘기했다.

“공달. 자네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나?”

수하들이 모두 떠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언제까지 자신의 포부를 숨기고 연기를 할 수는 없다. 그건 이의민의 방식이 아니었다.

“물론입니다....”

순유의 대답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각오는 했지만 속이 쓰렸다. 순유는 곽봉과 함께 그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인물이 아닌가. 순유가 역성을 거부한다고 해서 결심을 바꾸진 않을 것이지만 많이 슬플 터였다. 무척이나 많이.

“자네니까 솔직히 말하지.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는가? 옥좌에 앉는 생각을 했어.”

“알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주군을 떠나겠다는 말을 예상한 이의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유를 다시 봤다. 엄청난 얘기를 꺼냈는데 순유는 너무나 담담하게 대답했다.

“설마... 알고 있었나?”

“곽 장군을 제외하면 주군과 가장 오래있었던 사람이 접니다. 설마 모르겠습니까? 저뿐 아니라 봉효 역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순유의 말에 이의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흠... 그런데 황실을 계속 지켜야 한다면서 어찌하여 날 계속 도왔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언제 황실을 계속 지켜야 한다고 주군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이쯤 되니 이의민은 순유가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방금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나?”

순유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따로 있지 그럼 아무나 황제가 되겠습니까? 설마 주군께서 스스로를 ‘아무나’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공달! 자네?!”

그제야 순유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된 이의민. 순유는 담담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놨다.

“저 역시 한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배운 충의 개념과는 완전히 위배되는 행위니까요. 하지만 따지고 들면 우리는 모두 역도의 자손입니다. 이 세상이 처음부터 유(劉)씨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공달. 자네는 정말 내가 지존의 자리에 올라가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 보사 출신의 이의민이 말이야.”

이의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순유에게 되물었다. 스스로 황좌를 노렸지만, 그건 보잘것없는 출신이라는 열등감 때문에 더 그런 것도 있었다. 그런데 순유도 자신이 지존이 될 만한 인물이라 얘기하니 가슴이 더 뜨거워졌다.

“사상최악의 역적이라 불리는 왕망, 그가 왜 역적으로 불리는지 아십니까? 광무제께서 그가 세운 신나라를 멸하고 새로이 후한을 건국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광무제께서 후한을 세우지 아니 하셨더라면 우리 모두 지금쯤 유(劉)씨가 아닌 왕(王)씨를 섬기고 있었겠지요. 역적과 충신이 한끗 차이라니 재밌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신분 역시 그 사람이 최종적으로 어떤 위치에 오를 것인지 정하는 기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 황상께서 정말로 백성을 살피고 보호해주실 분이라면 생각이 달랐겠지만, 지난 세대동안 황실이 보여준 태도는 한숨만 나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는 황실보다 훨씬 백성들을 더 많이 살리셨고, 이롭게 하셨습니다.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인 백성에게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생각을 해본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같은 순씨지만 순욱이었다면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순욱보다는 유연하게 생각할 줄 아는 순유는 다행스럽게도 역성에 대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순욱 대신 순유를 얻은 것도 이의민에게는 운이자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군. 공달. 그럼 이제 어찌해야 되겠는가? 이대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칭제를 하면 되나?”

역시 이의민은 결론을 한번 내리면 거침이 없어도 너무 없다. 너무 급작스러운 얘기에 순유는 한번 휘청거리더니 이마에 땀을 닦고, 이의민을 살짝 진정시켰다.

“아... 하하... 주군. 그렇다고 일을 너무 급하게 처리하면 아니 될 일입니다. 주군을 노리는 적은 아직도 전국 각지에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역성에 대한 백성들의 반발 역시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진행하여 누구나 새로운 나라를 원할 때, 그때 비로소 새 나라를 세우시고 칭제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새 나라를 세우기 직전까지 황제 폐하께서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셔야 합니다.”

이의민은 순유의 말을 충분히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고려시절에는 너무 급했던 감이 있었다. 그리고 바른 말을 하는 문신들은 모조리 잡아 죽였기에 순유와 같은 조언을 해주는 이도 없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시행착오를 격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의민은 순유와 같은 인재들의 조언을 절대 허투루 듣지 않을 생각이다.

“조정의 신하들은 어쩌면 좋겠나? 역시 죽여야 하겠나?”

“아닙니다. 그들 역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음.... 그들도? 그럼 죽이지 말고 다 복직시켜야 하나?”

“당연히 지금 그 자리에 그대로 복직시킬 순 없습니다. 마침 그들에게 적당한 자리가 있습니다. 아! 물론 그들 중에 연합의 우두머리는 그냥 둘 수 없지요. 이 전쟁의 원흉이자 역적의 수괴이니까요. 그 만큼은 필히 참해야 할 것입니다.”

순유가 얘기하는 인물은 당연히 대장군 하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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