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 낸다 (5)
가덕전 근처의 비상통로 앞에 있던 황제와 신하들, 그리고 그들을 따라온 소수의 군사들은 대경실색했다.
특히 하태후는 이 상황에서까지 주준을 탓하며 신경질을 부렸다.
“어찌 된 일인가? 우장군은 분명 우리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역도들을 막을 거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벌써 이곳에 오게 만들다니! 조정에 쓸 만한 인물이 이다지도 없단 말인가?!”
신하들의 모습도 가관이다.
“장군! 그대가 좀 이의민을 막아보시오.”
“여태껏 아무도 막지 못했는데 어찌 소장보고 막으라 하십니까?”
참으로 꼴불견이었지만, 이의민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습들이었다.
피가 묻은 대부를 들고 오는 이의민의 모습은 그야말로 야차가 따로 없다. 신하 한명이 애써 용기를 내어 이의민에게 호통을 쳤다. 아니. 호통이 아니라 발악에 가까운 모습이다.
“무, 무엄하오! 대사농....! 어, 어찌 황상께서 계신 자리에 그리 무기를 들고.... 크악!”
황군 병사 뒤에서 호통을 치는 건지 애원을 하는 건지 모를 말을 하던 신하는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했다.
“왜 이리 시끄러워? 어디서 개가 짖나?”
이의민은 귀찮다는 듯 귀를 후벼 파더니 품에서 순식간에 손도끼를 꺼내 던졌고, 정확히 떠들던 신하의 정수리에 꽂혔다.
“으아악!!”
혼비백산한 황제와 신하들. 특히 황제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하태후에게 안겼다.
“어, 어머니... 대체 이를 어찌해야 좋습니까? 이의민, 저자가 기어코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하태후는 끝까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황군과 신하들을 향해 외쳤다.
“막아라! 어떻게든 이 자가 황상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란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황군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제지 없이 황제 바로 앞까지 온 이의민은 대부를 땅에 내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다소 정중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신 대사농 이의민. 폐하를 뵈옵니다.”
분명 취하는 태도와 목소리는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이의민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의민은 그런 황제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폐하. 그동안 역적들에게 둘러 싸여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나이까? 이제는 안심하시옵소서. 신이 그간 폐하의 눈과 귀를 가리던 역적들을 전부 처단하겠사옵니다.”
“여, 역적이라니.... 대사농은 대체 누구를 역적이라 말씀하시는 게요?”
“당연히 대장군 하진과 그 일당들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폐하의 곁에 있는 저자들이 모두 역적이옵니다.”
이때 비상통로를 살피고 있던 왕윤과 하진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이의민에게 역정을 냈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역적이라고 하는가?! 네놈이 바로 역적이 아니더냐?!”
그래도 이의민이 두려워 아무도, 대장군인 하진조차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왕윤만은 기운 좋게 이의민에게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왕 사도. 이 상황까지 왔는데 했던 말 자꾸 또 하게 하지 맙시다. 뭣들 하느냐?! 저 역적들을 당장 포박하고 폐하를 뫼셔라!”
이의민이 명을 내리자 이의민군 장수들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곽봉을 시작으로 서황, 장료, 고순, 우금, 악진, 태사자, 관해 등등이다. 그들 모두 이의민만큼은 아니지만 하나 같이 범과 같은 기운과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자들이 한둘도 아니고 몇 명씩 다가오니 모두 두려워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다.
황제는 물론이고 하진, 왕윤 등의 인물들은 평소에는 이들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높은 위치에 앉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그들이 이의민의 사람들을 쳐다볼 수 없었다.
황제는 계속해서 울면서 애원했다.
“제, 제발 오지 마시오. 흑흑! 제발 우리를 놔주시오.”
그래도 황제까지 위협할 생각은 아니었던 장수들은 뻘쭘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그래도 이중에서 그나마 가장 부드러운(?) 편에 속하는 곽봉이 나섰다.
“소신 비장군 곽봉이라 하옵니다. 폐하. 소신이 폐하를 모실 테니 부디 안심하시옵소서.”
곽봉은 자신이 보사 시절 얼굴 한번 볼일 없을 것이라 여겼던 황제를 강제로 모시게 된 지금 상황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꼈다.
‘내가 이 손으로 황제를 직접 모시.... 아니지. 사실상 잡아끄는 것이지. 어쨌든 이런 날이 오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군.’
황제는 곽봉의 손길까지 거부하려 했지만, 더 이상 여기서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곽봉은 강제로 황제의 몸을 잡고 연행 아닌 연행을 했다.
그 모습에 신하들은 일제히 울부짖었다.
“폐하!! 흐흐흑!”
“폐하! 어찌 이런 일이....!”
대부분의 신하들은 그런 곽봉을 감히 저지할 생각을 못했다. 왕윤과 같은 소수의 충신들은 어떻게든 저지를 하려 했지만 이미 포박된 상태라 옴짝달싹 못하고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곽봉의 앞을 막는 한 인영이 있었으니.
짝!
하태후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가녀린 손으로 곽봉의 따귀를 후려쳤다.
“이...! 이 천한 놈이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느냐?! 그 더러운 손을 당장....! 꺄악!!”
불같이 화를 내던 하태후는 갑자기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쓰러졌다. 작은 손도끼 하나가 그녀의 코앞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손도끼는 정말 손가락 한끝차이로 하태후를 지나 벽에 박혔다.
이의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 미안하오. 태후.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와 적인가 하고... 전장에서 살아 온 몸이라 과민반응을 했으니 태후께서 이해하시오.”
이의민의 지금 행동과 태도는 구족을 멸할 수준의 언행이었다. 단순히 말투도 그렇지만 일단 살해위협을 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하태후는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극락과 지옥의 경계선까지 갔다 온 것 아닌가.
여태껏 하태후가 아무리 표독스럽게 떠들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기세등등했던 그녀가 드디어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킁킁. 그런데 웬 지린내가... 쯧쯧! 하여간 체통을 좀 지키시지.”
하태후가 당하는 것을 본 신하들은 더욱 움츠렸다. 태후에게도 저리 행동하는데 자신들은 자칫 잘못했다가는 단순히 위협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다.
결국 황제는 어전으로 끌려갔고, 태후 역시 지린내를 풍기며 태후전으로 끌려갔다. 나머지 신하들은 모두 옥에 갇혔다.
“주군. 드디어 뵙습니다. 소인 정욱이라 합니다.”
이의민이 황궁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명은 이의민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고, 다른 한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바로 정욱과 종요다. 정욱은 진작부터 종요를 따라 이의민을 주군으로 삼았으면서도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이의민은 오랜 친구와 재회를 하듯 정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번 연합과의 전쟁에서 정욱의 역할이 무척 컸다. 그러니 더 반가울 수밖에 없다.
“하하! 중덕. 자네에 대한 소식은 글로만 들었지만,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군. 이번 일에 자네의 공이 너무나 커. 참으로 잘해줬어. 원상. 자네 역시 마찬가지야. 자네들이 없었으면 일이 이리 쉽게 끝나지 않았을 거야.”
이의민은 둘을 칭찬하고는 바로 연합의 현황을 물었다. 연합을 상대로 거의 승리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지만, 아직 건재한 적들이 남아 있으니 역시 방심할 수 없다.
“연합의 다른 제후들은 지금 어찌 됐나? 특히 동탁, 그놈이 궁금하군.”
다른 연합 중에서도 이의민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인물이 바로 동탁이었다. 삼국지를 잘 모르는 이의민조차 많이 들어본 이름이 바로 동탁 아닌가.
이의민의 질문에 정욱이 읍을 하며 대답했다. 그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마치 오래된 군신 관계 같다.
“지금쯤 장안에 있을 겁니다.”
“아직도 장안이라.... 서량 쪽의 공작 역시 잘 됐나 보군. 어쨌든 장안이라면 금방 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니까, 그래도 오늘 하루는 군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고기를 좀 먹일 수 있겠어.”
역시 군사들까지 살뜰하게 챙기는 이의민이다.
순유가 한가지 걱정된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한데 만총의 보고에 따르면 여포가 곧 올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동탁뿐만 아니라 여포 역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일단 왕광과 만총이 하내에서 한번 막아보겠다고 했잖나. 포신도 보냈으니 한번 그들을 믿어보자고. 물론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지원할 수 있도록 하고.”
아직까지 변수는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승리를 만끽할 때였다.
“자! 오늘만큼은 다들 신나게 먹고 마시자!”
“와아아아!!”
이의민군 군사들은 명을 받고 신나게 술을 준비하고 고기를 구웠다. 이러니 사기가 충천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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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룻배 하나에 대략 십여 명의 사람들이 황하를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배에 타고 있는 면면을 살펴보면 놀라웠다. 그들 중 한명은 바로 얼마 전까지 황궁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조조다. 그리고 나머지 인물들은 전부 조조의 수하들이다.
황궁에서 승전 연회가 열리던 밤, 순욱이 하진을 찾아간 것은 조조의 석방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 이의민의 수급을 확인도 안했는데 너무 경계가 풀어진 것을 염려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순욱은 정욱의 계략에 의해 끝내 하진을 만나지 못했다.
정욱이 다시 하진에게 붙었음을 확인한 순욱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의민은 죽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은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 빨리 수를 써야 한다.’
이의민의 계략임을 예상한 순욱은 바빠졌다. 이대로 황궁까지 이의민의 손에 완전히 점령당한다면 조조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욱과 조조의 수하들은 몰래 지하 감옥을 급습해서 조조를 탈출시켰다. 마침 연회로 인해 지하 감옥을 지키던 황군 지휘관들은 전부 부재중이었다. 덕분에 조조의 수하들은 아주 쉽게 지하 감옥을 장악했다.
하지만 지하 감옥을 나오는 것과 낙양을 아주 탈출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황군의 감시는 쉽게 피한다고 하더라도 낙양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이의민군을 피해 도망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주군. 낙양을 탈출하는 건 결코 쉽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럼 황궁 비상통로를 이용하는 것이 어떤가?”
“예? 그런 것이 있습니까?”
조조는 수하들에게 황궁 비상통로의 존재를 알렸다. 조조의 조부 조등이 죽기 직전 했던 유언에 비상통로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조가 그걸 아는 것이었다.
덕분에 조조는 아주 쉽게 낙양을 탈출할 수 있었다. 비록 그를 따르던 군사들은 전부 사라졌고, 고작 십여 명의 수하들만 따르고 있었지만, 어쨌든 목숨은 건졌으니 훗날을 도모할 수 있게 된 조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