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79화 (79/175)

79.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 낸다 (4)

황궁 앞으로 수많은 군대가 속속 집결했다. 이제 내성에 있는 황군도 다 처리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무려 12만의 군사들이었다.

황궁도 한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궁성답게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12만 대군 앞에서는 작은 성일뿐이었다.

“너희들은 모두 포위됐다! 더 이상의 항쟁은 무의미하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이의민군에서 최후통첩을 해왔다. 황군 입장에서는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황궁에도 군사들이 남아있긴 했다. 황궁 금위군과 내성에서 겨우 도망쳐온 군사들인 그들의 숫자는 다 합쳐서 2만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급한 대로 다 받긴 했지만 내성에서 도망쳐온 군사들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표군을 동맹군인 것처럼 꾸며 뒤통수를 쳤던 이의민이다. 이번에도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군사 한명 한명을 대상으로 신분 확인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최후까지 항전하겠다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함부로 항복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이곳은 이 나라의 지존인 황제가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항복한다는 말은 다 포기한다는 얘기다.

모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황궁 바깥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왕좌지재라는 왕윤 역시도 뚜렷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았다. 설사 황군의 병력이 더 많다고 해도 두려운 이의민이다. 그런데 지금은 병력 차이만 10만이 넘었다. 그리고 아군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어떤 영웅이 온다고 해도 이 상황을 뒤집지 못할 터였다.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황궁 안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모든 대신들과 장수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태후가 직접 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하진을 다그쳤다. 하진이 얼마 전에 분명 역도들을 사실상 다 몰아낸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라버니! 대체 황궁 밖에서 떠들고 있는 저들은 무엇입니까? 항복을 하라니?! 분명 오라버니께서 역도들을 물리쳤다고 하지 아니 하셨습니까? 황상께서 지금 침수에도 못 들고 두려움에 떨고 계십니다.”

“.....”

‘이런 썅! 이 판국에 그깟 잠 좀 못 잔다고 큰일이나 나나!’

하진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진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주준에게 그 불똥이 튀었다.

“우장군! 역전의 용사라더니 이제 이름 날린 지도 얼마 되지도 않은 새파란 놈에게 이리도 당합니까? 우장군이라는 직책이 부끄럽지도 아니 하냐는 얘깁니다!”

하태후는 그 이후에도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비난을 이었다. 하태후가 그리 신랄하게 떠드는 와중에도 이의민의 항복 권고는 계속 됐다.

그런데 권고 내용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 그만 투항하라! 이제 너희들에게 단 1시진을 주겠다. 그 안에 답을 하지 않으면 항전을 하겠다는 것으로 간주하고 총공격을 하겠다.”

이전에는 항복을 권고하고만 있었는데, 지금은 시간을 주고 그 안에 결정을 내리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달라진 최후통첩 내용에 모두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 했다. 하태후 역시 겁을 먹은 듯 다른 대신의 어깨를 잡고 흔들기까지 한다.

“이, 이제 1시진도 아니 남았으니 어찌 할 건가? 어찌하겠냐는 말이야! 대책을 좀 내보라고!”

“태, 태후마마....!”

찢어지는 음성으로 공포와 혼란을 표현한 하태후. 하지만 그녀에게 잡힌 대신 역시 해결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때 주준이 비장한 표정으로 나섰다.

“태후마마. 소장이 남은 황군과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겠사옵니다. 폐하를 모시고 낙양을 탈출하시지요.”

“탈출이라니? 어디로 탈출을 하란 말이오? 황궁 주변은 저들이 전부 포위하고 있잖소.”

왕윤이 주준을 거들었다.

“태후마마. 황궁 안에 비상시에 쓸 수 있는 비밀탈출로가 있지 않사옵니까?”

그제야 하태후도 비상탈출구를 기억해 냈다.

“그, 그럼 탈출한 이후에는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서량에서 동탁이 오고 있다고 하옵니다. 지금쯤 아마 장안에 도착했을 것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장안으로 가서 그들을 받으셔야 하옵니다.”

“그럼 정녕 이 황궁을 버리고 장안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오? 정녕?”

아직도 낙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하태후. 낙양을 떠나 고생길을 해야 하는 게 좋을 리 없었다. 특히 황후가 되기 전 밑바닥 인생을 살아본 경험이 있기에 다시는 예전 같은 고생을 하기는 싫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으면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녀도 결국 도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갑시다.”

하태후가 황제를 데리러 가니 주준을 제외한 모든 대신들과 장수들은 그녀를 따랐다. 최후까지 항전을 결정한 주준을 따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대장군인 하진까지 하태후를 따라 같이 도망치려는 모습이었다.

그 광경에 주준은 헛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이런 이들을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 충성을 하는 것인가.... 아니다. 황실에 대한 충성을 의심치 말아야 한다....’

주준은 결사항전의 뜻을 내세웠지만 바로 황군을 이끌고 이의민군을 향해 덤비지는 않았다. 그의 임무는 이 전투를 이기는 게 아니었다. 가능한 많은 시간을 보내야했기 때문에 이의민군이 준 1시진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다.

그 시간 동안 황제와 하태후, 하진, 그리고 여러 신하들은 가덕전 부근의 한 건물 앞으로 갔다. 그리고 군사를 시켜 그곳의 벽 하나를 힘껏 발로 차게 했다.

퍽!!

그 벽은 바로 비상탈출구의 입구였다. 원래라면 무너지고 탈출로가 드러났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이곳이 아니었던가...? 아닌데.... 틀림없이 이곳인데....”

하태후가 착각한 게 아니었다. 왕윤도 그렇고, 이 비상탈출구의 존재를 아는 모든 이들은 이곳이라고 알고 있었다.

한 대신이 종요를 의심했다.

“착각을 한 것이 아니라 혹시 이의민의 세작.... 그러니까 종요 같은 놈이 미리 파괴한 거 아니겠습니까?”

종요라는 이름이 나오자 하진이 분통을 터뜨렸다.

“크윽! 종요, 그 간자 놈을 미리 처단했어야 됐는데 괜히 중덕이 말리는 바람에....”

하지만 왕윤은 종요가 비상탈출구를 어찌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아닐 것이오. 이곳은 황제폐하나 최측근, 삼공 같은 고위 대신들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장소가 아니오. 종요 같은 자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소.”

“젠장! 그런데 대체 왜 비상탈출구가 열리지 않는 것이오? 혹시 제대로 연 게 아닌 것인가? 여봐라! 전부 저 벽을 무너뜨려라!”

하진은 결국 많은 군사들을 동원해서 벽을 아예 박살냈다. 비상탈출구가 아니라 제대로 만들어진 벽이라도 무너지게 말이다.

결국 벽이 무너지고 그 내부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제야 왜 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이곳이 비상탈출구는 맞는 것 같았다. 벽 뒤로 긴 통로가 드러났다. 하지만 이들은 그곳으로 지나갈 수가 없었다. 통로는 거대한 바위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통로를 바라보는 하진. 또 다시 왕윤이 이 상황을 설명을 해주었다.

“누군가 이미 지나간 것이오. 들어가서 줄을 당기면 이렇게 바위가 굴러 입구를 막는다고 들은 적이 있소.”

“대체 어떤 놈이....?”

하지만 지금은 누가 먼저 비상탈출구를 통과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통로가 막혔으니 도망칠 길이 없는 그들이다. 그리고 이의민군이 주었던 1시진의 시간도 벌써 지나간 것 같다. 밖에서 병장기 소리와 군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통보했던 1시진이 지나가고, 이의민은 지체하지 않고 황궁을 공격했다.

“자! 전군! 황궁을 공격한다!”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도 없고, 시간을 끌 이의민도 아니었다.

이의민과 군사들은 황궁 외벽에 순식간에 사다리를 걸쳤다. 그리고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원숭이가 느려 보일 정도의 빠른 속도로 황궁 벽을 타고 올라갔다.

황궁 성벽 위에서 소수의 황군이 막으려는 시늉을 해봤지만 역부족이다. 고작 2만으로 사방에서 몰려오는 12만의 대군을 막을 수는 없다. 게다가 황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주준이 어떻게든 독려를 해보았지만, 이곳에서 싸우려는 의지를 보이는 황군은 2만 중에서도 극소수였다.

결국 이의민과 군사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도 않고 쉽게 황궁 안까지 넘어올 수 있었다. 주준은 그런 이의민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이의민! 이 역적 놈아!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이곳은 황제 폐하께서 계신 황궁이다. 어찌 여기에 칼을 들이댈 수 있단 말이냐?!”

어떻게든 동요시켜보려 했지만 이의민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행위다.

“오! 주 장군. 그간 강녕하셨소? 그런데 다른 장수들이나 대신들은 아니 보이는 걸 보니 혼자 결사항전이라도 하시려나 보오? 그런 겁쟁이들을 위해 이리 아까운 목숨을 바치는 꼴이라니... 주 장군 혼자만 불쌍하게 되었소.”

“이놈이....!”

이의민을 동요시켜 보려다가 오히려 본인 화만 돋운 주준. 이의민은 그런 주준을 가볍게 무시하고 나머지 황군들에게 얘기했다.

“너희들은 어찌할 테냐? 꼴을 보니 우장군 혼자만 날뛰고 나머지는 별로 싸울 생각도 없어 보이던데...? 대장군에게 충성을 바치겠답시고 이 자리에서 개죽음당할 테냐? 아니면 투항해서 황제의 곁을 지킬 테냐?”

이의민은 순유가 알려준 대로 황제가 아닌 대장군을 치는 것이라 강조했다. 이름 하나 차이지만 그 의미는 너무 달랐다. 이의민의 말대로라면 이 자리에서 투항을 하는 건 역적에게 항복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충신이 될 수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황군을 설득하는 건 이의민 뿐만 아니다. 일찌감치 항복을 했었던 청오, 정한, 심준도 예전 동료였던 군사들을 알아보고는 그들을 설득했다.

“이봐! 나야! 나! 청오. 그래. 그 병신 삼인... 망할.... 아무튼 자네도 투항하라고.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투항병이라고 차별 받는 거 전혀 없으니 걱정 말고 투항해.”

청오의 설득에 그 병사는 이의민군을 향한 창끝을 반대로 돌렸다. 그렇게 무기의 방향을 바꾸는 황군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어느덧 이의민군을 향해 무기를 겨누는 황군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주준만 혼자 외롭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주준은 다른 황군들도 자신처럼 굳건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달은 주준은 눈물을 흘렸다.

“어찌 이런 일이.... 이대로 황실이 무너지는 것인가?”

이의민은 혀를 차며 그 옆으로 다가왔다.

“자꾸 황실, 황실 하는데 전에도 얘기했잖소. 내가 싸우는 상대는 황실이 아니라 대장군이라고....”

‘뭐, 물론 나중에는 결국 황실과도 결판을 내겠지만....’

굳이 지금 속마음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결국 주준은 더 이상 항전하지 못하고 순순히 포박되어 끌려갔다.

“남은 역도들은 어디로 갔느냐?”

이의민의 질문에 황군이었던 교위 하나가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폐하를 뫼시고 가덕전 쪽으로 갔습니다.”

“가덕전이라.... 오랜만이군.”

그때는 숨어서 들어갔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대부를 들고 앞장서는 이의민이다.

0